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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연세문화상] Otroki

[오화섭 문학상(희곡 분야) 당선작]

Otroki

김정수 (HASS · 17)

 

1장. 도둑

 

전시장 안, 새하얀 벽에 흑백 배경에 초록색이 눈에 띄는 그림 여러 점이 걸려있다. 좌측에는 작은 소파가 있고 우측에는 밖으로 통하는 현관문이 있다. 모리스, 정면으로 나와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하고 작품 쪽으로 돌아가 심호흡을 쉰다. 맞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모리스: (잠시 뜸을 들인 후, 발랄하게) 슬로베니아 최고의 미술관, 빈치치아트레움을 찾아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를 맡은 모리스 슬로보단Morris Slobodan입니다. (전시 좌측, intro 글을 가리키며 점점 우측으로 이동)Bloody Gaia. 피투성이 가이아. 붉은색보다 선명한 녹색이 눈을 사로잡는 이 작품들은 최근에 예술계에 떠오르는 샛별, 수잔 셰벌리Susan Schebuli 화백의 작품이죠. 환경문제라는 범지구적 차원의 주제를 그리스 신화의 모티프로 다룬 점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오는데요. 우선 첫 작품, <Gaia no. 0>부터 감상해 보시죠. 이 작품은… (갑자기 좌측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빈치치 관장님.

 

빈 치치: (좌측에서 입장하며)이런, 내가 자네를 방해한 건가?

 

모리스: 아닙니다. 막 들어가 보려던 참입니다.

 

빈 치치: 열정이 넘치는 모습, 보기 좋군. 하지만, 몸도 살펴 가면서 하게. 이미 자네가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로 뽑힌 것만으로도, 자네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걸 증명해 주니까.

 

모리스: 과찬이십니다.

 

빈 치치: 자네 같은 젊은이가 이리 열정에 차 일을 하는 걸 보면, 참 대견하고…. 또 씁쓸하지.

 

모리스: 네?

 

빈 치치: 자네 만한 아들이 있었다네. 곧잘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지금은 내 곁에 없지만.

 

모리스: 그 말씀은….

 

빈 치치: 악한의 손이 그 아이를 떠밀었지. 아마, 이젠 천국의 인자한 아버지 옆에서 더 행복하겠군.

 

모리스: 뭐라 드릴 말씀이….

 

빈 치치: 이런, 내가 분위기를 다 망쳐버렸군. 이제 늙어 주책이 맞나 보네. (잠시 뜸을 들이다) 그래, 그러고 보니, 곧 수잔 셰벌리 화백이 직접 여길 들릴 텐데, 서로 인사하는 것도 좋겠어. 마지막으로 검토 차 와보겠다고 했거든. 그러고 보니, 전시 기획 때도 대리인을 보냈을 뿐,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

 

모리스: (잠시 뜸을 들이다, 과장되게 발랄한 목소리로)……그럼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빈 치치: 낯을 많이 가리는 친구지. 이렇게 늦은 시간에 검토를 하는 것도 그래서일 거야. 이번 전시 일정에 사인회를 넣으려고 우리가 여간 애먹지 않았는가!

 

모리스: 다행히, 관장님께서 수잔 작가님과 일전에 인연이 있어서 개최 가능한 행사였죠. 과연, 소문처럼 슬로베니아 예술계에서 가장 발이 넓은 신사답습니다, 관장님.

 

빈 치치: 허허, 소문은 곧잘 부풀려지는 법이라네. (손목시계를 보고) 이런, 나야 말로 먼저 들어가 봐야겠군. 수잔이 오면, 우누라트Unurat 경비와 함께 친절히 맞아주게.

 

모리스: 예, 안녕히 가십시오.

 

빈 치치, 우측 문으로 퇴장. 모리스, 무언가 불안한 듯, 좌우로 돌아다닌다. 그 때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리스: 수…수잔 화백님?

 

라디나: (절박하지만,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이, 이…문 좀 열어주세요! 제발요!

 

모리스: 예? 크게 말해 주세요…. 누구시라구요?

 

라디나: (답답해서 큰 목소리로) 문 좀 열어 달라니까! (곧 바로 목소리 낮춰 울먹거리며)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쫓기고 있어요…

 

모리스: 일단 진정하시고…

 

라디나: 뱃속에 아이가 있어요. 아이까지 다치게 할 순 없어요.

 

모리스, 잠시 머뭇거리고는, 재빠르게 열쇠로 문을 연다.

 

모리스: 어서 저 뒤로…

 

라디나가 서둘러 뒤로 들어가자, 모리스 문을 다시 잠그려고 다가가지만, 기다렸다는 듯 칼을 든 괴한이 들어온다.

 

괴한: 방금 그 년, 어디다 숨겼어?

 

모리스: 자, 진정하시고…

 

괴한: (칼을 들이밀며 더 위협적으로) 얼른 안 불어? 여기로 들어가는 거 다 봤다고... 먼저 네 얼굴부터 갈아줄까?

 

괴한이 위협하는 동안, 모리스, 한 손으로 가디건에 가려져있던 허리춤의 총에 손을 갖다 댄다. 수잔, 그 와중에 문으로 들어와 출입문 옆의 비상버튼을 누른다. 싸이렌 소리가 울리는 전시장.

 

수잔: 그 여자애 잡아서 뭐 하려고? 왜, 재미라도 보게?

 

괴한: (뒤돌아 보며 소리에 당황하여) 이게…무슨…!

 

수잔: 3분 내로 경찰이 들이닥칠 거야. 여긴 내 작품의 전시장이고, 난 이 전시장이 네 더러운 욕망에 오염되는 걸 원치 않아서 말이야.  

 

괴한: 젠장…!

 

칼을 들이밀며 도망치려 하지만 수잔이 발을 걸어 문 앞에서 넘어진다. 그러나, 바로 일어나서 달려 나가는 괴한

 

수잔: 찌질하네. 뛰어 봤자, 곧 잡힐 텐데… (전시관 쪽을 보며) 이제 괜찮으니까 나와도 돼요.

 

라디나: (천천히 나오며) 감사합니다.

 

수잔: 다친 덴 없어요? 이런, 팔에서 피가 나는데, 괜찮아요?

 

라디나: 괜찮습니다. 조금 스친 것뿐이에요.

 

수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묶어주면서) 이건 안 돌려줘도 돼요.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네… 그래도 병원을 가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디나: 아뇨!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저도 저지만, 저 분도 혹시 다치지 않았을까, 염려되어서… 아까 그 자식이 칼로 위협하는 걸 본 것 같아서요.

 

라디나가 그를 바라보는 데도 아무 말 않고 잠자코 있는 모리스. 아직 꿈에서 덜 깬 사람처럼 서있다.

 

라디나: 저기… 괜찮아요?

 

모리스: 아…네! 물론이죠. 멀쩡합니다. 이런, 팔을 다쳤군요!

 

수잔: (말 끊고, 살짝 경계하는 눈초리로)당신은 누구죠? 경비는 아닌 것 같고…

 

모리스: …귀한 분께 소개가 늦었네요. 이번 전시 큐레이터, 모리스 슬로보단입니다. 수잔 셰벌리 작가님 맞으시죠? 이 아가씨는 제가 알아서,

 

수잔: (말 끊고, 라디나에게) 네, 제가 알아서 하죠. 아가씨, 뭐 도난 당한 거 있어요?

 

라디나: 그게… 사실, 비행기표랑 가방, 둘 다 뺏겼어요. 그 자식이 수중의 제 물건을 뺏고, 칼로 저를 찌르려고 해서 (잠시 휴지) 그것도, 제 배를…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쳤죠.

 

모리스: (갑자기 치고 들어오면서) 그러고 보니 임신 중이시라고 했죠? 우선,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겠군요. 저기, 비상구 쪽 소파에 앉아 계세요. 구급상자를 가져오겠습니다.

 

수잔: 임신…이라고요?

 

라디나: 아, 그게… 3개월 됐어요.

 

모리스: (재빨리 나타나서 수잔을 경계하는 듯이) 상처를 봐드리겠습니다. (수잔이 묶은 손수건을 풀고 상처 부위를 소독한다) 혹시 모르니 내일 병원에 가보시죠. 늦었으니, 집까지는 우나루트 경비에게 부탁해 모셔다 드리도록 하죠. 주소를 불러주겠어요?

 

라디나: 저, 그게… 집이 없어요.

 

수잔, 모리스: 네?

