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모 사회부장 (언홍영·15)

저 멀리 있는 실루엣은 연극계의 대부다. 노벨문학상 후보도 보인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국민 배우, 신망 두터운 대학교수, ‘딸바보’ 아버지의 모습도 있다. 이것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영광의 이야기다. 그러나 좀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와 후배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희롱했다. 추행은 일상적이었고 성폭행까지도 저질렀다. 그런 적 없노라 잡아떼기도 하고 몸을 낮춰 기억나지 않는다고도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새로운 증인이 등장한다. 수십 년 동안 가슴에 묻었다 끄집어낸 이야기들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킨다. 그들은 추악한 성범죄자다.

해 질 녘 만물의 경계가 희미해지면 멀리서 본 형체만으로 개와 늑대를 구분할 수 없다. 불어로 ‘L'heure entre chien et loup’,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이 관용적 표현에서 개는 개고 늑대는 늑대다. 당연히 범죄자는 합당한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 이상 피 흘리는 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진짜 과제다. 무엇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비극적 ‘관행’을 되풀이시켰나. 무엇이 그간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았나.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해결해야 한다. 울타리를 보강하고 불을 밝혀야 한다.

문제를 직시하고 건설적으로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미 고질적 정치병은 운동의 의미에 흠집을 냈다. 냉가슴 앓는 수많은 이들 앞에서 정치 공작을 논했다. 비판이 쏟아지니 수사(修辭)나 행간의 의미를 운운했다. 무섭도록 당당하고 편리한 변명이다. 본말이 전도돼 가치는 간데없고 깃발만 남은 진보의 민낯이다. 한 진영만의 문제로 몰고 가려는 것은 아니다. 자기반성 없이 타인의 아픔을 기회로 삼는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성희롱적 만화를 그려 구설에 올랐던 시사만화가가 ‘미투 운동 관련 글을 읽고 종일 가슴이 아팠다’고 말하는 모습은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신념과 가치에 대한 말들은 손바닥보다 쉽게 뒤집힌다.

미투가 단말마로 끝나지 않으려면 결국 이런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 관련 이슈를 선거철 상대 후보 공격에 쓰는 무기쯤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사람이 먼저’라는 문구가 선거철 캐치프레이즈로 남아선 안 된다. 환부를 도려내는 데 좌우가 있을 수 없다. 해묵은 진영 논리를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적폐 청산에 임해야 한다. 대국(大局)적인 보여주기식 정치에 머무르지 말고 원칙의 정치를 해야 한다.

원론적이고 요원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오히려 간단할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때론 위에서, 때론 아래에서 변화가 시작됐지만 더 오래 가는 쪽은 늘 후자였다. 결국 정치인은 대표자에 불과하다. 여론이 모이면 변화는 따라오기 마련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토크빌이 말한 대로,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자기성찰이 결여된 비판은 진정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비판의 날을 세워야 한다. 피해자가 실명과 얼굴을 내걸고 뉴스에 나오지 않으면 ‘꽃뱀’ 소리를 듣는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 덮어놓고 제 식구를 감싸는 ‘동지애’, 내부 고발자에게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이 사라져야 한다.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 강요돼선 안 된다. 피해자에게서 문제를 찾거나 책임을 전가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유별나거나 극성맞은 것으로 매도해선 안 된다.

미투 운동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초에 이 길고 지난한 자기고백과 폭로에 끝이란 게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만 화두는 확실히 던져졌다. 우리가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 용기 내 그림자에서 나온 이들 앞에 더 이상 ‘몰랐다’는 변명이 설 자리는 없다. ‘정말 그런 일이 있긴 하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설 자리도 없다. 오직 각자의 판단과 선택, 그리고 실천만이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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