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실시간 검색어에 ‘펜스룰’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올라왔다. 클릭해 뜻을 읽어보자 그때의 저녁시간 대화가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반년 전 나눈 대화였다.

이럴 때 만큼은 아버지가 참 못나보였다. 어느 일요일 저녁, 오랜만에 가족 네 명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던 때였다. 서로의 근황을 묻던 중 자연스레 아버지의 회사 이야기가 나왔다. 아버지는 ‘술자리에서 여직원과 남직원이 평화롭게 공생할 방식을 찾았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길 꺼냈다. 회식자리에서 여직원과는 절대 술을 함께 마시지 않으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일절 신체적 접촉 없이 택시비만 쥐어서 보낸다는 것이었다. 

답답했다. 합당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절대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 반박을 할 논리가 준비되지 않아 아버지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직장 내 성추행이 난무하는 시대에 깨어있는 사람인 마냥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착잡했다. 이에 대해 핏대 올려 싸우며 완벽한 논리로 그 시스템의 불공정함을 논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결국 그날은 오랜만의 가족 식사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대화 주제를 돌리며 스스로의 비겁함을 정당화했다. ‘아빠는 딸도 있으면서 어떻게 그러냐. 내가 여직원이었으면 속상했겠다’라는 소심한 대꾸와 함께.

펜스룰은 마치 미투 운동에 대응하는 남자들의 새로운 행동 강령처럼 나타났지만, 결국에 그전부터 비슷한 움직임은 있어왔던 것이다. 그저 지금 새로운 명칭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 이 펜스룰이라는 것의 범주가 워낙 모호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단어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펜스룰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하원의원 시절이던 지난 2002년 의회 전문매체 「더힐」과의 인터뷰에서 “아내를 제외한 여성과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고, 아내 없이는 술자리에 가지 않는다”고 밝힌 데서 유래했다. 대외적인 이미지가 특히나 중요한 정치인에게 ‘아내에게 충실한’ 모습은 긍정적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의도가 어찌됐든, 그가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사석에서 어떠한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리는지는 사회적 옳고 그름을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펜스처럼 다른 사람들이 사석에서 소위 ‘불미스러운’ 일을 피하기 위해 특정 성별과의 교류를 아예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회적으로 규탄을 받을만한 행동은 아니다. 물론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이 펜스룰이 이제는 공적 영역에까지 침투해오고 있다. 공적인 영역, 특히 ‘조직’에 침투한 펜스룰은 문제가 된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집단에서는 남성이 조직 내 의사결정권을 장악한다. 2016년 고용노동부의 조사 결과, 조사 대상 기관(공공 329곳, 민간 1천676곳)의 전체 노동자 중 여성 관리자 비율은 20.39%로 전체의 1/5에 불과했다. 수적으로 남성이 우세한 상황에서 펜스룰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운동이 된다면 되려 여성을 그런 기득권에서 배제할 근거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는 회식에서 자연스레 여직원들이 가기만을 기다리다가 남직원들만 남았을 때 비로소 ‘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편한’ 이야기가 뭐길래? 아마 여직원들 앞에서는 못하는, 여직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업무, 조직과 관련된 부분이 나온다면 여직원들은 놓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직장 내 왕따가 아니면 무엇인가. ‘펜스 룰’이라는 명목 하에 여성들은 집단 내 기득권에서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조직 내 펜스룰은 소위 ‘불미스러운 일’을 피하기 위한 손쉽고 간편한 방법이다. 기득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조직 내 배제의 대상인 여성은 그리 많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시에 비겁한 방법이기도 하다. 왜 여태껏 여자의 기준에서 남자를 배척하는 룰은 없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불가능하니까. 기득권의 대다수가 남성인 상황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피한다는 것은 곧 기득권에서 스스로 멀어지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현시대의 권력구조를 외면하며 펜스룰을 외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다. 펜스룰이 남성에게 환호 받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현시대의 기형적인 권력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아버지의 회사는 그러한 암묵적 규칙을 지키고 있다. 아마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회사가 그 비겁한 회식 시스템을 펜스룰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정당화할 것인지,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고 바뀔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다. 

문제 발생을 막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우선 피하고 보는 미봉책과도 같은 펜스룰은 그 정당성에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제야 생각이 정리됐다. 오는 주말 다시 한 번 아버지께 이 얘기를 꺼내보려 한다. 펜스룰의 비겁함에 대해 따지고 들 수 있는 비겁하지 않은 사람이 돼보려 한다.

 

글 연세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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