 

라디나: 제 남편이 한국에서 배구선수로 뛰게 되어서… 한국에 가기로 했거든요. 그이 소속팀에서 항공권과 지낼 곳을 마련해준다고 해서요. 비행기 티켓도 내일 새벽 한국행이었어요. 그래서 살던 집은 이미 다 처분을 했는데…

 

수잔: 부모님이나 친척집은 주변에 없나요?

 

라디나: 제가 고아라서…….

 

수잔, 모리스: …………….

 

라디나: 아, 뭐… 상관 없어요! 저 노숙 여러 번 해 봤거든요. 비행기표를 다시 구하는 게 좀 성가시겠지만 하룻밤쯤은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요!

 

수잔: 혹시 이름이 뭐에요?

 

라디나: 예? 라디나요.

 

수잔: 라디나 씨,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중간 벽쪽으로 들어가며 전화를 건다) (소리만) 나예요, 수잔….

 

라디나: (모리스에게 다가가며) 정말 고마워요. 아깐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했네요.

 

모리스: 천만의 말씀. 좀 더 서두르지 못해 제가 더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방금 고아라고…

 

수잔: (등장하면서 모리스의 말을 끊고) 됐어요! 라디나 씨, 비행기표를 구할 동안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될 것 같아요. 여기가 미술관이긴 하지만, 몇 일 묵기에도 썩 나쁘진 않거든요. 슬로베니아 최고의 사립 미술관이니만큼 시설도 끝내주니까요.

 

모리스: (조금 끊듯이 들어온다) 관장님께서 알게 된다면 곤란할 텐데요.

 

수잔: 방금 직접 통화하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자, 라디나 씨. 제가 비행기표 구하는 거랑 병원 일도 알아봐 드릴 게요.

 

라디나: 아뇨,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감사한 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수잔: 괜찮아요. 부담 없이…

 

모리스: (응수하듯이 말을 끊으며) 라디나 씨, 그럼 수잔 작가님 말대로 하시죠. 가방이 도난 당했으니, 당장 방을 빌리기도 어렵겠죠. 오늘 밤은 여기서 묵는 편이 낫겠군요. 우리 미술관의 빈 치치 관장님은 무척이나 자비로운 분이랍니다. 라디나 씨가 몇 일 신세지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라디나: (머리를 쥐어잡고) 으아…너무 죄송한데… 그럼 정말 하룻밤, 아니… 비행기표를 구할 때까지 이틀 밤 정도만 여기서 신세 져도 될까요?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금전을 붙일게요.

 

우누라트: (목소리만) 관장님께 연락 받았습니다. 모셔야 할 분이 누구이지요?

 

모리스: 이 아가씨입니다.

 

라디나: (수잔과 모리스, 두 사람의 손을 잡으며)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에요. 저와 아이 모두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라디나, 가운데 통로로 퇴장한다.

 

모리스: (약간 비꼬는 투로) 관장님과 인연이 있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꽤 긴밀한 모양입니다.

 

수잔: 일전에 함께 작업한 적이 있어서요. 저는 검토를 마치고 가 볼 테니, 먼저 들어가 보세요.

 

모리스: 아, 예. 그 편이 작가님께서 편하시다면. 첫 만남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반가웠습니다. 모레, 싸인회에서 뵙지요.

 

수잔: 그러게요, 썩 화기애애하진 않았죠, 둘 다 첫인상이? 모레 보도록 해요. 모리스 슬로보단 씨.

 

모리스: (자기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약간 놀라며) 네.. 그럼 이만.

 

수잔, 열심히 그림을 살핀다. 모리스, 문으로 나와 걸어나오며, 허리춤에서 총을 꺼낸다.

 

모리스: 아… 겨우 참았네…(총을 꺼내 수잔 쪽을 돌아보며 총을 겨눈다) 그래, 머지 않았어, 내 인생 최고의 걸작.

 

암전.

 

 

2장. 색맹

 

우측무대. 전시장 밖, 모리스가 전시회에 취재차 나온 기자에게 음료수를 건넨다.

 

기자: 아, 이리 주세요. 제가 따 드리죠.

 

모리스: 고맙습니다. 전시 촬영은 다 끝나셨나요?

 

기자: 그럼요, 오늘 카메라에 담긴 이 사진들이 우리 잡지의 1면을 장식할 겁니다.

 

모리스: 부디, 기자님께도 흥미로운 전시가 되었기를 희망합니다.

 

기자: 물론입니다…. (뜸을 들이다, 음료수를 팍 따면서) 거 참, 우리 사이에 뭐 이리 격식을 차리냐? 그냥 평소대로 해, 이 자식아.   

 

모리스: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모리스, 자신도 음료수를 따려고 하나 기자가 먼저 그의 음료수를 가로채 따서 준다.

 

모리스: 아, 땡큐. 찾아봐 달라는 건, 어떻게 됐어?

 

기자: 이제 거의 다 됐어. 조만간 그쪽에서 연락 올 것 같아. 너는? 준비는 잘 돼가? 네 인생을 건 역작 말이야.

 

모리스: 물론.

 

기자: 조심, 또 조심하라고. 그 작품은 거리에 널리고 널린 해바라기 모작 따위와는 비교가 안될 테니까. 신중, 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모리스: 낮에는 월간지 기자, 밤에는 악명 높은 파파라치, 그런 위험천만한 이중생활을 즐기는 자식에게 조언을 듣고 싶진 않은데. 너야 말로, 그렇게 유명인들 뒤만 캐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라.

 

기자: 무슨 소리? 그 유명인사란 것들이 내 밥줄인데. 자기가 찍혔다 싶으면, 내용 확인도 안 하고, 대리인 편으로 지폐뭉치를 쥐어주는 데, 내가 멀리할 이유가 없지. 굳이 따지자면, 날 위협하는 건 사진의 피사체가 아니라 그 피사체의 추종자들이야. 난 그저 팩트를 찍어 공개했을 뿐인데, 왜 무고한 나를 물고 늘어지는지. 자신이 그려 왔던 환상이 깨지니까 괜한 데에 화풀이하는 겁쟁이들 주제에……. 뭐, 그렇다 해도, 가끔 혈서 같은 거 날라오면 무섭긴 하더라.

 

모리스: 그러다가 나중에 변사체로 발견되는 거 아닌가 몰라.

 

기자: (짐짓 진지한 척 하며) 어쩌겠냐… 그게 바로, 진실만을 전하는 이 나에게 주어진 가혹한 숙명 아니겠냐?

 

라디나, 한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우측에서 걸어 나오다 모리스를 발견한다.

 

라디나: 어머, 나와계셨네요?

 

모리스: (약간 어색해하며) 아, 라디나 씨... 네, 오늘 전시는 마무리 되어서요. 병원에 다녀오는 길인가요?

 

라디나: 네. 옆에는….

 

기자: 아, XX월간지 기자, 000라고 합니다.

 

모리스: 오늘 전시를 취재하러 오신 분입니다.

 

라디나: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라디나 입니다.

 

기자: (잠시 라디나를 빤히 보다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반가워요, 라디나씨. 그런데, 이런, 아리따운 아가씨를 두고 제가 먼저 자리를 비우는 무례를 범하겠군요. 방금 잊고 있던 선약이 떠올라서요.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모리스 쪽으로 고개 돌려서) 기사가 완성되면, 메일로 보내드리죠.

 

모리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디나: 아, 안녕히 가세요.

 

기자 퇴장. 라디나, 종이봉투에서 목사탕을 꺼낸다.

 

라디나: 저, 큐레이터라고 하셨잖아요. 목 많이 쓸 텐데, 하나 드세요.

 

모리스: 아, 감사합니다만,

 

라디나: 어허, 거절은 거절이에요. 여기요.

 

마침, 목이 아팠던 모리스, 목사탕 곽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는다.

 

모리스: (우물거리며) 그럼, 감사히. 지갑을 찾은 모양이군요.

 

라디나: 뭐, 핸드폰은 하나 새로 마련하고, 각종 신분증도 다 신청해 놓긴 했지만, 불행히도, 지갑은 못 찾았어요. 사실, 이 사탕은 수잔 작가님께서 큐레이터 챙겨주라고...

 

모리스: (켁켁거리며) 누…누구요?

 

라디나: 괜찮아요? 목에 걸렸어요?

 

모리스: 아닙니다. 멀쩡해요.

