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과 더불어 6월 항쟁의 기억이 돌아왔다. 6월 항쟁은 올해로 30주년을 맞게 되었다. 더우기 지난 3월 10일에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을 이끌어낸 촛불집회는 6월 항쟁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한층 새로운 결로 다가온다.

1987년 6월 항쟁은 평화적인 시위를 통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다른 항쟁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다. 4·19 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다수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많은 아픔을 지닌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많은 희생을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를 재출현을 막지 못하였다. 예전의 대규모 시위와는 다르게 6월 항쟁은 큰 희생자 없이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군부독재 정권의 붕괴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다. 물론 전두환 대통령 이후 동일한 군부 출신인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로 선택되어 군부통치를 확실히 종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녔지만 6월 항쟁이 본격적인 경제성장 후 평화적인 시민운동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월 항쟁의 성과는 특정 정파가 독점할 수는 없다. 특정정파가 우리만 홀로 6월 항쟁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할 수는 없다. 6월 항쟁의 성과는 군부독재에 저항한 모든 시민들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6월 항쟁 후 이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제갈길을 걸어 갔지만 과거와 같은 독재와는 근본적으로 완전한 단절을 이루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에 의한 하나회 숙청은 군부의 정치참여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어 문민정부의 기본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6월 항쟁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된 북방정책, 남북한 협력 등은 모두 6월 항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선 곳이 서로 다를지라도 6월 항쟁은 우리 모두의 승리였다.

6월 항쟁 이후 모두들 역사는 발전한다고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 이후 심한 좌절이 있었지만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며 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이후 새로이 선택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화의 역사가 직선적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결국은 탄핵을 당하면서 민주화의 역사가 후퇴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시민이 깨어있지 않으면 역사가 거꾸로 흐를 수도 있었다.

6월 항쟁은 표면적으론 평화적인 시민항쟁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귀한 희생이 그 기반이 되었다. 대학생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그 중 대표적이다. 모진 고문에 의한 대학생 박종철의 죽음은 정권에 균열을 일으켰고 최루탄 발사에 의한 대학생 이한열의 죽음은 정권의 붕괴를 마무리지었다. 특히 이한열의 장례식에는 백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모여 정권의 폭력성을 규탄하였고 젊은 벗의 넋을 위로하였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누군가의 생명을 댓가로 치룬 것이다. 우리 모두는 빚진 자 되어 이를 귀하게 키워나갈 임무가 있다. 

박근혜 정권의 붕괴도 세월호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꽃다운 목숨들이 정부의 방관 속에 흩어져갔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를 묻는 시민들이 다시 거리에 나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치기 시작하였고 온갖 부정으로 가득한 박근혜 정권은 평화로운 시민 혁명에 의해 다시 붕괴되었다. 이후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정권과의 단절을 약속하며 개혁정책의 추진을 약속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붕괴 후 이의 잘못을 개혁하려는 정권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6월 항쟁의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민주화의 끝없는 흐름은 공동체와 타인을 배려하는 깨어 행동하는 시민들과만 함께 할 것이다. 더불어 민주화의 원리가 국가나 정부 뿐만 아니라 직장과 학교,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이뤄지기까지 낙관은 금물이다. 민주화가 우리 생활의 원리로 스며들 때까지 스스로의 촛불을 놓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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