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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오연호·삶끊임없는 변화와 쇄신,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를 만나다
  • 송경모 기자, 윤현지 기자
  • 승인 2017.09.02 22:59
  • 호수 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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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리 이사장 오연호(국문·83, 오마이뉴스 대표)

 

 

출발할 때보다 한층 굵어진 빗줄기를 뚫고 신촌에서 상암동까지 가는 171번 버스에서 내렸다. 횡단보도를 두 차례 건넜고, 18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야 비로소 사명(社名)과 마주쳤다. 오연호(국문・83) 대표기자를 지난 8월 28일, 「오마이뉴스」 본사에서 만났다.

 

『봄봄』에서 『민중과 지식인』으로

 

채 50가구가 되지 않는 전라남도 곡성군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오 대표가 김유정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오 대표에게 『봄봄』, 『동백꽃』과 같은 농촌소설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 대표는 “소설에 나오는 농촌 모습이 곧 내 일상이었다”며 “나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틈틈이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을 찾아보며 소설가의 꿈을 키워간 오 대표는 지난 1983년 우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소설가의 꿈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전두환 신군부의 위세가 드높았다. 정부의 탄압과 폭거에도 언론은 보도지침에 따라 침묵했다. 엄혹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 대표는 마냥 단편소설 습작에 매달릴 수 없었다. 오 대표는 “시대의 흐름과 소설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며 “사실이 목소리를 잃은 시대를 외면한 채 허구의 세계를 그릴 수 없었다”고 전했다. 결국 오 대표는 입학 3개월 만에 습작을 그만뒀다.
이후 국어국문학과 학생회장을 맡아 학회지를 발간하고 총학생회에서 여러 자보와 유인물을 쓰며 오 대표의 펜에는 날이 섰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을 읽으며 오 대표는 대학생으로서 사명감을 느꼈다. 4학년 때 주도적으로 기획해 전국의 중·고등학생에게 발송한 편지 형식의 유인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상투적인 형식과 내용의 유인물이 대부분이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조선일보」가 사회면을 크게 할애해 해당 사건을 보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오 대표는 유명세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한 달 뒤, 공안당국에 체포된 오 대표는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말’하기 위해

 

감옥에서 오 대표는 인생을 바꿔놓을 결심을 했다. 진보적 성향의 월간지인 「말」에 입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오 대표는 “「말」지가 당시 독재정권의 보도지침에 저항하는 유일한 매체이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했다. 형기가 만료된 오 대표는 곧장 「말」지 사무실로 향했다. 불과 두 주 뒤에 있던 채용 시험을 통과한 오 대표는 지난 1988년, 월간 「말」 기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기자생활 내내, 오 대표는 금기와 성역에 도전했다. 1년차 기자였을 때,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미군기지 문제를 보도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주한미군과 관련해 제대로 문제를 제기한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후로도 노근리 양민학살, 미군기지 환경오염 등의 문제는 기자생활 내내 주요 관심사였다. 오 대표는 “당시에 다른 기자들이 말하지 않는 부분에 도전하고자 했다”며 “우리 사회에 화두를 던지고 의제를 설정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퇴색하지 않는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했다. 색깔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누가 봐도 오연호의 글’인 기사를 쓰고자 했다. 소설가를 지망했던 경험을 살려 소설적 기법이 가미된 기사를 쓴 적도 있었고, 기사를 엮은 단행본도 여러 권 냈다. 오 대표는 “내가 쓴 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했다”며 “기사들이 보도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되길 바랐다”고 전했다.

 

전환점이 된 미국행

 

지난 1994년, 오 대표는 일에 대한 열정이 전과 같지 않음을 느꼈다. 변화하는 세상과 정체된 자신이 그 이유였다. 한국 내에 머무르는 종이 월간지 기자 일이 더 이상 성에 차지 않았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무력감이 들었다. 오 대표는 “어떤 일을 할 때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변해야 한다는 중대한 신호”라고 말했다. 일대 전환이 필요했다.
그렇게 미국행을 결심했다. 특파원 일도 하고 공부도 하며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대한 안목을 얻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열 명 남짓한 상근기자가 전부인 회사에 특파원 직책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오 대표는 필요한 경비는 스스로 마련하겠다는 조건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온 가족이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생활비였다. 모자란 월급 탓에 부인은 식당에서 일을 했고, 오 대표 역시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 대표는 월간 「말」의 특파원이었지만 동시에 MBC 라디오의 워싱턴 통신원으로 일해야 했다.
쉽지 않은 나날이 이어졌지만 미국 생활에서 새로운 자극을 얻었다. 일과 석사 공부를 병행하는 과정에서 「오마이뉴스」의 핵심인 시민기자 시스템을 생각해냈다. 오 대표는 “교수가 독창적인 매체를 고안하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는데 그 때 구상한 것이 시민기자 모델”이라며 “미국에서 인터넷과 관련된 지식이나 경험을 쌓지 못했다면 「오마이뉴스」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의 경험만큼이나 「오마이뉴스」 창간에 영향을 미친 것이 「말」지에서의 기자생활이었다. 비주류 월간지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전통적인 언론이 사회의 의제를 독점적으로 설정하는 언론 구조에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오 대표는 “직업기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언론 생태계에 시민이 개입한다면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말」지 기자로 있는 동안 출입기자실에서 쫓겨나고, 탄압을 받았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천천히 꾸준하게