 

라디나: (잠시 뜸을 들이다 혼자 사색에 잠겨, 정면을 응시하고) 어쨌든, 수잔 작가님, 정말 멋진 분 같아요. 어제 처음 만났는데도, 이것 저것 친절하게 다 챙겨주시고, 마치 딸을 둔 엄마처럼요! 게다가, 화가라니! 제가 미술에는 재능이 통 없어서 그런지,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 보면 괜히 부럽고 멋지고 그렇더라고요. 지금 하는 전시가 수잔 작가님 전시라고 했죠?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뭐가 뭔지도 몰랐는데, 이제 좀 집중해서 하나하나 감상해 보려고요.

 

모리스, 라디나가 말하는 동안 목 사탕 곽을 빤히 바라본다.

 

라디나: (다시 모리스 쪽으로 고개 돌려) 그래서 그런데요, 큐레이터님! 혹시 시간이 된다면, 수잔 작가님 작품 해설, 해 주실 수 있나요?

 

모리스: (사색에서 빠져 나와, 급히 목사탕 곽을 뒤로 던지면서) 네?

 

라디나: 그러니까, 정말 간략히요……. 아, 혹시 목이 많이 상하셨나요? 그럼 오늘은 됐고…

 

모리스: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라디나 씨는 저희 미술관의 손님이니까요. 이쪽으로. 

 

모리스와 라디나, 전시장으로 들어간다. 전시가 끝난 후라 텅 빈 전시장. 오직 둘만이 있다.

 

모리스: 일단 기본적으로 이번 전시의 컨셉은 bloody Gaia, 피투성이 가이아입니다. 눈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초록색뿐만 아니라, 흑백으로 표현된 탯줄, 자궁, 안구 등의 소재들이 그로테스크와 그에 반한 절제된 미학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화적 모티프와 결합하여 더더욱….

 

라디나: 어어, 잠시만요, 큐레이터님.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제가 미술에 조예가 깊은 편이 아니라서요. 조금만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없을까요?

 

모리스: 제가 실례했네요. (조금 섬뜩하게 웃으며) 그럼, 더 직관적으로 가볼까요?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만물의 어머니이죠. 여기서는 즉,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 지구라고 할 수 있죠. 그 어머니가 초록빛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라디나: 음…. 사실 전 민트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서 땀으로 나온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리스: 기발하네요, 해석의 차이는 언제나 있는 법이니까요. 다만, 평론가들의 생각은 라디나 씨와 다르답니다. 가이아, 즉 지구가 푸른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본답니다. 지구가 푸르기 때문에 눈물도 푸른 색인거죠. 지구가 눈물을 흘리는 건 다름아닌 그 자식인 인간들 때문입니다. 인류가 세운 문명, 기술이 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으니까요. 부모 입장에선 자식이 속을 아주 제대로 썩이고 있으니 피눈물이 날 수 밖에요. 아마, 가이아는 자식이 미워 죽을 지경일 겁니다.

 

라디나: 글쎄요… 그 정도는 아닐 거 같아요.

 

모리스: 네?

 

라디나: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미워하겠어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제나 저를 쓰다듬으며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아이는 사랑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요.

 

모리스: ……. (조금 흥분해서) 그렇게 생각하나요?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빈민가 거리엔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이 너무 많지 않나요? 당신도 고아였다면, 익숙하겠죠. 그 좁아 터진 공간에 부모의 애정을 구걸하는 아이들이 쥐떼처럼 들끓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어떤 것도 그들 손에 떨어지지 않죠.

 

라디나: 저기….

 

모리스: (자신이 흥분한 것을 깨닫는다) 죄송합니다. 조금 흥분해서... 설명 이어서 할게요, 그럼,

 

라디나: (말 끊고) 모리스 씨, 아무리 자식이 사고뭉치라고 해도, 부모가 그 자식을 미워할 순 없어요. 주제 넘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모리스 씨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가이아가 피눈물을 흘린다고 했죠? 그건 증오의 눈물이 아니라, 엇나가는 자식을 향한 걱정과 애정의 눈물이라고 생각해요.

 

모리스: ……모든 아이는 사랑 받아 마땅하기 때문인가요?

 

라디나: 네, 뭐, 그런 셈이죠.  

 

모리스: (곧 평정을 되찾고, 다시 미소를 띤다) 물론, 그런 평론가도 있었죠. 이건 어머니가 애정과 걱정을 담아 자식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라고. (목소리를 내리깔며) 인간들이여, 각성하라! 자칫하다 돌이킬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뭐, 이런 느낌으로.

 

라디나: (갑자기 유해진 분위기에 웃는다) 모리스 씨, 방금 배우이신 줄 알았어요.

 

수잔: (1장처럼 또, 갑자기 옆 문에서 훅 들어온다) 그럼 평론가 나부랭이는 됐고, 이제 모리스 슬로보단 큐레이터의 해석이 궁금하네요. 라디나 씨도 궁금하죠?

 

라디나: 수잔 작가님, 깜박이 좀 키고 들어와요…. 어제부터 불쑥불쑥 들어와서 사람 놀래 킨다니까요.

 

모리스: 수잔…셰벌리, 작가님. 오늘 전시는 끝났는데, 어쩐 일로?

 

수잔: 놓고 간 것도 있어서, 그나저나, 한 번 말해봐요. 빈 치치 관장님께 들어보니, 내 작품으로 졸업논문까지 썼다면서. 그런 모리스 씨의 평가라면, 분명 내 다음 작품에도 도움을 줄 것 같네요.

 

라디나: 진짜요? 어쩐지, 말씀하시는 게 남다르다 했어요!

 

수잔: 라디나 씨도 궁금해 하잖아요, 어서요.

 

모리스: 평론가가 아닌 이상, 수잔 작가님이 만족할 만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텐데요..

 

수잔: 원래 평론가들의 수군거림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요. 내 작품을 시체마냥 헤집어 놓아야 분이 풀리는 그런 부류니까. 그냥 감상만 늘어 놓아도 괜찮으니 듣고 싶네요.

 

라디나: 저도 듣고 싶어요!

 

모리스: (Gaia no. 0에 손을 대려 뻗다가 떨림이 있는 손을 되려 뺀다) 하하, 정말 진부한 감상일지도 모르는데요? 뭐… 네, 그래요, 제게 큰 영감을 준 작품이죠, 작가님의 작품은. 보는 순간 눈이 멎는 줄 알았으니까.  

 

라디나: 손이나, 발이 아니라 눈이 멎는다고요?

 

모리스: (웃으면서) 네, 그렇습니다. (수잔 작가님 쪽으로 고개 돌려) Gaia no.0~2은 9년 전에 나온 작품이죠? 그 때 제가 꽤 힘든 시기였는데…….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세상이 정지한 느낌이었어요. 저 흑백 속 영롱한 녹색이 제 눈의 생기를 앗아간 거죠. 이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어쩌면 화가는 원래, 녹색을 쓰려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잠시, 수잔의 눈치를 살피다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원래는 사람들의 시선을 강하게 끄는 붉은 피를 재현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너무 진부한 거죠. 그래서 자극적이기만 한 진부함을 버리고, 신선한 녹색이 오히려 역설적인 대안을 택한 게 아닐까…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디나: 그럼, 원래는 그냥 붉은 색을 쓰려고 했다고요?

 

모리스: 초보의 억측에 불과합니다. 다만 보통, 초록은 눈의 피로를 완화시키는 색이니까, 시선을 잡아두려면 꺼리게 되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들은 달라요. 청록에 가까운 다양한 채도의 초록을 쓰면서, 오히려 핏빛의 잔혹함을 넘어서는 음산함을 자아내지요. 지나치게 울창한 나머지, 헨젤과 그레텔이 길을 잃을 것 같은 위압적인 숲… 그렇기 때문에, 가이아의 심리가 더욱 칼날 같이 다가오는 겁니다. 태초부터 열의가 파고들 틈 따위는 없었던 냉철한 비정! 슬픔도, 따뜻함도 제가 볼 땐 이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정서입니다.

 

수잔: …무슨 의미이죠?

 

모리스: 애초에 가이아는 모든 것을 등진 채 (안구가 그려져 있는 Gaia no.2를 가리키며 눈은 수잔에게 고정하며) 메마른 눈길로 그 미래만을 향하고 있는 거에요. 가이아에게 자신 그 외의 것들은 애초에 논외대상이었던 거죠! 외투를 벗게 하는 뜨거운 태양보다는 그 외투에 서리가 맺힐만한 차가운 폭풍의 어머니였던 겁니다. (떨리는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맞잡으며) 이 작품이 아니었다면, 전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막다른 벽에 부딪친 찰나였거든요. 수잔 작가님의 그림은, 제 마음을 붙잡아 줬습니다.

