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지 사회부장 (언홍영·15)

지난주 수요일 2시 반. 스마트폰에서 재난경보음 소리와 함께 포항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재난 문자가 도착했다. 곧이어 2초 후, 덜컹덜컹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책상 위에 올려놨던 커피잔의 커피가 울렁거렸다. 켜놨던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지진’, ‘포항’이 뜨고, 포털 사이트의 메인 화면으로 순식간에 지진과 관련된 보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스마트폰에도 카카오톡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카톡, 카톡, 카톡, 카톡…….
노란 카카오톡 화면이 사라지자 나를 반기는 것은 열 개 남짓한 메시지들. 모두 다 곧 수능에 응시할 고등학교 3학년 과외 학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쌤! 그럼 수능 치다가 지진 나면 어떡하죠?

과외 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스마트폰의 자판을 눌렀다.

 

권위에 순응한다는 것

 

야, 당연히 일단 뛰쳐나가야지!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실제 가이드라인은 내 예상과 달랐다. 수능 고사장에서는 감독관의 지시에 따르면 되는데, 만약 수험생이 감독관 지시에 따르지 않고 시험장을 무단으로 이탈하면 시험포기로 간주된다.

과외 학생이 내게 ‘ㅋ’을 남발하며 이 사실을 전달했을 때, 나는 실소도 지을 수가 없었다. 몇 시간 전 봤던 포항의 고등학교 사진이 떠올랐다. 금이 간 콘크리트 벽, 허물어져 떨어져 나간 벽돌 벽, 무너진 천장….

만약 지진이 나서 감독관이 고사장을 이탈하지 말라고 지시한다면 그 상황에서 고사장을 뛰쳐나올 수 있는 수험생은 몇이나 될까. 

과연 그 상황에서 나는 뛰쳐나올까? 수능 날 그 하루 동안, 아니, 8시간가량의 시험 시간 동안 남은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말을 듣고 살아온 우리에게 수능 고사장을 뛰쳐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도 감독관이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면, 순응할 것이다. 이는 감독관의 지시에 대한 순응을 넘어, 인문계 고등학생이라면 응당 수능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관념에 대한 순응이다.

결국 어떤 요구이든 간에 일단 사회의 요구에 따르고 보는 것. 그간 우리 사회를 관통해 온 불필요한 권위의 모습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없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지진이 와도 ‘가만히’ 수능을 그대로 실시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번에 우리 사회가 내린 결정은 ‘아니오’였다.

같은 날 저녁 8시 20분, 수능이 당초 예정돼 있던 11월 16일에서 일주일 연기됐다. 고사장이 도저히 수능을 실시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난 지 약 5시간 50분 만에 일어난 초유의 사태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수능 연기가 큰 혼란을 낳을 것이라는 보도가 연신 이어졌다. 그러나 그 기사들은 곧 반대 여론과 마주쳤다.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다는 여론이었다.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

 

이제, 권위로부터의 탈출이 시작되고 있다. 사회적 요구에 순응하지 않아도 눈총 받지 않는 세상으로의 첫걸음이다. 수능 연기는 말 그대로 일정을 미뤘다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수능 연기는 우리 사회가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이상 우리는 ‘가만히 있지도’,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불필요한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진상 규명을 외쳤던 작년 11월의 촛불이며, 위험 부담이 있다면 수능을 연기하는 과감함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없어져야 한다. 불필요한 권위는 없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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