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이한열(경영·86) 열사가 쓰러졌을 당시 우리신문사는 호외호를 발행해 이 열사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고 책임소재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그러나 해당 호외는 보관 과정에서 누락돼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한열기념관은 물론이고 우리대학교 중앙도서관, 우리신문사를 비롯한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4월에 한 동문이 이한열기념사업회 측에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호외를 기증해 해당 보도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에 우리신문사는 이한열 열사 30주기를 맞아 당시 편집국장으로 호외호 발행을 주도한 채형우 동문(정외·85)을 만났다.

지난 5월 30일, 기자는 우리대학교 대강당 앞에서 채 동문을 만나 한열동산으로 향했다. 기자와 인사를 나눈 채 동문의 말투에서는 희미하게 강원도 방언과 이북 사투리가 섞인 듯한 억양이 느껴졌다.
휴전선과 인접한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채 동문은 세 살 때 충북 제천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초중고를 모두 졸업한 뒤, 채 동문은 85학번으로 우리대학교에 입학했다. 시골에서 자라 사회문제나 학생운동이 낯설었던 채 동문에게 대학은 문자 그대로 신세계였다. 84년 이뤄진 학원 자율화 조치로 인해 비교적 완화된 분위기 아래 채 동문을 포함한 많은 신입생들은 대학에서 사회 비판적 시각을 배우게 됐다. 채 동문은 공부 말곤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이 대학에 입학한 뒤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고 술회했다. 역사 연구회 동아리 등지에서 토론하고 공부하며 “한 마디로 의식의 대전환이 이뤄졌다”고 채 동문은 표현했다.
 

30년 전, 6월
 

87년 6월, 민주주의와 직선제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채 동문은 “정치외교학과 동기들이 130명 정도였는데 수업에 나간 건 아마 5명도 안 됐을 것이다”라며 “오히려 그 다섯 명도 함께 집회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모양새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묘사했다. 1월에 벌어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이어,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호헌조치가 4월 13일에 발표됐다. 거기에 불을 댕긴 것이 이 열사의 비보였다.
6월 9일, 우리대학교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한 이 열사는 전경 측에서 사용수칙을 어기고 낮은 각도로 발사한 최루탄에 후두부를 피격당해 쓰러졌다. 학우들이 부축해 이 열사를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이미 병원에 도착할 즈음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채 동문은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이한열이 누군지, 어떤 상황인지조차 몰랐다”며 “시위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기삿거리도 되지 않았고, 항상 세브란스 병원은 시위하다 다친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말했다. 더구나 채 동문은 이 열사와 학과, 학번 모두 달랐으며 이전에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다. 결국, 이 열사의 상태가 위중하며 대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소식은 이튿날 열린 ‘부상학우 긴급보고 및 6·10국민대회 출정식’을 통해 전해졌다.
이 열사가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에도 시위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열사가 쓰러진 뒤로 최루탄 추방을 촉구하는 대회가 열리는 등 시위의 빈도와 세가 급격히 강화됐다. 채 동문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대학생들은 곧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 격이었다”며 “그런 학생들이 쓰러져나간 것이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정부에게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전에는 규모 면에서 밀려 전경에게 쫓겨 다니기 바빴던 시위대가 되려 전경들을 포위해 무장해제 시키고 전경들의 무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종로, 신촌 등 서울 곳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결국, 여론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해 6·29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열사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7월 5일, 이 열사는 27일간의 의식불명 끝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최루탄 피격에 의한 뇌손상’이었다.
 

‘벗이여 고이 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나흘 뒤인 7일, 우리신문사는 이 열사의 죽음과 장례식 소식 등을 담아 총 두 면으로 구성된 호외호를 발행했다. 일면식도 없던 이 열사의 죽음을 호외로 다룬 데 대해 채 동문은 “누구나 그렇게 하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한열이의 죽음은 한열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열이의 죽음이 곧 내 문제였다. 우리대학교 학생이,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가 민주화운동을 하다 죽었다. 그 자리에 한열이 대신 내가 있었을 수도 있다. 누구든지 한열이가 됐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나.”

채 동문은 비록 생전에 이 열사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한열 열사’보다 ‘한열이’라는 호칭이 입에 붙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터뷰 내내 이 열사를 ‘한열이’로 칭했다. 채 동문은 곧이어 호외호를 낸 이유도 설명했다.


“한열이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다가 간 것이었고, 나는 그럼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본 결과 호외호를 내게 된 것이다. 당시에 우리 기자들뿐만 아니라 신문사 주간, 편집인도 흔쾌히 우리와 뜻을 같이해줬다.”


호외 발행은 당시 우리신문사 기자들이 쏟아낸 울분이자 한열이에 대한 추도사였다. 단적으로 당시 1면 기사 제목이었던 ‘벗이여 고이 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가 호외호를 발행한 두 가지 이유를 잘 보여준다.

“한열이가 마지막 가는 길을 잘 보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또 한열이는 그렇게 떠나갔지만 남은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한열이가 보지 못한 세상, 우리가 꿈꾼 세상을 위해 살겠노라 하는 다짐이 있었다.”

채 동문의 다짐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꿔보고 싶어서’ 채 동문은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10년간 했고, 지금은 개성공업지구 지원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이 열사가 민주주의 가치의 승리에 기여한 것처럼 채 동문은 민족 평화통일이 실현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라고 채 동문은 말한다. 채 동문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가치를 따라 살 것인지 결정이 필요할 때마다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며 “한열이는 내게 길잡이다”라고 덧붙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와 채 동문은 백양로를 걸었다. 채 동문은 ‘유월 하면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며 이 열사 장례 당일을 떠올렸다.

“학교에서 출발한 행렬이 신촌 로터리를 지나 광화문까지 가는 동안 계속해서 불어나 나중엔 1백만 명이 모였다. 광화문 교보문고 사거리 16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였다. 행진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멈춰서 침묵 속에 전경과 대치하던 중, 누군가 적막 속에서 외쳤다. ‘가자 청와대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신호로 앞으로 나아갔다. 곧 페퍼포그*차에서 쏜 지랄탄**에 사방이 매캐해졌다. 시간이 지나 연기가 걷히고 나니 그 많던 사람들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진 뒤였다. 단지 코리아나 호텔 앞에 주인 잃은 신발짝만 수북했다.”

 

*페퍼포그: 최루탄 다연발 발사장치를 탑재한 시위진압용 차량.
**지랄탄: 최루탄의 일종. 페퍼포그를 통해 발사돼 대규모 시위대를 해산시킬 때 주로 사용됐다.


글 송경모 기자 songciety@yonsei.ac.kr
사진 신용범 기자 dragontiger@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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