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정이 내 열정일 줄은 몰랐지

최서인 (국문/정외·15)

2월 6일 강릉, 출근 이틀째.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이걸 때려 쳐, 말어?’

부푼 기대를 안고 강원도까지 왔으나, 내가 이쯤에서 그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합리적이라는 마음 속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궂은 식사와 잠자리에 관해 도시괴담처럼 떠돌던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샤워기 수압과 매일 점심 ‘김치, 깍두기, 단무지, 피클’ 조합으로 4첩 반상을 만들어 내는 숙소 식당, 한 시간째 오지 않는 셔틀버스.

게다가 4학년 1학기를 앞두고 있는 나. 친구들이 다들 인턴이며 자격증 준비를 하며 분주하게 보내는 시기에 혼자 강릉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 같아 애가 탔다. 주변 자원봉사자들은 대개 나보다 어렸다. 취업 게시판 등에 들어가서 ‘취준으로 올림픽 봉사활동을 그만둔다’는 글을 찾아보며 손톱을 깨물었다. 일이라도 많이 시키면 열심히 하면서 보람이라도 느끼겠는데, 시키는 일도 별로 없었고 그마저도 대기시간이 더 길었다.

‘시간을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 올림픽이 개막해버렸다.

 

올림픽 개막. 올림픽 개막은 곧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펼치고, 그들을 보기 위한 관중들이 드나들고, 그 모습을 전하기 위한 방송국 및 신문사 관계자들이 출입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개막식 이후 경기장은 온통 피가 절절 끓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중계석에서, 관람석에서, 게임필드에서 고함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열정으로 가득한 그 뜨거운 공간에서, 중도 포기를 고민하던 나는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과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자기 확신을 느꼈다. 내가 나 하나 좋자고 자원봉사 일을 그만둬서, 열정을 분출하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나는 그곳에 찬물을 끼얹고 나오기보다는 아주 작은 톱니바퀴로서라도 경기장의 일부가 되어 보고 싶었다. 한 번 엿본 이상 등지기 어려울 만큼 뜨겁고 매력적인 무대였다. 나는 그 곳에 남기로 했다.

당연하지만, 봉사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일이 내 일상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컬링 경기장에서 사진기자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나는, 이전처럼 지정된 자리에 서서 사진기자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연습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훔쳐 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열정에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오로지 그것만으로 강릉 생활 일주일만에 자원봉사자로서의 일상이 적응되기 시작했다. 유명 선수들의 연습하는 모습과 대기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특권으로 여겨졌고, 경기장을 오고 가는 외신 기자들과 변변찮은 이야기나마 나누는 일이 유쾌했다. 그러다 친해진 사람들과 핀 트레이딩을 해서 새로운 배지를 얻을 수 있다면 그만한 행운이 없었다. 친구가 된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휴일에 막국수며 물회 같은 것을 먹으러 다니기도 했다.

처음에는 보람없다고 느꼈던 올림픽 봉사활동을 끝까지 마치고 이제 와 생각하는 것은, 강릉에서의 매일매일이 얻을 것 투성이였다는 것. 비인기종목이었던 컬링이 유명세를 얻게 된 것도, 한국 컬링 신화의 주역들인 우리 선수들의 경기를 매일 직관할 수 있었던 것도, 뜻밖의 인기를 누리게 된 마스코트 수호랑의 굿즈를 편히 얻게 된 것도 모두 더없는 행운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열정에 함께하겠다고 마음먹고서야 올림픽 자원봉사를 자원하며 기대했던 보람이 찾아왔다. 큰 국제행사의 참여자가 되어본다는 느낌. 내가 무언가 배우고 있다는 확신. 타지에서의 특별한 추억. 그 모든 것들은 선수들과 올림픽 관계자들이 고군분투하는 현장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가지게 된 것들이다. 쭈뼛거리며 주저하던 내게 그들의 열정이 전이된 셈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의 슬로건인 ‘Passion, Connected'를 매일 보면서도 전혀 와 닿지 않았는데, 그것이 나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참 새삼스럽다. 확실한 것은, 올림픽 현장에는 현실적인 문제에 주저하는 나를 뜨겁게 만드는 열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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