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민 교수 (우리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기레기’라는 표현은 현재 한국언론의 위기를 상징하는 단어다. 이 표현은 적지 않은 국민이 언론 보도와 언론인의 보도태도를 불신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언론을 믿지 않는가? 도대체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전체로서의 언론인이 불신의 대상이라고 하지만, 믿을 만한 언론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으로 첫 손꼽히는 ‘손석희’ 씨를 떠올려 보자. 왜 손석희 씨는 가장 신뢰받는가?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가 ‘언론인’이라는 직업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은 폴리널리스트(저널리스트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정치에 뛰어든 사람)에 대해 우려하는가? 왜 사람들은 언론사의 입맛에 맞게 ‘마사지’한 기사를 쓰는 기자에 대해 ‘기레기’라는 이름표를 붙여주는가? 이유는 어쩌면 너무도 단순하다. 우리는 의식적이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들 언론인의 모습에서 ‘언론인’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론인으로서의 명성을 언론활동이 아닌 다른 활동에 쓰고, 언론의 힘을 언론인 자신이나 언론사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는 바로 그 이유는 언론인의 말과 행동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만드는 근본원인이다. 환자를 치유하는 데 관심이 없는 의사,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학정보를 왜곡하고 남용하는 ‘쇼닥터’에게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학생을 가르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선생,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학생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사람이 존재할까? 마찬가지다. 소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언론인의 보도와 주장을 접한다면, 독자는 언론인의 말에 집중하는 대신 언론인의 말에 숨겨져 있는 의도를 파악하는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말이 아닌 말 내면의 의도에 대한 해석에 집중하게 될 때 말은 현실을 올바로 설명하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언론이 언론으로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언론의 역할을 수행할 때, 그리고 언론의 역할에만 머무를 때다. 손석희 씨가 가장 신뢰를 받는 저널리스트로 손꼽히는 이유는 ‘손석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언론에 남아있기 때문이며, 언론인으로 재직하는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언론활동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 그대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마 5:13)이다. 실제로 역설적이게도 언론인으로서 충분한 명성을 얻고 난 후 정계로 진출했던 소위 폴리널리스트 중 상당수는 자신이 쌓아왔던 언론인으로서의 명성과 잃지 않았던가?

문제는 언론의 영역을 벗어난 언론의 폐해가 일탈한(?) 언론인 개인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론인의 명성을 다른 영역에서의 성공을 위해 이용하고, 정보전파와 설득이라는 언론의 힘을 남용한 ‘어제’의 언론인의 모습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언론인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다. ‘기레기’로 대표되는 언론에 대한 불신 중 상당부분은 사실 기성 언론인의 업보(業報)를 현재 언론인이 겪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언론이 신뢰를 잃은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듯, 언론이 신뢰를 되찾는 것 역시 단기간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 아렌트는 사적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갈등하는 근대 민주주의 제도가 사회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공화국의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에서 독립적인 ‘사회적 유배자(pariah)’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사회적 유배자 역할을 맡는 조직으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정의를 판단하는 ‘사법부’, 권력자나 다수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진리를 수호하는 ‘대학’,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태를 보도할 수 있는 ‘언론’을 언급하였다. 사법부, 대학, 언론이 현실 속에서 과연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상을 꿈꾸는 철학자가 현실에 무지한 채 내뱉은 철없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에 더 근접하려면, 우리는 아렌트가 말하는 사회적 유배자를 요청해야 한다. 그것도 타의에 의해 유배된 존재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킴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유배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론학’을 전공하는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학과 언론(사법부는 잘 모르겠다)은 너무도 현실에 매몰되어 사회적 유배자가 아닌 사회적 참여자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기레기’ 문제는 바로 사회에서 스스로를 배제시킨 채 스스로의 직분에 충실해야 하는 언론이 사회에 포섭된 채 스스로의 직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 아닐까? 물론 대학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여 언론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안한 일이라는 사실도 이 자리를 통해 부끄럽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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