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와 광주대단지 사건

▶▶ 성남시 구도심 주택가의 모습. 가파른 지형에 다세대주택이 밀집해 있다.


‘서울의 침상도시’라는 정도만 알고 성남 초행길에 오른 이는 십중팔구 구도심 경관에 놀란다. 통근자들의 주거를 위해 건설한 도시 치곤 주거환경이 지나치게 열악하기 때문이다. 당장 구릉지형이 구도심 전역에 걸쳐 나타날뿐더러 구식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생활 근린시설은 매우 드물다. 윤흥길이 쓴 『아홉 켤레의 구두를 신은 사내』를 길잡이 삼아 그 풍경의 이면에 숨겨진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되짚어갔다.

 

터전 잃은 자들의 터전, 광주대단지

 

그는 당시 형편으로는 거금에 해당하는 20만 원을 변통해서
복덕방 영감쟁이를 통하여 철거민의 입주 권리를 손에 넣었다.
 “난생처음 이십 평짜리 땅덩어리가 내 소유로 떨어진 겁니다.
내 차지가 된 그 이십 평이 너무도 대견해서 
......(중략)......
어느 철거민의 소유였어야 할 그것이
협잡으로 나한테 굴러떨어진 줄을 전혀 잊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8호선 신흥역에서 나오니 구도심을 관통하는 대로와 그 옆으로 난 비좁은 골목이 보였다. 골목은 곧장 40도 급경사의 언덕길로 이어졌고, 그 좌우로는 20평 남짓한 다세대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성남시는 본래 서울시의 철거민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1960년대 말 개발됐다. 전후 도시화와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증가한 도시 빈민은 서울 도심 곳곳의 국공유지에 무허가 정착지를 형성하고 살아갔다. 이를 문제로 인식한 서울시 당국은 대대적인 도심 재정비와 철거민 이주를 예고했다. 빈번한 화재, 보건상의 문제 등 다양한 이유를 들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동기는 따로 있었다. 도시 미관과 공간 확보를 위해서였다. 

철거민 주거대책으로 ▲무허가 주택을 정비해 양성화하는 방안 ▲서울 곳곳에 시민 아파트를 건설해 입주권과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안 등이 제기됐다. 그러나 당국은 가장 비용이 적게 소요되는 ‘정착지 조성책’을 택했다. 서울시 교외의 유휴 공유지에 철거민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시내의 공유지가 부족해지자 정책 결정자들은 경기도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이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아래 광주대단지), 지금의 성남이었다.

1968년 발표된 「광주군 중부면 주택단지 조성계획」에 따라, 1969년부터 철거민 이주가 시작됐다. 정석대로라면 정지(整地)작업이 이뤄진 뒤 입주해야 했지만, 정부는 제대로 된 사전작업 없이 철거민 이주를 서둘렀다.  신속하게 철거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하리라는 정부・여당 인사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철거민입주자에 못잖은 수의 전매(轉買)입주자가 성남으로 향했다. 전매입주자는 철거민의 분양증을 매입한 소시민계층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택지*를 얻을 수 있다는 소식에 이들은 철거민의 입주권을 앞다투어 매입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주인공 ‘권 씨’ 또한 제집 마련의 꿈에 부풀어 철거민의 입주권을 샀고, 결국 자신 명의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전매입주자였다. 
 

▶▶ 작중 오 선생 내외가 살았던 천변의 시장. 개천은 복개되고 판잣촌은 없어졌지만 시장은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광주리칸 드림’의 민낯
 

시청 뒷산 은행주택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우리는 단대리 시장 근처에서 살았다. 
숨통을 죄듯이 다닥다닥 엉겨붙은 20평 균일의 천변 부락이었다.

