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기념일, 최악의 선물

연인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소중한 기념일. 하지만 전혀 색다른 이유로 잊지 못할 기념일을 경험한 이들이 있다.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최악’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1. 서가은(가명), 여자, 21세, 서울시 성북구

난 전 남자친구한테 정말 잘했어. 남자친구가 재수생이어서 참 많이 챙겨줬지. 옷부터 시작해서 아플 땐 배즙이나 비타민까지 선물해줬거든. 내가 용돈도 더 받아서 더 많이 챙겨줬어. 맨날 돈이 없다 하니까 교통비부터 데이트 비용까지 다 내가 냈지.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자기 친구들이랑은 술 마시러 다녔더라고.

이렇게 잘 해줬는데, 내 생일에 선물은커녕 축하한다는 말도 없었어. 너무 속상해서 ‘넌 진짜 눈치가 없는 것 같아’ 이렇게 돌려 말했어. 그랬더니 다음 날 약속장소에 멀리 떨어진 곳부터 비닐봉지를 들고 헉헉대면서 뛰어오는 거야. 동네 옷가게에서 보세 옷을 사 왔더라고. 옷에 2만 원이라고 붙어있는 가격표도 안 떼고 가져왔어. 선물을 고를 때 나를 얼마나 생각했는지, 선물에 성의가 얼마나 담겨있는지가 중요하잖아? 같은 선물이라도 비닐봉지에 가격표를 달고 주는 것보다는 1천 원짜리 상자에라도 담는 성의를 보이길 바랐는데. 생색은 얼마나 또 내던지. 계속 옷 예쁘지 않냐, 잘 어울리겠다, 다음 만날 때 꼭 입고 와라, 신상이라더라 등등…. 내 스타일도 아니고 디자인이 너무 촌스러워서 몇 번 안 입었는데 다음에 만날 때 왜 안 입냐고 투정이더라고. 선물 받은 날 데이트 비용은 누가 냈냐고? 내가 다 냈지 뭐.
아 그리고 알고 보니까 선물 받은 그 원피스. 신상도 아니었어. 시즌 오프 세일 하는 거 지나가면서 봤다.


#봉다리 실화? #가격표는 떼고 주자

 

2. 조경진(가명), 남자, 20세, 경기도 안양시

내 전 여자친구는 생일이나 기념일마다 일부러 쓸모없는 선물을 사주곤 했어.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재밌어서 그랬대. 100일에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열어보니 익숙한 화장품 브랜드가 나오더라?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E사의 제품이었어. 아르바이트생들이 ‘공주님 어서 오세요~’하는 그 브랜드 있잖아! 그래서 처음엔 ‘이걸 왜 나한테?’ 하면서 당황했어. 화장품가게에 남성용 제품도 파니까, 남성용 스킨케어 세트인가? 싶어서 열어봤는데 네일아트 세트가 있더라고. 정말 황당했어. 재밌다고 까르르 웃는 여자친구한테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도 못하고, 실망한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하하 웃고 말았어. 잔뜩 재밌는 척, 쿨한 척. (전혀 기쁘지 않았지만)

200일 선물은 뭐였냐면 엘사 청소기였어. 엘사 청소기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나고 청소는 전혀 안 되는 아이들 장난감이야. 얼마 주고 샀냐고 물어보니까 싸게 사서 4만 원대로 샀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서 적잖이 당황했어. 이 금액대라면 다른 선물을 사고도 남았을 텐데. 나에게 비싼 쓰레기를 사준 셈이지.

생일 선물은 뭐 받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기념일 선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생일은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 생일 선물은 거품 제조기랑 손톱 정리 세트였어. 요즘 SNS 보면 쓸모없는 선물 주기 대회가 열리던데, 그거 볼 때마다 그때 받은 선물들이 생각나더라. 그냥 그렇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그 친구 선물로 2017년도 달력, 고양이 화장실 모래 같은 거 줄걸. 그 친구 강아지 키우거든.


#엘사 청소기에서 얼음 나오나 #선물 주고 욕먹지 말자

 

3. 김유비(가명), 여자, 21세, 서울시 서대문구

고등학생 때 만난 남자친구 얘기야. 평소에 남자친구가 향수 가지고 싶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해왔었어. 데이트 도중에 화장품가게 들어가서 향수를 이것저것 시향해보고 사고 싶다고 말하고, 인터넷으로 검색한 걸 카카오톡으로 보내주면서 이거 어때? 물어보고. 그때가 마침 100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서 얘가 향수 사달라는 얘기라는 걸 직감했어. 그래서 이번 기념일에 비싼 향수를 선물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P사의 5만 원대 향수를 샀어. 일주일에 용돈 만 원씩 받던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말 거금이었지. 예쁜 쇼핑백도 사서 정성스레 포장해서 선물했는데, ‘내가 향수 갖고 싶은 거 어떻게 알았어?’라며 그 친구가 너무 좋아했어. 모를 수가 있겠니.. 학생 신분으로 사기에는 비싼 브랜드에다가, 자기가 갖고 싶었던 걸 선물 받아서 기분이 좋았나 봐.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지.

그런데 자기가 준비한 선물 주기를 망설여하면서, 책가방에서 뭘 주섬주섬 꺼내더라고. 포장도 안 된 봉제 필통이었지. 그 친구는 가격대 차이가 나는 선물이 무안해서인지 필통을 건네면서 “이 필통 정말 실용적이야. 안을 보면 칸도 두 개로 나뉘어 있고 지우개 넣을 수 있는 공간도 있어. 진짜 유용할걸?”이라고 말하더라. 차라리 그런 말을 안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향수 금액 대 정도의 선물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포장조차 안 한 필통은 나에겐 너무 성의 없게 느껴졌거든. 뭐 지금 생각해보면 귀여운 추억이야. 하하.


#선물은 성의있게 #나에게 봉제 필통은 필요 없었다 #기쁘지 않은 선물

 

4. 서진우(가명), 남자, 23세, 서울시 강북구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하지만, 나는 여자친구와의 기념일을 아예 몰랐었어. 요즘은 연인이 된 지 얼마나 됐는지 세는 게 필수라고 생각하던데, 나는 사귀기 시작했던 처음부터 날짜를 셀 생각을 못 했지. 사실은 날짜를 셀 생각을 못 한 게 아니라 그냥 안 한 거였어.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귀기 시작한 날짜를 기억 못 해서 셀 수가 없었어. 그래서 여자친구가 우리 오늘 사귄 지 며칠 됐냐고 물어보면 76일인데 73일이라고 아는 척해서 더 싸우곤 했어. 사귄 날짜를 몰랐으니 둘만의 기념일은 아예 챙기지도 못했지. 기념일을 안 챙기다 보니까 여자친구가 속상해하는 티를 냈거든? 그때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챙겼어야 하는 건데 그때도 셀 생각을 안 했던 내 잘못이긴 해. 그거 때문에 여자친구랑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어. 싸우면서 속상함을 토로하는 여자친구에게 대고 ‘나 그런 거 원래 안 세잖아’라고 말했어. 사실 여자친구는 기념일을 안 챙기는 것보단 나의 태도가 속상했던 건데. 그냥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여자친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이렇게 싸움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 기념일, 그런 거 다 상술이야.
 

#기념일 대신 세주는 앱도 있다 #변명할 시간에 사과하고 앱 깔자

 

글 신은비 기자
god_is_rai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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