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물랑루즈』와 압생트 이야기

이제 막 이사를 온 시인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의 눈앞에 갑작스레 기면증에 걸린 배우가 천장을 뚫고 떨어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티앙은 눈앞에 떨어진 배우의 대역으로 캐스팅되고, 그가 대사로 시 한 구절을 내뱉자 대뜸 등장한 초록요정은 그를 물랑루즈 클럽으로 이끌었다.

“난 초록요정이에요. 음악 소리에 언덕은 잠을 깨네”

초록요정의 환상적인 춤으로 이끌린 크리스티앙이 물랑루즈 클럽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샤틴(니콜 키드먼). 초록요정의 시 한 구절과 화려한 춤은 환상 같던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시작했음을 알린다. 

화려한 노래와 짜임새 있는 이야기에 비해 영화 시작은 너무 드라마틱해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크리스티앙의 눈앞에 떨어진 배우에 대한 서사, 물랑루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초록요정 역시 뜬금없었고 갑자기 분신술을 한 듯 같은 모습을 한 여러 명의 요정이 동시에 현란히 춤을 추는 모습 역시 어색했다. 

하지만 혹자는 이 장면이 압생트를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라고도 말한다. 크리스티앙이 마신 술 압생트의 별명이 초록요정이고 영화 내내 강조되는 보헤미안의 대표적인 술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한여름 밤의 꿈같은 두 남녀의 사랑도, 물랑루즈라는 환락의 공간도 무언가 뜬금없지만 짧고 강렬한 환상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술 압생트는 영화 『물랑루즈』 전반을 대표한다.

크리스티앙에게 영원한 운명의 상대를 찾아준 술 압생트는 예술가들의 술 혹은 대중적인 보헤미안 술로 굉장히 유명한 술이다. 실제로 압생트는 저렴한 가격과 중독성 있는 향 덕택에 프랑스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와인보다도  많은 인기를 누렸다. 압생트는 특유의 탁한 녹색 때문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안에는 향쑥, 살구씨, 회향, 아니스가 향료로 들어있다. 압생트의 독특한 색은 특히 주성분으로 꼽히는 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압생트는 쑥의 줄기와 잎을 잘게 썰어 잔에 넣고 높은 도수의 알코올을 부어 숙성한 뒤 이를 추출한 다음에 다시 한 번 증류해 만든다. 이름 역시 성분에 걸맞게 향쑥을 라틴어로 일컫는 말인 ‘압신티움’에서 파생한 것이다. 최고 70도에 달하는 높은 도수와 쑥의 성분 덕택에 씁쓸한 맛이 많이 나는데 이 쓴 맛을 살려 유럽에서는 식전술이나 위액 분비 촉진제로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처럼 인기 많은 압생트가 금지됐던 시기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압생트를 마시면 투존*이라는 성분에 의해 강력한 환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압생트에 들어있는 투존은 중추신경에 심각한 장애를 동반하며, 지각장애와 정신착란 그리고 간질과 유사한 발작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성분이다. 실제로 스위스의 한 남자는 압생트에 취해 환각에 빠진 상태로 자신의 가족을 모두 살해했으며, 유명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압생트에 취한 채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현재 유통되는 압생트에는 환각성분이 들어있지 않다.


독특한 술, 압생트를 맛보기 위해 기자는 신촌의 더빠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55도의 압생트55(8천 원), 60도의 페르케르만 압생트(9천 원), 70도의 투넬 압생트(1만 1천 원) 세 종류의 압생트를 팔고 있었다. 세 종류의 압생트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색의 차이가 있었다. 도수가 높을수록 진한 녹색을 띈다.

압생트를 마시는 방법은 보통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다. 그러나 지나치게 높은 도수와 씁쓸한 맛이 부담스럽다면 두 번째, 프랑스에서 흔히 마시던 방법으로 마시는 것도 좋다. 이는 압생트를 잔에 따른 뒤 술잔 위에 구멍이 뚫린 압생트 숟가락을 놓고 그 숟가락 위에 각설탕을 올린 다음 물을 떨어뜨려 설탕을 녹여먹는 방법이다. 마지막 보헤미안 방법이라 불리는 세 번째 방법이 가장 화려하다. 빈 잔 위에 압생트 숟가락을 놓은 뒤 각설탕을 올리고 그 위로 압생트를 부어 각설탕을 적신 다음 불을 붙인다. 불이 꺼진 다음 각설탕에 물을 부어 마저 녹인 뒤 술과 섞어 먹는 것이 마지막, 보헤미안식이다. 기자는 55도는 스트레이트, 60도는 프랑스식, 70도는 보헤미안식으로 마셔봤다.

우선 55도다. 가장 낮은 도수가 55도라니. 향만 맡았을 때는 솔잎향 방향제 냄새를 맡는 기분이었다. 호불호가 확실히 갈릴 듯하다. 냄새는 도수에 따라 확실히 짙어졌다. 스트레이트로 마신 55도의 압생트는 단맛이 나는 동시에 혀가 저릿해졌고 짙은 쑥 냄새와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다만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안주나 입가심할 물이 필요 없을 만큼 달콤했다. 다음은 60도다. 물로 희석하고 드립식으로 만든 프랑스식 60도의 압생트는 도수가 더 높음에도 각설탕이 들어가 더 달달했고 목의 화끈거림이 덜했다. 오히려 스트레이트로 마신 55도보다는 부담이 덜했으나 확실히 솔잎향 같은 쑥냄새는 더 났다. 보헤미안식의 70도 압생트는 첫맛이 깔끔했다. 특유의 쑥향도, 알코올 향도 별로 나지 않았다. 그러나 뒷맛에서 술맛과 쑥향이 강하게 올라왔다. 그래도 스트레이트보단 화한 느낌이 덜했다. 도수가 세다보니 확실히 술맛이 올라올 때 더 강한 향과 느낌이 났다. 세 잔의 압생트를 마신 결과 기자의 혀가 마비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행한 기자는 끊임없이 물을 찾았고 왜 위액 분비 촉진제로 사용되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확실히 도수는 세다. 압생트를 마시면 보인다는 초록요정을 만날 수 있을까 살짝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요정은 만나지 못했다.


고흐와 고갱, 애드가 앨런 포, 마릴린 맨슨까지. 압생트는 시대를 거쳐 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압생트는 환각을 일으키는 파괴적인 술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압생트에 매료됐을지도 모른다. 이번 주말, 일상에서 벗어나 압생트의 강렬함에 매료돼 보자. 단, 딱 한 잔만.

 

*투존: 유기화합물 모노테르펜케톤의 일종으로 신경에 영향을 주는 독성물질

 

글 윤현지 기자
hyunporter@yonsei.ac.kr
사진 박건 기자
petit_gunny@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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