 

대로변을 따라 걷다 보니, 다양한 생필품을 늘어놓고 파는 재래식 상점가가 나왔다. 소설의 화자인 오 선생 내외가 돈을 변통해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 근처의 시장이었다. 한 철물점에 들어가 옛 모습에 대해 듣기를 청하자 “시장 앞쪽으로는 개천이 흘렀고 뒤쪽으로는 판잣집이 끝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씨는 자기네 문간방에 세든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선생 내외(그렇다, 선생 내외였다)라는 사실을 일삼아 동네방네 외고 다녔다. 
성남시 전체를 통틀어 불과 얼마 안 되는 선생에 비해 집들은 부지기수인데
바로 그 선생 중의 하나가 자기 집에 사글세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광주대단지에 넘치는 것은 판잣집뿐이었다. 교사와 학교가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도로도 정비되지 않았다. 일자리도 턱없이 부족해 입주민들은 도시 내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다. 최소한의 고용기회라도 얻기 위해서는 서울로 통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울과 광주대단지를 잇는 대중교통은 버스 노선 하나, 여섯 대의 차량이 전부였기에 그마저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초적인 하수・오물 처리 시설도 없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주민이 부지기수였다. 굶주린 산모가 태아를 삶아 먹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40%가량의 주민이 20평 남짓한 택지 위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거나 판잣집에 살았다. 실업률이 50%에 달했고 전기가 들어온 가구는 전체의 37%에 불과했다. 세계 도시계획사를 통틀어 봐도 유례를 찾기 힘든 선입주 후 개발 정책의 결과였다.
 

선거철이었다.
지상낙원 건설의 청사진에 갖가지 공약들이 한획 한획 첨가되었다.
...(중략)...갈수록 선거 열풍이 거세짐과 더불어
지가가 열나게 뛰고 사람 값이 종종걸음을 치고 하는 그 사이를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훨훨 날아다녔다. 

 

그러나 아직 대단지의 실상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기대에 차서 입주권을 샀고, 성남으로 향했다. 보건, 교육, 치안, 교통 등의 기반시설을 유치하겠다는 서울시의 당초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난 1968년에 발표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에서, 당국은 광주대단지의 주거환경을 단순 정착지 이상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더구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심성 공약이 남발되며 광주대단지를 둘러싼 기대치는 하늘을 찔렀다. 철거민의 입주권을 무더기로 사서 전매입주자에게 되파는 투기행태도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정작 광주대단지에 도착한 이주민들을 기다리는 것은 서울시와 정치인들이 약속한 ‘낙원’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통지서의 무게
 

통지서가 왔다.
전매 입주자는 분양 전 토지 20평을 평당 8천 원 내지 1만 6천 원으로 계산하여
7월말까지 일시불로 납부하는 조건으로 불하**받으라는 것이었다.
만일 기한내 납부치 않으면 해약은 물론 
법에 의해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30만 원 이하의 벌금을 과하도록 하겠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지난 1971년 7월 7일, 서울시는 광주대단지 입주권의 거래를 전면 금지했다. 또 기존의 전매입주자에게는 평당으로 계산한 토지대금을 일시불로 요구했다. 권 씨 또한 토지대금을 납부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기한은 보름에 불과했다. 겉으로는 과열된 투기 현상을 진정시킨다는 명목이었지만,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서울시의 재정 확충이었다. 해당 조치는 주민들에게 즉각적인 피해로 돌아갔다.

부족한 납부 기한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대금의 액수였다. 당초 서울시가 약속한 것보다 수십~수백 배 많은 최대 1만 6천 원의 평당 토지대금이 부과됐다. 이는 서울 남산 일대의 지가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도에서는 토지취득세를 요구했다. 게다가 조치 직후 투기 자본이 일제히 철수하며 지역경제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최소한의 주거환경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막대한 금전적 부담까지 떠안게 된 입주민들은 광주대단지토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를 결성했다. 권 씨는 대책위원직을 맡게 됐다. 흔치 않은 식자(識者)였던 권 씨를 주변 입주자들이 추대한 것이다.
 

▶▶ 6만여 군중이 모여 경찰과 충돌한 구 성남시청 삼거리. 멀리 구시청 터에 시립의료원이 건립되고 있다.


나체로 살다 나체로 사라지다
 

공기가 흉흉했다. 
그 흉흉한 공기가 저기압을 불러왔음직했다.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거리에 전단이 살포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시간이 되면 가슴에 달기로 한 노란 리본이 나누어졌다.