 

라디나: 완전 멋있어요. 아까 설명해주신 평론가들의 해석과 비슷한 듯 색다르네요. 그런데 말대로라면, 이 작품이 모리스 씨의 꿈을 이뤄준 거나 다름 없네요!

 

모리스: (쓴 미소) 그런 셈이죠.

 

수잔: 쿡, 하하하하하하.

 

라디나: 수잔 작가님?

 

모리스: (조금 당황하며) 무슨 문제라도……?

 

수잔: 아니, 꾸밈없이 근사하네요. 아, 비웃은 게 아니에요.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하죠. 솔직히 말하면, 전 당신의 ‘감상’이 꽤 마음에 들어요. 진심으로.

 

모리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수잔: 혹시 내일 싸인회 끝나고 시간 있나요?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모리스: (이상야릇한 미소)……물론, 영광입니다, 작가님. 

 

암전.

다시 조명 켜지면서, 미술관 밖 나무 앞에 빈 치치가 서 있다. 기자가 그의 옆에 조용히 선다.

 

기자: 수목장을 했다 들었습니다만, 이 나무였군요. 지극한 부성애(父性愛)입니다. 이렇게 본인이 일하는 곳 바로 옆에 마련할 정도라면….

 

빈 치치: 자네는 누구지?

 

기자: 제 소개가 늦었군요. XX일간지에서 나왔습니다. 이번 빈 치치 아트레움 전시 취재차 들렀지요.

 

빈 치치: 쓸데 없는 관심은 끄고, 갈길 가시오.

 

기자: 아, 훤칠하고 당당한 젊은이였죠. 3년 전쯤인가, 제가 운동을 하다 좀 다쳐서 병원을 갔을 때, 뵈었던 적이 있거든요. 분명, 좋은 의사가 되었을 겁니다. 아마, 갓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었죠? 이렇게 일찍, 그것도 그 끔찍한 모습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되었는데…….

 

빈 치치: 닥치시오!

 

기자: 진정하시죠, 관장님.

 

빈 치치: 관리를 불러야 만족하겠나? 얼른 여기를 뜨지 않는다면…!

 

기자: (말을 끊고, 사진 두 장을 빈 치치에게 내 보이며) 아드님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관장님, 저와 거래를 하지 않으시겠어요?

 

빈 치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입 꼬리를 올리는 기자.

암전

 

 

3장. 작품1

 

조명이 켜지면, 수잔 전시장 가운데에 있고, 모리스는 중앙에 세워둔 카메라 쪽으로 가서 녹화 버튼을 누른다.

 

모리스: 오셨습니까? 제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고요? 아, 이 카메라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잔의 거동이 눈에 띄게 부자연스럽다. 오로지 모리스만 일방적으로 말하는 형태이다.

 

모리스: 제가 그렇게나 기다리고 애태웠던 시간이 왔네요.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작품 쪽을 가리키며) 솔직한 감상을 말해볼까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처음 본 게. (손이 조금 떨리자) 아, 이 손에 눈이 가시나요? 그저 태어났을 때부터 탯줄에 목이 감겨 정해진, 일종의 운명 같은 거죠,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똑 같은 말을 너무 많이 반복하네요. 의미없는…. 그 날은, 내 운명을 선고 받은 날이었습니다. 이 손으로, 그리고… 이 눈으로는 미대 진학이 불가능하다고, 추천서 같은 건 써줄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에 조금은 절망의 눈물을 머금은 채 거리를 떠돌던 10대였죠. 그러다 마주친 겁니다. 미술관 포스터로 걸려있는 저 그림을. 내 갈색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이 갈색. 이런 상황에 익숙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이겠죠?

 

모리스, 수잔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모리스: 아마 맨 처음에 당신이 의도한 건 붉은 피였을 텐데. 난 저 갈색, 으로 비쳐지는 그 강렬함을 마주했을 때, 난 모든 것을 잃었는데, 당신은 처녀작이라고 내놓은 그 그림에 이상하게도 처음엔 분노가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그래요, 난 감동을 받은 거에요! 무려, 녹색을 적색으로 착각하여 색을 쓴 어리석은 색맹 예술가에게. 대형포스터라서 그 크기에 움츠러든 걸까요, 아니면 노골적으로 묘사된 장기(臟器)에 질겁한 걸까요? 아, 아니에요, 아니야. 그건 영감 같은 거였습니다! 나를 이미 한 번 죽인 당신이, 나의 죽어가는 영감을 되살린 겁니다.

 

수잔: 그게, 무슨, 소리, 인 거죠?

 

모리스: 난 그 길로 고아원을 나왔어요.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단 하나였습니다. 영감에서 피어나 내 손에서 완성될 나만의 작품! 물론, 손으로 그리진 못하겠지만. 이런 나라도 예술을 할 수는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술이 아무리 하한선을 필요로 한들, 그 하한선을 뛰어넘는 기회엔 신분의 제한이 없으니까요. 신체의 제한도! 이 작품을 완성할 날을 9년동안 단 하루도 잊지 않고 꿈꿔왔어요. 나의 주제 또한 이 피투성이와 다르지 않답니다. 제 작품에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새하얀 벽, 당신의 작품, 당신의 존재, 진짜로 붉은 피 그리고 – 이 총성까지.

 

모리스, 옆구리에서 총을 꺼내 수잔을 겨눈다.

 

수잔: 이게, 무슨…! (엉거주춤 무릎을 꿇는다) 미,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

 

모리스: (수잔을 내려다보며) 당신은 더 이상 작품의 어머니가 아닌 거에요! 내 작품의 구성요소일 뿐! 이건 그저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뿐인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카메라에 담기는 겁니다. 피를 화염처럼 쏟아내는 당신이라는 태양! 그리고 태양을 겨냥하는 백색의 모리스…!

 

탕! 소리와 함께 수잔은 쓰러지고, 암전.

 

4장. 작품2

 

 조명이 켜지자 수잔은 사라자고 모리스만이 아까 그 자세로 서있다. 다만 그의 손에 있던 총이 옆구리에 꽂혀있을 뿐.

 

모리스: 그래, 이게…이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어째서... (그대로 머리를 쥐어뜯는 모리스) 그 자식이 그 말만 안 했어도, 그랬으면, 이렇게 머저리처럼 망설이지도 않았어! 아니, 아니지. 괜히 동요할 필요 없잖아? 사람을 찾아달라고 먼저 부탁한 건 나였지. 사람을 찾았다고, 내가 괜히 흔들릴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피 묻은 손으로 만나도, 괜찮을까? 이해해 줄까?

 

그때 발에 치이는 목사탕 곽. 모리스, 허리를 숙여 사탕 곽을 줍고, 구기려다 멈추고 그냥 빤히 바라본다. 순간 사람이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 곧바로 총을 가디건으로 가리는 모리스.

 

수잔: 유치한 복수 계획, 잘 들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모리스: 작가님? 그게 무슨 말..

 

수잔: (또 말을 끊으며) 그 눈 높다는 평론가들도 눈치 채지 못했는데 말이야, 이 작품들에 원래 갓 데뷔한 여자 작가가 쓰려던 색은 심홍이었다는 걸. 그 사실을 짚어낼 수 있는 인간은 내가 색맹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뿐일 텐데, 그렇다면 내 죽은 부모가 다시 살아왔다거나……. 그래, 내 유일한 혈육, 자식의 존재뿐 아니겠니? 오트로키, 이름을 바꿔서 헷갈렸잖니?

 

모리스: (순간 당황하지만, 곧 사탕 곽을 구기며) 아……. 글쎄요, 꽤나 재치 있지 않았나요? 거리의 뮤즈에서 추앙 받는 화가가 된 수잔 화백의 자식은 응당, 모리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잔: 몽마르트의 뮤즈이자 화가인 쉬잔 발라동과 그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를 연상시킨 거니? 흥미롭긴 하지만, 꽤나 유치하구나.

 

모리스: 오트로키Otroki, 즉 아이. 탯줄에 목이 감겨 태어난 아이한테 붙여주기엔 너무 가혹하죠. 아이란 존재는, 무릇, 사랑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수잔: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모리스: 그런가요? 전 라디나의 그 말이 꽤 인상 깊었습니다만.

 

수잔: 라디나는 주어진 환경과는 달리 낭만에 젖어있는 사랑스러운 아이지. 그러나 방금 말은 불행히도 낭만이 아니구나. 모성애라든지, 부성애라든지, 모두 한물간 관습에 불과하지 않겠니? 그 어떤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 솔직히,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단다.

