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훈 사진·영상부장 (사회/언홍영·16)

최근 들어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담긴 말들이 눈에 자주 띈다. 특히나 ‘종교인 과세’가 화두가 되고, 이에 대한 기독교계의 부정적인 의견이 보도되면서 관련 기사에는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 담긴 댓글들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이러한 댓글 속에서도 상당히 눈에 걸리는 단어가 있다.

 

개독교.

 

혹자는 단지 개신 기독교의 줄임말일 뿐이라며 언어의 의미를 부정하지만, 이 단어의 어원은 너무나도 알기 쉽다. 개독교는 개(犬)와 기독교의 합성어로 기독교와 그 신자들을 비하하는 상황에서 주로 쓰인다.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믿어온 나로서는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오랜 기간 교회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그들의 성품과 행실을 지켜본 나는 ‘정말 좋은 사람 많은데...’, ‘나쁜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인데...’라고 속으로 항변하지만 요즘에는 이러한 주장을 하기는 스스로가 민망하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목사가 가끔 불미스러운 일로 신문에서 보도되고, 종교인 과세에 대해서 그 어떤 종교보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텔레비전을 통해 부정적으로 비춰진다. 이러한 사례를 근거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기독교를 비호해야 할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더 슬픈 점은 기독교의 이미지가 안 좋아진 책임은 비단 극소수의 인물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 비판으로 온라인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사례인 과도한 전도 행위는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으며 그 효과에 의문을 들게 한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타 종교에 대한 비하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하는 모습이 SNS에 퍼지는 것은 기독교가 존중받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렇게 평신도에 의해 일어나는 일상적인 잘못은 기독교의 평판을 추락하게 하고,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품 안으로 이끄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참으로 부끄럽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망각한 채,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고 다름을 비난으로 답한다. 
이처럼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못한 오늘날이 나에게는 마치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정한 때처럼 느껴진다. 외부에서 오는 비난과 조롱에 위축되고, 기독교를 믿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로 여겨지는 환경 속에서 내가 기독교인임을 드러내기 꺼려진다. 

 

나 기독교 믿어요.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기독교에 대한 비난을 이기고, 수많은 냉소와 조롱을 뿌리치고 교회 다닌다 말하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 한명 한명이 모두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나는 안다. 전도는 분명 최고의 영광이자 장려받기 마땅한 행위지만, 이웃을 존중하지 못하는 방식이라면 잃는 사람만 많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전도 방법이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박애를 통해서 존경받아야 한다. 그리고 존경이야말로 사람들을 기독교로 이끄는 가장 현명한 길이다.

물론 잘못을 저지르는 기독교인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훨씬 더 많은 선한 기독교인들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서 나 자신이 스스로 그 근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가 비난받는 상황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점점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변화할 때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존중함으로써 존경받고, 존경받음으로써 믿음을 주자. 그래야 비로소 개독교라는 오명은 사라지고 기독교만 남을 것이다.

닭이 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바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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