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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과 생계 사이’진통 끝에 취지 잃은 전안법
  • 이찬주 기자, 천건호 기자
  • 승인 2018.05.12 19:03
  • 호수 1811
  • 댓글 0

최근 특정 회사의 침대에서 라돈 등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 ‘라돈 침대 사건’으로 명명된 해당 사건으로 소비자 안전에 대한 논의가 뜨거워졌다. 조사 결과 라돈 침대의 방사선은 국내외 허용 기준치 이하였지만, 소비자들은 집단소송도 준비하고 있다. 이처럼 근래 소비자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는 높다. 이런 흐름을 반영한 법이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아래 전안법)이다. 

 

‘민생 악법’?
그 논란을 짚어보다

▶▶ 소비자들의 높아진 관심을 반영한 듯 판매 제품의 KC인증 사실을 홍보하는 모습.

전안법은 기존의 「전기용품안전관리법」과 「품질경영 및 공산품 안전관리법」을 통합해 만들어졌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으로 인해 각종 제품의 안전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커지자 대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각종 전기용품과 생활용품에 대해 사전 안전 인증을 의무화하는 것이 법안의 골자였다. 

우선 제조업자는 개별 판매 품목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안전인증기관의 인증을 받아 KC 마크를 표시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그런데 높게는 70만 원에 달하는 인증 비용이 문제였다. 특히 소량으로 다품목을 생산해 판매하는 소상공인들은 큰 부담을 떠안았다. 이와 관련해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 A씨는 “소상공인들은 중소기업에 비해서도 훨씬 소량생산을 하기 때문에 전안법에 의해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의류매장을 운영하는 B씨는 “매일 새로운 옷을 들여오는 사람한테 안전 의무를 지라면 장사를 할 수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높은 인증 비용 탓에 제품 가격이 오르자 소비자에게 가는 타격도 있다. 한국소비자원 제품안전팀 신국범 팀장은 “전안법이 시행되면 소상공인의 부담이 가중되는 만큼 가격에 대한 소비자의 부담도 올라간다”고 말했다. 

전안법의 여파는 대학가에까지 확산됐다. 고정적인 매장 없이 각종 액세서리나 의류 등을 만들어 팔던 대학생들이 직격탄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큰 초기자본 없이 소량의 제품만을 판매하기에 인증비용을 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직접 귀걸이를 소량 만들어 SNS로 판매를 하는 대학생 김지원(23)씨는 “인증 의무가 부과되면 SNS마켓을 운영하는 데 부담을 가지게 될 것”이라며 “소규모로 SNS마켓을 운영하는 사람 중 여러 명이 일을 그만두게 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소상공인들은 즉각 대응에 나섰다. 전안법 개정 대책위원회가 구성돼 개정안 통과를 촉구했다. 지난 2017년 말에는 전안법 개정 및 폐지를 주장하는 청와대 청원이 큰 호응을 받기도 했다. 입법부도 여야 없이 전안법 개정 필요성을 역설했다. 결국 청와대는 반복된 유예 끝에 지난 2017년 12월 29일 전안법 개정안을 내놨다. 안전관리 기준이 완화돼, 위해 발생 가능성이 낮은 가죽제품과 접촉성 금속장신구 등 23개 품목은 ‘안전기준 준수대상 생활용품’으로 분류됐다. 해당 품목들은 KC 마크 표시 의무를 벗게 됐다.  

 

길 잃은 전안법,
‘어디로 가야 하죠’

▶▶ 홍대의 한 매장에서 귀걸이를 판매하는 모습. 개정안에 따르면 귀걸이 등의 악세사리에 대한 KC인증 의무는 없어졌다.

개정안으로 인해 상인들의 사전인증 의무는 많이 완화됐다. 안전기준 준수대상 단계에 해당하는 제품들의 경우 사전에 시험 검사를 받거나 KC 마크를 붙여야 하는 의무가 없어졌다. 해당 제품에 대해선 자율적으로 안전기준을 준수하고 제조국, 업체명, 모델명, 제조시기 등만 표시하면 된다. 개정안은 오는 7월부터 시행된다.

전기용품에 대한 사전 인증 의무가 남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생활용품 판매자들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그런데 동시에 새로 부상한 문제가 있다. 지나친 규제 완화로 인해 원 입법 취지가 퇴색된다는 지적이다. 신 팀장은 “사전인증과 사후관리 중 하나를 강화하면 될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정안은 원안에 비해 사전 인증 의무를 완화하면서도 사후관리에 대해선 별다른 신설조항을 두지 않고 있다. 사실상 상인들의 부담을 더는 과정에서 헐거운 안전망은 제자리에 머문 셈이다.  

안전망이 약해지다 보니 소비자의 입장에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안산녹색소비자연대 관계자는 “전안법의 본래 취지가 소비자 안전을 위한 거였다면 소비자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했다”며 “현 개정안은 소비자보다 소상공인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며 현재 상황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국가기술표준원 제품안전정책과 관계자 C씨는 “전안법 개정 과정에서 상인들의 입장을 많이 반영했기 때문에 이젠 소비자의 안전을 더 생각해야 할 때”라며 “소비자의 안전 관리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고 전했다.

이에 일부 지자체는 인증이나 안전성 시험에 드는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실제로 경기도는 섬유제품 유해물질 시험분석비용의 75%가량을 지원해준 바 있다. 부산광역시도 섬유·패션 소상공인 지원 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A씨는 “정부 차원에서 점점 지원을 늘리려고 하는 추세”라며 “정부에서 소상공인들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계속 건의해나가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C씨는 “현재로서는 상인들의 부담을 많이 완화해줬으므로 소비자 안전을 보호해나가는 게 우선”이라며 “소상공인들의 부담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지원사업도 병행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애당초 전안법에 대한 상인들의 반발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충분한 공감대 형성 없이 밀어붙인 정책이 강한 역풍을 맞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개정안의 내용은 정작 소비자 안전 보장이라는 본 취지를 상당 부분 포기한 것이었다. 결국 전안법은 본 취지를 잃고 표류 중이다.

 

 

글 이찬주 기자
zzanjoo@yonsei.ac.kr

사진 천건호 기자
ghoo111@yonsei.ac.kr
 

이찬주 기자, 천건호 기자  zzanjo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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