 

모리스: 너무 떳떳하신 모습에, 감히 말문이 막히는군요.

 

수잔: 내가 뭐 쥐구멍에 숨을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경제적 사고를 거쳤을 뿐이란다. 편익과 손해, 합리적 사고, 뭐 그런 거.

 

모리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리고 방치하는 데에 어떤 합리적인 사고과정이 적용될 수 있을까요?

 

수잔: 간단하단다. 행복해 지기 위해 널 가졌는데, 행복해 지지 못했으니 버렸을 뿐.

 

모리스: 아, 그러니까, 너무 가지고 싶어 졸라서 산 장난감이 생각보다 마음에 안 들어서 싫증이 나버렸다? 풉. (갑자기 표정이 험악해지면서) 누가 더 유치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사람을 장난감 취급하다니? 생각보다 더 엉망이네요.

 

수잔: 그런 변덕쟁이 아이와의 비교는 사양하마. 증오와 책임은 별개란다. 그래, 애초에 내가 널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니? 너는 내 불행의 증거인데. 나는 널 여전히 증오하는 편이란다. 그러나, 그렇다고 널 장난감 취급하지는 않았어. 난 널 책임지려 최대한의 노력을 했단다. 그 노력을 걷어찬 건 오히려, 고아원을 뛰쳐나간 19살의 너였지.

 

모리스: 기만하는 건 여기까지. 더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이네요. 당신은 날 고아원에 유기한 채 뒤돌아보지 않았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후 어떤 집단에 속하든 고아라고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특히 내가 미술을 한다 했을 때 모두가 날 비웃었죠. 당신이 나에게 다한 그 최소한의 책임이 혹시, 거리가 아닌 고아원 바닥에 나를 내던진 그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오히려 저를 있는 힘껏 신경 써준 건 없는 사정에도 돈을 보내 준 제 이름 모를 아버지겠죠.

 

수잔: 어머, 오해가 있는 모양이구나. 그 돈을 보낸 건 나였어. 다만, 네 얼굴을 도저히 마주할 비위가 없어서 편에 사람을 붙였을 뿐.

 

모리스: 거짓말도 정도껏 하시죠. 이 이상 아버지를 모욕한다면, 그 이후의 하는 모든 말을 당신의 유언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수잔: 머릿속에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사람을 설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지. 그래서 딱히 널 타이를 생각은 없단다. 하지만, 만약 네가, 내가 책임을 다한 그 지원마저 손가락질 하는 거라면, (더 냉혹한 말투로) 그거야말로 유구무언이로구나. (분위기를 조금 전환하여) 요새는 늙고 치매에 걸린 부모를 요양원에 돈을 주고 맡기는 것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 같은 맥락이란다. 나한테 버거운 너를, 돈을 주고 고아원에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아. 난 책임을 다했어. 너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그 외에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모리스: 자식을 증오했다는 거에서 이미 책임은 사공 없이 떠난 배인 거죠!

 

수잔: 아까 말했을텐데, 부모가 아이를 사랑해야 할 의무 따윈 없다고?

 

모리스: 그것이 탯줄에 목 감긴 갓난아기를 차가운 고아원 바닥에 버리고 가야 할 타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수잔: 그러게, 원장님 편으로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니? 네가 미술가가 되고 싶었다면, 그 손에 책임을 지자는 차원에서 추가적인 금전적 지원을 해줬을 텐데?

 

모리스: 내가 원하는 건 그 따위가 아니었어! 아직도 모르겠나?

 

수잔: 전혀 모르겠구나. 피가 이어져 있긴 한 걸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네 생각을 전혀 읽을 수가 없어. 복수라도 하겠단 거니?

 

모리스: 당신의 그 오만의 광명이 지나치게 뜨거워서 나 같은 존재들을 삼켜버린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겠지. 그래, 당신의 작품을 본 이후로, 당신은 나에게 항상 그런 존재였어. 도무지 꺼지지 않는 뻔뻔스러운 태양! (총을 꺼내 수잔을 겨눈다) 당신이라는 태양이 너무나 눈이 부셔 도무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는 견디질 못하겠군! 수잔, 셰벌리!

 

수잔: (담담하지만, 썩은 미소) 역시 유치한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이라니까.

 

기자: 잠깐만, 스톱!

 

숨을 헐떡이며 미술관을 들어오는 기자에 모리스와 수잔 모두 그 쪽을 바라본다. 기자는 모리스에게 다가가 총을 뺏어든다.

 

기자: 수잔 작가님 많이 놀라셨죠? 얘가 원래 이렇게 흥분하는 애가 아닌데, 제가 케어를 잘 못했네요.

 

모리스: (기자의 멱살을 그대로 잡으면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장난해?

 

기자: 모리스, 너도 진정해. 지금 누가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지 보라고. (그리고 귓속말로 말한다) 게다가, 아버지를 찾았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일 만나고 싶다는데, 처음 만나는 장소가 교도소이기를 바랄까?

 

마침, 라디나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기자: 그럼, 저와 모리스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얘 흥분 좀 가라앉히고요.

 

모리스를 끌고 나가는 기자, 때 맞춰 들어오는 라디나.

 

라디나: 무슨 일이에요? 둘이 싸웠어요?

 

수잔, 라디나를 뒤로 하고 자신의 작품을 향해 다가간다.

 

수잔: (나직한 목소리로) 정말 이게 작품이긴 한 가봐.

 

라디나: 모리스 씨는 괜찮은 건가… 네? 작가님? 지금 뭐라고 하신 거……?

 

수잔: (작품에 손가락을 얹으며) 예전에 사랑하던 이에게 들었어요. 거리의 나돌아다니는 흔한 모작과 진짜 작품의 차이는 어떤 힘의 유무라고 했거든요. 감정의 응어리를 끄집어내고, 일련의 행위로 이끌어내는 힘.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책임의 경종을 울리고자 그린 거였지만, 그래요, 이것도 일종의 복수거든요.  

 

암전.

미술관 밖, 기자는 손수 음료수를 따서 모리스에게 건넨다.

 

기자: 모리스, 네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준비했는지 내 모르는 바는 아니야. 하지만, 지금 상황이 좀 달라진 걸 알잖아? 일단, 라디나라는 여자의 변수, 그리고 드디어 연락이 닿은 아버지. 네 급진적인 작품의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모리스: 아무래도, 아버지는 아들이 어미를 죽인 살인자로 나타나길 바라진 않겠지…?

 

기자: 그럼. 적어도 그는 널 사랑하고 아꼈잖아. 비록,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진 않았다고 하지만.

 

모리스: 하지만……. 그 여자, 그 여자가 나한테 한…!

 

기자: 진정해. 분명,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그녀를 쓰러뜨릴 만한 무기를 넌 이미 갖고 있다고. 네 존재 그 자체잖아! 그러니까, 아직은 기회를 엿보아도 돼. 분명 그녀가 눈치챘다고는 하지만 널 함부로 건드릴 순 없겠지. 네가 자폭하면 자신도 끝이니까.

 

모리스: 아버지는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기자: 내일. 이 빈치치 아트레움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카페 하나 있잖아? 거기서 8시에 보자고 하셨어. 그 전에는 아주 중요한 일을 끝마쳐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모리스: 그래? 뭐, 적당히 시간 때우다 가야겠네.

 

그 때, 모리스 폰에서 소리가 난다. 라디나에게서 온 문자다.

 

기자: 누구?

 

모리스: 라디나 씨. 아버지랑 보기로 한 카페 근처에서 오후에 잠깐 보자고 하네. 4시쯤에…….

 

기자: 라디나? 지금 표정, 설마 너 그 여자한테 뭐 사심이 있다거나….

 

모리스: 이미 자기 아이도 배고 있는 여자야. 사심은 무슨. 그냥, 그래도…. 처음이었으니까.

 

기자: 어떤 게?

 

모리스: 됐다. 어쨌든 네 말에 일리가 있으니까. 좀 더 적당한 때를 기다려 보자고. 일단, 내일 아버지를 만나야겠어.

 

기자: (악랄하게 웃으며) 잘 생각했어!

 

암전. 다시 미술관에 조명이 켜지며, 수잔과 라디나의 모습이 보인다.

 

라디나: 복…수라뇨?

 

수잔: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난 말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고아여서 그런지, 세상의 무서움을 너무 일찍 알았어요. 무언가 책임이 크다던가 위험부담이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단 얘기에요. 마냥, 미술이 좋아서 그냥 예술가 거리에서 전시 알바 같은 소일 거리나 하면서 사는 거. 그게 제 삶의 목표였다고요. 소박했죠. 그 사람을 사랑할 때도, 난 ‘책임’과 거리가 먼 삶을 꿈꾸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사라졌어요. 말도 없이.