 

대로변에 난 골목길로 빠져 가파른 언덕을 넘자, 멀리 삼거리 근처에 한창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공사 부지가 보였다. 성남시립의료원이 2018년 개원을 목표로 건설되고 있는 터는 본래 성남 구시청사의 자리였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삼거리지만, 46년 전에는 전례 없는 도시 빈민운동이 일어난 곳이었다.

반복적인 진정에도 당국의 반응이 미진하자 대책위는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일로 정했다. 그날 오전, 최소 3만 명, 최대 6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이 성남출장소*** 앞에 운집했다. 구호가 쓰인 리본을 단 채였다. 서울시장과의 대면을 요구하던 군중은 약속 시각인 11시가 지나도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격분했다. 
 

모두들 거리로 뛰쳐나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골목을 누볐다.
맨주먹으로 있지 말고 무엇이든 되는 대로 손에 잡으라고 
그 소리는 덧붙이고 다녔다...(중략)...
“빗속에서 사람들이 경찰하고 한참 대결하는 중이었죠.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서고 있었어요.”

 

분노한 군중은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경찰차를 불태우고 파출소를 파괴했다. 천변의 시장 상인들도 장사를 접고 싸움에 가세했다. 입주민들은 서울과 통하는 유일한 도로까지도 봉쇄했고, 광주대단지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당국이 백기를 들었다. 서울시장이 직접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권 씨는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돼 전과자가 됐다. 대책위 활동에 소극적으로 일관하던 권 씨로 하여금 시위의 선봉에 서게 한 것은 비가 오던 8월 10일, 그가 목격한 장면이었다. 투석전 한복판에서 참외를 실은 삼륜차가 전복됐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 먹는 거예요
...(중략)...그런 속에서도 그걸 다투어 주워먹도록 밑에서 떠받치는
그 무엇이 그저 무시무시하게 절실할 뿐이었죠. 
이건 정말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가슴에 팍 부딪쳐옵디다. 
나체를 확인한 이상 그 사람들하곤 종류가 다르다고 주장해나온 근거가
별안간 흐려지는 기분이 듭디다.”

 

사건 이후 광주대단지는 성남시로 승격되고 공단이 들어섰지만, 대통령 박정희는 광주대단지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며 “주동자를 엄벌에 처하라”고 말했다. 모두 22명의 연루자가 주동자라는 이유로 권씨처럼 체포돼 형사처분을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간첩으로 내몰렸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까지 자행됐다. 언론은 광주 대단지 사건을 보도하며 ‘폭력적인 빈민층 청년들의 폭력 행사’를 부각했다.
 

“오선생, 
이래봬도 나 대학 나온 사람이오.” 

 

권 씨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사건 전에도 넉넉지 못한 삶이었지만 전과 기록은 그의 직장을 앗아갔다. 새로 얻은 직장에서도 오래 배겨내질 못했고 담당 경찰은 늘 그의 동향을 살폈다. 막노동판을 전전했지만 가족을 건사해내지도 못했다. 임신한 아내의 수술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도질을 택했지만, 그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권 씨는 그렇게 완전히 나체가 됐다. 그래서 그는 사라져버렸다. 자기 몸보다도 아끼던 아홉 켤레의 구두를 뒤에 두고 그렇게 가파른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왜 구도심에 언덕이 많은지, 집은 왜 그리도 빽빽한지에 대해서는 답을 얻었다. 그러나 왜 힘없는 나신은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해야 했는가. 권 씨가 지닌 것 없이 한 켤레의 구두만을 신고 걸었을 고개를 똑같이 걸어 내려왔지만, 전철역에 도착할 때까지도 둘째 질문의 답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택지: 주거용 또는 부수건물의 건축용지로 이용할 수 있는 토지
**불하: 국가나 공공 단체의 재산을 민간에 팔아넘김
***성남출장소: 성남 지역 개발을 위해 신도시 개발 정책에 필요한 업무를 맡았던 행정기관. 후에 성남시청으로 승격됐다.

 

 

 

글 송경모 기자  
songciety@yonsei.ac.kr

사진 하은진 기자
so_havely@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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