 

오 대표는 「오마이뉴스」가 단순한 인터넷 언론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운동이라고 말했다. 기존 언론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호응해준 덕분에 「오마이뉴스」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네 명으로 시작한 언론사가 상근직원 120명의 직장이 되기까지 칭찬도 많았지만 우려의 시각도 적잖았다. 특히 시민기자 제도와 관련해 늘 따라붙은 꼬리표는 ‘기사의 완성도 부족’이었다. 이에 오 대표는 “일부 시민기자가 종종 투박하고 덜 정제된 표현을 쓰지만, 그것까지도 존중하자는 것이 원 취지”라면서도 “사실관계 확인과 검증은 그 무엇보다 철저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14명가량의 편집팀이 오직 검증작업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오 대표는 “시민기자들의 다양성과 시스템적 안정성에 자부심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근, 「오마이뉴스」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문제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실시간 스트리밍을 통해 사건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오마이TV’ 현장중계는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촛불정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지난 4월, 현장중계에 투입된 기자들의 과노동 문제가 불거졌다. 오 대표는 “독자들의 성원에 도취됐던 것 같다”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난 2016년에 과노동을 방지하기 위한 사내 규정을 만들었으나 실질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 대표는 “사건 이후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다”며 “사회적 대의를 보도하고 독자의 요구에 신속하게 반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드시 그에 참여하는 노동자의 주체성과 휴식을 적절하게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또 “「오마이뉴스」뿐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 언론노동환경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개선되길 바란다”고도 덧붙였다.

 

새로운 도전으로 변화에 앞장서다

 

몇 년 전부터 오 대표의 이름 뒤에는 교육자라는 다소 낯선 직함이 붙게 됐다. 지난 2016년, 강화도에 개교한 ‘꿈틀리 인생학교’(아래 꿈틀리)에서 국어 교사 겸 이사장을 맡게 됐기 때문이다. 꿈틀리는 중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1년간 자유롭게 인생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하는 대안학교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철학, 역사, 고전읽기부터 밭농사, 목공, 도예까지 다양한 공부를 한다. 또 관심사가 맞는 학우들이 세 명 이상만 되면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 1년간 탐구하고 싶은 분야를 자유롭게 정해 프로젝트를 기획할 수도 있다. 뮤지컬과 연극, 합창 등 다채로운 형태의 공연을 준비해 발표하는 협동 프로젝트도 있다.
꿈틀리의 시작은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물음이었다. 오 대표는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사회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가 궁금했다”며 “해답을 찾기 위해 행복지수 1위 국가인 덴마크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또 오 대표는 “직접 가서 느낀 덴마크 사회는 구성원에게 획일적인 경쟁을 강요하지 않았다”며 “우리도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했고, 그게 꿈틀리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 대표는 “아직은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라며 “여전히 과제가 많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비용 문제가 가장 먼저 언급됐다. 적자편성을 하며 강연료와 기부금으로 재정상의 구멍을 메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업료가 ‘상당수 가정에 부담스러울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또 오 대표는 “앞으로는 청소년 뿐 아니라 성인도 참여할 수 있는 단기 학교도 만들 계획”이라며 “일단은 새로운 방식의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여기 ‘멈춰섬’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누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역동적으로 살아왔다. 소설가를 꿈꾼 시골 소년에서 운동권 대학생으로, 월간지 기자에서 언론사 경영자로, 그리고 또다시 교육자와 강연가로 끊임없이 변모해온 오 대표가 우리 사회에도 역동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 송경모 기자
songciety@yonsei.ac.kr

사진 윤현지 기자
hyunporter@yonsei.ac.kr

송경모 기자, 윤현지 기자  songciety@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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