 

라디나: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수잔: 이미 난 책임을 져야 할 무언가가 주어진 상태였어요.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아나요? 난 새삼 깨달은 거에요. 원래 책임이란 건 징그러운 거라고.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사실을 어떤 아주머니가 일러 주더라고요. 징그럽지 않은 살점은 짐승의 고깃덩어리뿐이라는 걸. 난, 그래서,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악착 같이 일을 해서 돈을 모아 고아원에 보내고, 남은 시간에는 미술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난 당신과 다른 길을 갔고, 결국 난 당신이라는 위기를 극복했다고. 맞아요, 그건 복수였어요.

 

라디나: 음……. 작가님께서 말씀하시는 거, 솔직히, 몇몇 구석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한 가지는 알겠어요. 작가님은 정말 괴로운 삶을 살았다는 거, 그리고 이겨냈다는 거.

 

수잔: (웃으며, 가벼운 어투로) 이런, 라디나 씨, 저를 동정하는 건가요?

 

라디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주제넘은 거겠죠? 하지만, 역시, 전 이런 방법밖에는 몰라서요.

 

라디나, 수잔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준다.

 

수잔: 정말이지, 사랑스럽네요.

 

라디나: 네?

 

수잔: 아, 아니에요. 라디나, 당신의 이야기도 한 번 듣고 싶어요. 지금 당신이 뱃속의 아이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죠?

 

라디나: (급 발랄해지며) 우리 그이요? 나름 슬로베니아 국가대표 배구선수랍니다. 포지션은 아웃사이드 히터! 지금은 한국에서 뛰고 있지만, 아마, 이번 시즌 잘만 한다면, 터키 리그 쪽도 컨텍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이 아이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자랑이겠지요.

 

수잔: 배구 이야기에선 오히려 제가 문외한이네요. 슬로베니아가 배구를 좀 하나요?

 

라디나: 어머, 그럼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위협적인 팀이 아니었지만, 작년엔 무려 유럽선수권 2위를 했다고요. 세계랭킹 상위권인 프랑스 바로 밑이였죠. 그 외에 쟁쟁한 폴란드, 벨기에, 세르비아, 이탈리아를 제치고요.

 

수잔: 그런 국가대표팀에서 남편분은 주전인 건가요?

 

라디나: 그럼요. 유망주로서 점차 입지를 다져가고 있답니다!

 

수잔: 언제 처음 만났는데요?

 

라디나: 아……. (조금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게, 제가 예전에 병원에서 잠시 알바 했을 때, 제가 좀 일이 있었거든요. 그 때, 부상으로 투병하던 그이가 절 도와줬어요!

 

수잔: 특이한 인연이네요. 정말 부러워요. 어제도 휴대폰 개통하자마자 바로 연락이 왔잖아요. 적어도, 소재를 알고 있으니 서로 걱정은 좀 덜겠네요.

 

라디나: 솔직히 다른 것보다도 부상이 걱정이죠. 고질적인 무릎부상이 있어서요.

 

수잔: 잘 될 거에요.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부인이 있는데 힘이 안 날 리가 없죠.

 

라디나: 그리고 태어날 우리 아이까지요. (배를 쓰다듬으며) 이 녀석, 엄마, 아빠 사랑 받고 쑥쑥 커야 할 텐데.

 

수잔: …그러게요. 당신은 정말 이상적인 부모가 될 거에요.

 

라디나: 칭찬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작가님, 내일 2시쯤에 시간 돼요?

 

수잔: 네?

 

라디나: 저 내일 모레에 한국 가잖아요. 그 전에 제가 한 번 대접할게요. 제가 일하던 카페에 부탁해서 자리 미리 맡아 놨어요. 제가 향 좋은 라떼 타드릴 게요.

 

수잔: 우와, 고마워요, 라디나 씨. 여기서 지내는 것도 내일 밤이 마지막이겠네요?

 

라디나: 너무 아쉬워요. 나중에 한국 오실 일 있으면 꼭 연락하세요. 아, 모리스 씨랑 함께요. 아셨죠?

 

수잔: 아, 그래요. (조금 쓰게 웃으며) 네, 그렇게 해요.

 

암전.

 

5장. 당신이 무심코 던진 팩트

 

거리, 모리스는 시간을 확인하며 라디나를 기다린다. 그 때 옆에서 걸어오는 수잔. 수잔의 모습을 보자마자 얼굴을 구기는 모리스.

 

수잔: 그렇게까지 환대해줄 필요는 없는데.

 

모리스: 이젠 어휘력까지 형편 없군요.

 

수잔: 내가 더 기분이 나빠야 정상 아닌가? 날 죽이려 한 작자인데.

 

모리스: 글쎄요, 딱히 당신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가던 길 가시지요, 수잔 셰벌리.

 

수잔: 나도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라디나를 만나기로 했거든.

 

모리스: 네? 라디나 씨는 저와……. (알아차린 듯, 이마를 짚는다)

 

수잔: (같은 동작으로, 이마를 짚으며) 정말 라디나답네. 우릴 동시에 부를 줄이야. 아마, 우릴 어떻게든 화해시키려고 한 모양이야.

 

모리스: 그런 멍청한 짓을…! (비슷한 동작을 취한 것을 알고, 이마에 짚은 손을 재빨리 내리며) 라디나 씨가 오면, 저는 볼일이 있어 먼저 갔다고 전해 주시죠.

 

수잔: 얘가 늦을 리가 없는데…. 저번에 병원에 데려가 줄 때도, 어떻게 딱 맞춰 나왔거든. 혹시 쓰러진 거 아니겠지?

 

모리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디 몸이 불편하단 이야긴가요?

 

수잔: 기본 임산부들은 조심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라디나, 괴한한테 위협당한 이후, 조금 충격이 있는 모양이던데, 의사가 조심하라 했거든. 옆에서 잘 챙겨주라고도 했고. 예전에 기절 경험이 있다고 하던데…….

 

모리스: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합니까? 미술관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생각보다 험하다는 거 몰라요?

 

수잔: 그러게. 어제 자식이란 사람과 실랑이 벌이느라, 생각이 안 났지 뭐니?

 

모리스: 그럼, 어쨌든 미술관 쪽으로 가봐야겠네. 그쪽은 따라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수잔: 라디나 씨 걱정되니까, 가봐야겠구나.

 

모리스: 안 기다려 줄 겁니다. 잰 걸음으로 따라오세요.

 

수잔: 내가 너보다 여기 지리는 더 잘 알 거다, 얘.

 

모리스: 거 참, 말도 많네.

 

둘 다 좌측으로 퇴장하며 암전.

 

전시장, 라디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전시장을 나서려고 한다. 그 때 가운데 통로에서 등장하는 빈치치.

 

빈 치치: 이런, 귀한 손님을 모셨는데, 제가 이제야 얼굴을 뵙는군요. 빈 치치라고 합니다. 이 미술관의 관장이지요.

 

라디나: (급히 허리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저야말로, 제가 먼저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빈 치치: 아, 아니랍니다. 잠시 시간이 되나요?

 

라디나: 어……. 그게….

 

빈 치치: 10분이면 됩니다. 그저 간단히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요. 이쪽으로.

 

빈 치치, 좌측의 소파로 그녀를 안내하고는, 다른 한편에 놓인 탁자에 향초를 피운다. 탁자에 미리 올려 놓은 찻잔에 차를 따라 라디나에게 가져다 준다.

 

라디나: 제가 가져다 드려야 되는데,

 

빈 치치: 아니요, 이런 일은 제가 해야죠. 지금 아이를 베고 있는데, 무리하시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라디나: (차를 마시고 한쪽에 내려놓으며) 말 놓으셔도 돼요. 제가 훨씬 어리고, 오히려 신세를 지고 있는데.

 

빈 치치: 손님한테 그럴 순 없지요. 아이 이름은 정했나요?

 

라디나: 아직이요. 한국에 가면 남편과 함께 정하려고요.

 

빈 치치: 아, 그렇군요. 배구선수라고 했나요? 키도 꽤 크겠네요.

 

라디나: 195cm 정도인데 사실 아웃사이드 히터 치고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만, 일반인이랑 비교하면 완전 …(갑자기 어지러운지 이마를 짚는다) 장신이죠.

 

빈 치치: 남편 분이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라디나,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소파 위에 쓰러진다.

