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 빼고 말하기

권진송 (철학·16)

예술은 과연 도덕과 무관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이 도덕과 무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깔린 전제는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이 다른 어떠한 사회적, 윤리적 기제와도 관련 없이 촉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사회적, 윤리적인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이지, 잘못 자체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둘째, 아름다움 자체가 신에 의해 주어진 절대적 개념이거나 언젠가는 궁극적이고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묄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작품에서, 아름다운 여성은 오늘날의 여성과 달리 다리가 짧둥하고, 뱃살이 불룩 튀어나온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의 책임이 부여되었던 당시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결과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순수해 보이는 미감도 사회적인 것, 윤리적인 것과 동떨어질 수 없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술과 도덕이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이들은 도덕적 결함이 있는 예술가들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공인으로서의 예술가의 도덕성에 대해 논하기 전에,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예술가는 과연 공인인가?

공인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예술가가 공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공적인 이익보다 사적인 이익에 더 많이 관련되어 있으며, 예술가 자체도 공적인 기관에 속한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다”라는 다소 낭만적인 답변은 사실 틀린 구석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공적인 이익에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가가 과연 ‘공인’이라는 단어의 가장 대표 격이 되고 있는 현실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공무원이나 정치인처럼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 말고도, 공인이라 일컬어질 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은 많이 있다. 사적인 이익 추구가 나라의 경제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대기업의 회장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공적인 이익을 위해서 사적인 도덕성이 면밀하고 투명하게 검토되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도덕성을 검토할 때 기저에 깔려야 할 태도는 ‘공인’이라는 핑계를 들먹이며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할 권리를 찾는 천박한 호기심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공적인 영역의 수호를 위해 최소한의 도덕성을 보장받고자 하는 조심스러움과 존중이 깔려 있어야 한다. 적어도 전자의 태도에서 기인한 비난이 후자의 태도에서 기인한 비판보다 더 맹렬하고 사납게 이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전자는 너무나도 뜨겁게 우리의 화제를 달구고, 후자는 너무나도 빨리 식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요새 예술가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 –예를 들면 김민희와 홍상수의 불륜 같은- 은 전자와 같은 태도로 많이 이루어진다. 반면 이건희 회장에 대한 비판은 우스갯소리처럼 소모되기도 한다. 김민희와 홍상수의 불륜은 윤리적으로 논의될 만한 지점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윤리적이고 사회적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하게도 도덕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지 그들의 도덕성이 우리의 ‘공공의 이익’에 영향을 끼쳐서는 아니다.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기제들에 대한 섬세한 검토 없이 ‘공인’이라는 단어를 마구잡이로 앞세워 “나쁜 년, 나쁜 놈” 식의 비난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은 지적하고 되돌아볼 만한 것이다.

예술은 도덕과 무관할 수 없다. 예술가의 도덕성, 예술 작품의 도덕성은 사회적인 기제와 함께 고려되어 면밀히 비판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비판할 때 ‘공인’이라는 단어를 너무 망설임 없이 가져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공인이라는 이유로 윤리성을 비판하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서도 안 될 것이다. ‘공인’이라는 단어를 잠시 빼 놓고 말해 보자. 아마 여전히 말할 것이 많을 것이다. 아마 더 많아질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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