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 사랑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TheY의 솔직한 이야기, TheX 그 일곱 번째 이야기는 ‘사랑 혹은 섹스’다.

 

#사랑 없는 섹스

내 첫 섹스는 스무 살이었다. 스무 살 1월,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그때 ‘사귄다’ 말하던 오빠네 자취방에 갔었다. 나를 아껴주겠다며 콘돔도 안 사온 그 오빠를 콘돔 사오라며 쫓아 보낸 뒤, 그렇게 깨진 내 ‘처음.’ 그다지 강렬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때 이후로 섹스를 한 횟수는? 글쎄. 아마 몇 백 번은 넘을 것이다.

나는 섹스를 재미로 한다. 내게 섹스의 정의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행위'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도 있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 섹스는 내게 서로 즐기는 행위, 탁구 하듯 그렇게 상대와 그 순간을 주고받으며 즐기는 게임이다.

내게는 연인이 있다. 나는 연인과 사랑으로도 섹스하고, 연인이 아닌 사람과 재미로도 섹스한다. 사랑으로 하는 게 주지 못하는 종류의 쾌락을 재미로 하는 게 주고, 재미로 하는 게 주지 못하는 안정감을 사랑이 준다. 그래서 나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지금을 가장 행복하다고 여긴다. 이러지 못할 때는 답답했으니까.

내 연인은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받아들여 줬다. 당연히 상대에게도 같은 조건이 적용되고, 서로를 질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섹스의 정의는 ‘연인 간의 행위’가 아니니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한, 남들과 스트레스를 풀고 즐기고 오는 걸 질투할 이유, 없다. 서로에게 가장 우선순위인 건 서로인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렇게 믿으니까. 

나는 이런 우리의 연애를 자유연애라고 칭한다.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겠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될 때만 가능한 연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누구보다 신뢰가 깊고,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확신한다.

연인 외에 관계를 가지는 다른 사람들은 내게 ‘섹스를 계기로 만난 친구들’이다. 섹스하지만 그들은 내게 연인이 아닌 친구다. 서로 연애 상담을 할 수 있는, 공강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고민이 생기면 술 한 잔 함께 기울일 수 있는 친구. 매일같이 카톡하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친구. 남들이 동아리, 공부, 대외 활동을 계기로 사람을 만나고 ‘베프’를 만들 때, 나는 섹스를 계기로 같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우리들의 관계를 정의한다.

내 목표는, 서로의 결혼식까지 갈 수 있는 FWB(Friends With Benefit; 친구 사이지만 성관계까지 가능한 관계로 친구처럼 많은 교류와 데이트,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이 특징)를 맺어가는 것이다. 내 기준에서 섹스는 오히려 친구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랑 없는 섹스는 ‘감정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사람을 도구로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다. 사랑이 아닌, 친구로서, 사람으로서 서로에 대해 애정을 돈독히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을 도구로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섹스를 도구로 사람을 만난다. 스킨십이 주는 친밀감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친밀감이 언제나 이성 관계, 그러니까 ‘사랑’을 하고 질투를 하는 관계로 나아가지만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관계를 지향하는 사람들,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그렇게 친구가 된다. 이런 나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나라는 사람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과 만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다면,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나는 폴리아모리(Polyamory: 비독점적 다자연애)을 지향하는 걸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대답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내가 만나는 나의 연인 한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다른 많은, 서로 다른 인간적 매력을 가진 친구들을 아낀다. 그게 내 인간관계고, 그게 나의,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신념이다.

글 나비

 

#사랑 없는 섹스

사랑의 정점. 보통의 로맨스 소설과 영화에선 섹스가 이렇게 묘사되곤 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 섹스와 사랑을 동일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한번 다른 걸 시도해볼 마음은 열려있었다. 

잠시만 손을 내놓아도 손이 얼 것만 같던 지난 겨울, 미적지근한 기숙사 방은 지루하기만 했다. 긴 휴식기간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허전함이 마음 한구석에 맴돌았다, 핸드폰만 만지던 와중 새로운 만남을 하고 싶어 만남 어플을 깐 것이 시작이었다.

어플에서는 좀체 ‘정상적인’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건전한 만남을 찾기보다는 외로움을 달래줄 소모품으로서의 누군가를 찾는 듯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하지만 그런 불건전함도 즐길 수 있을 만큼 나도 지루해 있었다. 종일 하는 알바 때문에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수 없기도 했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오랫동안 관계가 없어 몸이 달아 있기도 했다. 

심심하다는 글을 올리자마자 반응은 빠르게 왔다. 수많은 쪽지 중 노골적인 대시를 거르자 하나로 추려졌다. 섣불리 관계를 조르지 않았고, 나와 성적 취향이 맞는 걸 확인하고 보니 나는 그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지루한 방학의 짜릿한 일탈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새로운 사람과의 섹스는 설레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약속을 잡았고, 만나게 됐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해코지를 당하는 건 아닌가, 막상 만났는데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손톱을 잘근거렸다. 고민하는 사이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는 차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 키에 괜찮은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만나자마자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로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얘깃거리는 금방 사라졌다. 결국 둘 사이 정적이 감돌았고, 문이 없어 더 민망한 샤워실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샤워실에 들어갔다. 