 

빈 치치: 간악하고 헤픈 여자가 아내라니. 정말 잘 된 일이지, 끼리끼리.

 

빈치치, 찻잔을 들고 일어나서 다시 향초를 피운 곳으로 다가간다.

 

빈 치치: 아들아, 여기 타오르는 복수의 향이 보이느냐? 너를 지옥으로 떠민 저 잔인한 여자를 드디어 내 손아귀에 가두었단다. 저 여자가 우연찮게 이 곳에 발을 들일 때 난 알아 보았지. 운명이 나에게 주신 기회를! 나와 똑 같은 고통을 겪게 할 것이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잃게 되는 거지. 자신의 목숨과 함께!

 

그 때 종소리가 들리면서 기자가 들어온다. 기자는 숨을 거칠게 쉬지만, 그것을 숨기려고 하며 빈 치치에게 다가간다.

 

기자: 안녕하십니까, 빈 치치 관장님.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거래, 에 관해서 조금 더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빈 치치: 그래, 일단 여기 의자에 앉게. 나도 할 이야기가 있으니.

 

 빈 치치, 탁자에서 의자를 꺼내 기자를 앉히고 자신도 옆자리에 앉는다. 기자, 차를 조금 마신다.

 

기자: 관장님,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 돈을 보내주시기로 한 걸로 기억하는데, 제가 확인해보니 아직 잔고가 그대로더군요. 혹시 깜박하신 건가요? 빈 치치 관장님, 만에 하나, 약속을 안 지킨다면, 저도 이 거래를 이어갈 마음이 없답니다.

 

빈 치치: 글쎄, 약속을 깬 쪽은 자네가 먼저 아니었나? 아니라면, 오늘 자네가 잡지사로 전송한 이 기사는 뭐지? 슬로베니아 미술계 최대의 스캔들 – 빈 치치, 수잔 셰벌리 그리고 사생아까지? 제목부터 정말 자극적이기 짝이 없군.

 

기자: 이, 이건…….

 

빈 치치: 아, 그래, 내 들은 바 있지. 한 달에 한 번씩은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는 어떤 파파라치의 소문을 말이네. 연예인들의 치부, 혹은 감추고 싶은 과거, 이를 테면 성적 스캔들 같은 거를 끄집어 낸 다음, 이런 식으로 미리 돈을 받고 뒤통수를 치는 게 자네 수법이지, 아마? 그래서 자살한 연예인도 한 둘이 아니었을 텐데. 내가 그런 자네의 모습을 알고도, 자네를 믿을 거라 생각했나?

 

기자: (당혹스럽지만,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대며) 하, 하지만, 관장님. 그럼에도 불리한 건 제가 아닌 당신일 텐데요? 돈이 입금되지 않는다면, 이미 내일 자동으로 제 파파라치 계정으로 이 스캔들이 전국에 퍼질 겁니다.

 

빈 치치: 자네가 진짜 상류층을 건드리진 못했나 보군.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이미 당신의 계정을 해킹할 사람들을 고용했단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네는 살아서 여기를 나갈 수 없을 테니.

 

기자: 그게 무슨……. (어지럼증이 찾아오자, 앞으로 고꾸라지며) 젠장…. 이 망할, 차…차가.

 

빈 치치: 양이 적어 안타깝군. 이미, 쓴 데가 있어서……. 저 여자보단 오래 살아 있겠군.

 

기자: (고꾸라지며 소파에 축 쳐져 있는 라디나의 모습을 확인한다) 하…하하하하! 그래…. 당신의 진짜 치부는 이거였지! 아들이 죽은 지 벌써 3년이 다 되가는데 아직도 그 더러운 집착을 못 버리고서는!

 

빈 치치: 집착이라니, 아들의 억울함을 내가 대신 풀어주려는 것뿐!

 

기자: 어, 억울함? (이마를 다시 짚고, 말을 잇는다) 억울함 같은 소리! 그 병원에 다닌 사람들은 다 알지. 당신 아들이 얼마나 파렴치한이었는지!

 

빈 치치: 그게 무슨 소린가?

 

기자: 정작, 당신의 다른 아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예 찾아볼 시도조차 안 했지! 얼마나 이기적인 부모인지. 곧…. 곧, 모리스도 올 거야. 내가 이미 연락을 해놨거든.

 

빈 치치: 하! 그 아이가 과연, 핏줄로 이어진 나와 자네 같은 저급한 파파라치 중에 누구의 말을 믿을까?

 

기자: 사……. 실을 알게 된다면, 모리스가 가만 있을까?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며, 모리스와 수잔, 다급히 들어온다. 앞에 벌어진 상황에 둘 다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모리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죠, 빈 치치 관장님?

 

빈 치치: 오, 이런……! 오, 신이시여! 드디어 네 모습을 보게 되는 구나, 아들아!

 

모리스: 관장님, 그게 무슨 말이지요?

 

기자: 그래, 그게 네 아버지야, 모리스! 아주, 파렴치한 중에 파렴치한인…! 쿨럭!

 

모리스: (기자 쪽을 바라보며) 너는 왜…!

 

수잔: (너무 놀라 당혹스러워 하며, 빈 치치에게 다가가며) 어떻게…. 언제부터, 아신 거에요, 빈 치치? 당신, 그 전에 한 번도,

 

빈 치치: (수잔의 말을 끊으며) 수잔, 내 자네에게 너무 매정했지. 뒤늦지만 사과하겠네. 하지만,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다시, 모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모리스, 내 자네를 어찌 몰라봤을까? 저 파파라치의 말 따위는 믿지 말게. 애초에 자네를 속여 왔으니. 저 파파라치가 내가 자네의 아버지란 걸 몰랐을까? 그럴 리가! 그는 오로지 특종을 잡기 위해 숨죽여 왔을 뿐이야! 이 미술관에 우리 세 가족이 함께 모이게 된 아주 자극적이고, 스토리가 되는 이 상황이 될 때까지! 이 기사가 보이니? (기자가 이메일로 보냈던 기사를 보여주며) 이런 저급한 쓰레기 기사를 내일 내보내려고 한 치란다!

 

모리스: (당혹감과 배신감에 할 말을 잃는다) 그게…… 정말…….

 

수잔: 일단 진정해요, 빈 치치. (라디나를 발견하고는) 그런데, 라디나 씨는……. (라디나가 식은 땀을 흘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일단 라디나 씨부터 병원으로 옮겨야겠어요!

 

빈 치치: 아니야, 우리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지 않겠어?

 

기자: 하하하하하하! 작가님, 진정 빈 치치의 저의를 모르겠나요? 쿨럭! 빈 치치에게 아들이 하나 더 있다는 건 아시겠죠. 그 아들…이,

 

빈 치치: 닥치지 못해?

 

수잔: 계속 말해 보세요.

 

기자: 그 아들이 XX병원 의사였지요. 그 병원에서 그 아들이 사랑에 빠졌지 뭡니까? 그래요, 바로 라디나 씨에게 말입니다!

 

모리스,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운 나머지, 주저 앉고 만다. 기자는 그 상황에 웃음이 난다.

 

기자: 쿡. 그런데 불행히도, 라디나는 이미 연인관계인 사람이 있었죠! 의사는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라디나를 몰래 불러내서,

 

빈 치치: 닥쳐, 그만 하라고! (빈 치치, 기자를 쳐내려고 한다) 그만…!

 

그러나 수잔이 막아 서고, 기자는 다시 말을 잇는다.

 

기자: 몹쓸 짓을 하려고 한 거죠! 그런데, 불행히도, 라디나의 남자친구가 와서 그걸 막아내고, 하필, 병원 라운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자존심 센 의사나부랭이가 얼마나 쪽이 팔렸겠습니까? 결국, 사람들의 냉소와 시선을 버티다 못한 그는,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빈 치치: 닥쳐, 닥치라고! 그런 게 아니야! 아니야! 이 년이 먼저 꼬리를 친 거라고!

 

기자: 그 때 병원 다니던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 그 의사가 얼마나 치근거렸는지! 쿡쿡쿡. 그런데도 멋대로 결론을 정해놓고, 억울하다 우기는 꼴이라니!

 

빈 치치: 이 자식이…!

 

수잔: 진정, 그만해요, 빈 치치! 사람 하나 죽일 셈이야?

 

빈 치치: 이거 치우지 못해?

 

빈 치치가 수잔을 거칠게 쳐내고 손찌검을 하려 들자, 모리스, 옆구리에서 총을 꺼내 그 둘을 겨눈다.

 

기자: 캬캬캬캬캬캬. 그래, 모리스! 어서 저 자식을 쏴! 어서! 저기, 라디나를 저렇게 만든 것도 저 놈이야.

 

수잔: 당신…!

 

빈 치치: 오, 아들아, 진정하렴! 저 놈의 말을 믿는 거니? 난 네 아버지란다! 너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기자: 거짓말! 모리스, 저 자는 단 한 번도 널 찾은 적이 없어! 네 존재의 가능성 조차 애초에 무시해 버린 작자라고! 몰래 유학을 가서, 네 어머니를 버렸지!

 

모리스: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럼, 정말로, 나한테 돈을 보낸 사람은…!

 

수잔: 빈 치치, 여기서 그만둬요. 더 죄를 지을 셈이야? 나, 당신을 원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화가가 꿈이라고 했잖아요? 나, 당신은 이제 아니지만, 화가가 되었어. 당신, 미술을 사랑하잖아요! 이곳도…! 이 미술관은 우리의 추억이 담긴 곳이잖아요. 여기서 이런 끔찍한 짓을, 계속 할 생각이에요?

 

빈 치치: 저 년은 내 아들을 죽였어! (떨고 있는 모리스에게 조금씩 다가가며) 오, 모리스. 이제 그 총을 내려놓고 이 아비의 말을 들어주렴. 저 여자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한 치란다. 우리 이 일을 마무리 지으면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자꾸나. 그간 쌓인 회포가 얼마나 많겠니?

 

기자: 회포? 회포랄 게 뭐가 있나? 빈 치치 생애에 아들은 단 하나뿐인 것을!

 

모리스: (얼이 빠진 채로 물으며) 사실이에요? 날 한 번도 찾은 적 없어요? 그럼, 그 남자는요? 매달 고아원에 내 이름으로 돈을 몰래 붙이러 찾아오던 그 자는?

 

빈 치치: 오, 모리스, 내가 미안하구나. 유학 길에서 돌아온 후에 너무나 경황이 없었지. 하지만, 난 널 사랑했단다.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야.

 

기자: 사랑? 쿡.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건 실은 거짓말이지! 모리스! 넌, 저 자식의 손가락 중에서도, 깨물어도 전혀~ 안 아픈 손가락이야!

 

수잔: 모리스! 너도 총은 그만 내려놓고. 일단 말로…!

 

빈 치치: 빠져 있어!

 

빈 치치, 수잔을 밀친다. 수잔, 소파에 배를 박고는 숨을 헐떡인다. 그 모습에 모리스, 총의 배를 더 강하게 쥔다.

 

빈 치치: 아들아, 내 방금 행위를 용서하렴. 아비가 너무 흥분해서 말이다. 자, 내 말을 들어주렴!

 

기자: 진짜 그 아들에 그 아버지군! 하긴, 그 아들이 누굴 닮았겠어?

 

빈 치치: 자, 내 말을 들어준다면, 내 말대로 해준다면, 아들아, 내 너에게 이 미술관을 주마. 어마어마한 재산도 함께! 이 재산과, 온갖 진귀한 미술품이 모여있는 이 빈 치치 아트레움이 탐나지 않니?

 

기자: 정말 웃겨서 말도 안 나오네! 쿡쿡. 야, 모리스! 넌 정말 불쌍한 자식이야. 어미에게도 버림 받고, 아비에게도 버림 받고! 저 이기적인 치에게 넌 그저, 자신의 대를 이을 도구일 뿐이지! 자식이 아니라! 아이고 웃겨라!

 

빈 치치: (기자를 째려보고는 모리스에게 간절한 눈으로) 저 자식의 말은 무시하렴. 넌 이제 모리스 빈 치치가 되는 거란다! 모든 부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쥐는 거지!

 

기자: 진실된 증오, 거짓된 사랑!

 

모리스: (라디나를 힐끗 보며, 절망적으로 웃으며) 그 명예와 부귀에……. 당신의 사랑은 없겠군요.

 

빈 치치: 뭐…라고?

 

기자를 보지 않은 채, 기자 쪽으로 총을 겨누는 모리스. 그리고 총성. 총알이 기자를 관통하는 동시에 좌측의 비상버튼을 맞춘다. 전시관을 가득 채우는 사이렌 소리. 곧 경찰차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모리스의 손에서 총이 힘없이 떨어지고, 그는 양손을 머리 위에 올린다. 빈 치치, 그 모습을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고, 수잔은 경찰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외친다.

 

수잔: 살려주세요! 일단, 이 여성분부터, 구해주세요! 다 저 자 때문이에요.

 

빈 치치를 가리키는 수잔.

사이렌 소리 잦아지며, 암전.

 

6장. 수잔, 모리스

 

 무대에 탁자 두 개와 각각에 딸린 의자가 두 개씩 있다. 좌측 탁자엔 라디나가, 우측 탁자엔 모리스가 앉아있다. 라디나는 현재 한국이다. 탁자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는 라디나.

 

라디나: 수잔 작가님, 그리고 모리스 씨에게. 저는 무사히 한국으로 왔어요. 모리스 씨가 다쳐서 제대로 인사 못 드리고 와서 너무 죄송하네요. 맨 처음 괴한에게 위협당했을 때, 또 갑작스레 기절했을 때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정말 큰일 났을 거에요.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라디나 쪽 조명 어두워지고 모리스 쪽 조명이 밝아진다. 좌측에서 입장하는 수잔.

 

수잔: 오랜만이구나.

 

모리스: 그렇게 신경 써 줄 거 없었는데.

 

수잔: 뭐 말이니?

 

모리스: 증언이요. 딱히 빈 치치 때문에 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너무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사실만을 말하는 게, 재수가 없어서.

 

수잔: 그게 이유라고 증언했으면, 넌 형량 지금에 배로 받았을 거다.

 

모리스: 고마워요. 증언해줘서. 라디나 씨도 챙겨주고. 잘 지내고 있겠죠?

 

수잔: 그거 때문에 온 거란다. 여기.

 

수잔, 라디나의 편지를 내민다.

 

수잔: 편지를 보냈더구나. 꽤 재미있어. 읽어보렴.

 

 다시, 라디나 쪽 조명이 밝아진다.

 

라디나: 전 잘 지낸 답니다. 그이도 정말 멋진 활약을 하고 있어요. 벌써 득점, 공격성공률 1위라니까요! 오히려, 혹사당해서 체력이 무리가 갈까 걱정이에요. 아, 그리고 아이도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너무나 사랑스러운 딸이에요!

 

 다시, 수잔과 모리스 쪽 조명이 들어오며.

 

모리스: 다행이네요, 잘 지낸다니. 건강한 것도 같고. (편지에서 눈을 떼어 수잔을 빤히 보며) 작가님, 아니, 수잔 셰벌리. 난 말이에요, 당신의 작품에 눈을 빼앗긴 다음 당신 작품을 나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연구했어요. 돌아보고 나니, 그 속엔 원망과 복수심도 있었지만 다른 감정도 하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놀랍죠. 나는 적어도, 당신의 작품만큼은 사랑하고 있었던 거에요.

 

수잔: 그건 나야말로 고맙구나.

 

모리스: 당신은, 단 한번이라도. 내 어떤 부분이라도, 사랑을, 애정을 느낀 적이 없나요?

 

수잔: 없단다.

 

모리스: (웃으면서) 그럴 줄 알았어. 그래야 수잔 셰벌리 답지.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단호하네요. 그 태도도 조금은 멋있어요.

 

수잔: 어머, 아부하는 거니?

 

모리스: 진심인데.

 

수잔: 그래, 고맙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마.

 

 수잔, 일어나서 우측으로 걸어간다. 퇴장 직전, 멈춰 선다.

 

수잔: 아, 라디나가 마지막에 쓴 추신 봤니? 자식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불협화음인 단어의 조합으로 정해 놓았더구나. 그리고 말이야, (모리스를 슬쩍 돌아보며) 모리스 슬로보단은 내가 만난 큐레이터 중 최고였어요, 좋은 전시 기획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모리스: (웃음을 터뜨리며) 천만에 말씀!

 

수잔은 퇴장하고, 다시 라디나 쪽의 조명이 더 밝아진다.

 

라디나: 아, 추신! 아이 이름은 아무래도, 이 아이의 은인의 이름을 땄어요. 아들이면 모리스-수잔이라 하려 했죠. 그런데 딸이 나왔으니, 이 아이의 이름은 이제 이거에요. 수잔-모리스!

 

전체 암전.

(끝)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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