샤워를 끝낸 우리는 침대에 누워서 각자의 성감대와 원하는 체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기가 무섭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 낯섦에 이성은 금방 무너졌다. ‘모르는 사람과 섹스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보다 내 촉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내내 뜨거운 숨소리로 방을 채웠다. 오감만이 말하는 묵묵한 섹스엔 감각만이 오롯했다. 긴장한 탓인지 몸은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고, 짜릿한 감각은 살결을 따라 흘렀다. 몸은 솔직했으며, 쾌락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관계는 감각적으로 완벽할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신경이 분산되지 않고 감각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내 방의 공기는 차가워졌다, 섹스가 끝난 후의 정적은 허무함을 가져다 줬다. 감각적으로 완벽했기에 모자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섹스를 ‘사랑을 나눈다’라고도 말하듯이 사랑 없는 섹스는 완벽하지 않았다. 서로를 원해서 하는 섹스가 아니라 쾌락을 원해서 한 섹스였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섹스를 끝낸 후 머릿속에 맴돌았다. 끝나고 나서 좋았냐고 묻는 애인의 사랑스러운 말투, 관계를 하는 도중 잠시 멈춰 눈동자에 나의 얼굴만을 가득 담던 그의 습관, 숨결에 섞여 나오는 사랑한다는 말은 모두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섹스를 끝낸 후 나는 쾌락적으로 ‘채워졌지만’, 그 채움은 단순한 채움에 불과했다. 어쩌면 섹스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깊은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글 주꾸미

 

#섹스 없는 사랑

먼저, 이 글은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에 대한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나와 나의 애인의 관계를 감히 육체적인 사랑을 초월한 정신적인 사랑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지만,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제자들과 성적 관계를 가져왔고, 못생긴 플라톤은 한 번도 소크라테스의 간택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플라톤의 열등감 아래 자신은 육체적인 사랑을 초월해 소크라테스와 정신적인 사랑을 나눈다고 했고, 이것이 플라토닉 러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플라토닉 러브는 그 시작이 열등감이었으니, 여기에선 과감히 배제하고자 한다.

나도 내 애인도 섹스를 해봤고, 성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섹스 없는 사랑’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궁합에 대한 다차원적인 논쟁이다.

‘섹스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섹스의 정의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삽입을 하면 섹스인가? 하지만 삽입보다 전희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전희라고 한다면 또 어디 까지가 기준인가? 오랄? 애무? 혀의 사용? 아니면 그냥 둘이 나체로 좁은 공간에 같이 있는 것? 아니 전라여야만 섹스가 성립하는 건가? 아 모르겠다. 그냥 섹스란 서로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호혜적인 행위 아닌가?

내 생각에 섹스는 그의 욕망이 나에게 있고, 나의 욕망이 그에게 있을 때 발생하는 모든 스킨십이다. 다만 그 스킨십이 성적 욕망을 해소한다는 조건은 달려있을 것 같다. 지금 나의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에게 욕망을 품고 있지 않다. 욕망과 사랑은 분리될 수 있을까? 너무나 어려운 문제다. 네가 없을 때 느끼는 공허함, 옆에 있을 때 느끼는 충만함, 네가 어떤 존재든 나에게는 빛나는 존재, 이건 욕망일까, 사랑일까?

우리의 연애는 다모토리에서 시작됐다. ‘섹스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이 민망해질 지경이다. 3일 간의 불같은 사랑을 하고 유학생인 그녀는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미국에 있게 됐다. 2주 정도의 쏜살같은 시간 아래 우리는 많은 것을 느꼈고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속궁합이 안 맞는다. 성적 욕망이라는 물물시장은 너무나 다양한 품목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가진 물건과 그녀가 가진 물건이 서로에게 만족할 만한 거래가 되지 못했다. 서로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그 낯선 어색함은 자존심을 계속 찔러 댔다. 이 어색함 때문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우리는 정말 많이도 싸웠고 죽을 듯이 밉기도 했다.

결국 화해는 서로의 에너지를 다 소모 시켜 합의에 이르렀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섹스는 서로가 가진 에너지를 모조리 소모해 버리고 빠른 속도로 화해에 도달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에너지를 섹스가 아닌 격렬한 감정소모로 풀어야 했다. 서로의 응어리가 풀리지 못하고 지속했던 연애는 정말이지 힘들었다.

그녀는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연애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섹스 없는 사랑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전처럼 많이 다투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의 관계를 지속하는 도덕은 책임감이다. 20살 넘어서까지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다. 나의 욕망, 그녀의 욕망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삶을 지속하는 것은 성적 욕망보다도 더 단순한 원리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실재감. 섹스가 서로의 실재감을 빠르게 해소해 버리지 않기에 우리는 서로의 밑바닥을 보고 그로 인한 실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섹스가 없기에 우리의 에너지가 빗나갈 일이 없었다. 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행복과 불행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그녀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현재 다른 길은 없다.

글 하찮은 오리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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