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속 ‘걸크러쉬’를 짚어보다

▶▶ KBS2 예능 『언니들의 슬램덩크 시즌2』의 한 포스터

현재 음원차트를 들여다보면 유수한 가수들을 제치고 최상위에 오른 한 여성 그룹이 있다. 이들의 이름은 ‘언니쓰’. 명칭만 봐도 여성을 주된 시청자층으로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2016년, 『언니들의 슬램덩크』라는 예능을 통해 데뷔한 ‘언니쓰’는 바람난 애인을 향해 눈물짓는 대신 ‘닥쳐’라고 외치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올해도 그 인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렇듯 여성이 ‘여성’을 끌어당기는 사례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걸크러쉬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는 ‘걸크러쉬(Girl Crush)’라는 신조어가 통용되고 있다. 여기서 걸크러쉬란 ‘소녀(Girl)’와 ‘반하다(Crush On)’의 합성어로 ‘여성이 동성에게 느끼는, 성적인 감정이 수반되지 않은 강렬한 호감’으로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걸크러쉬의 대상은 뛰어난 외모·스타일·지성·사회적 지위 등을 가진 여성이며 이들은 동성에게 선망 및 대리만족의 대상이 된다.
사실 여성이 동성을 선망하는 구도는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대표적으로 ‘멋진 여성’의 대명사로 불리며 여성들의 롤 모델로 자리매김했던 가수 이효리·배우 김혜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자기표현에 당당했던 이들은 주체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며 여성들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잔잔히 이어져 오던 현상이 ‘걸크러쉬’라고 명명되며 확대된 계기에는 걸그룹 ‘마마무’의 뮤직비디오가 있다. 지난 2015년 중순에 발표된 해당 뮤직비디오에서 마마무는 힘 넘치는 가창력에 남장 컨셉으로 타 여성 그룹과 차별성을 두며 이슈가 됐다. 그 후 ‘어디서 너 남자 짓이야’를 외치는 가모장 캐릭터 개그우먼 김숙·센 언니들의 예능 『언니들의 슬램덩크』·남성을 뛰어넘는 체력으로 갈채 받은 배우 이시영 등이 걸크러쉬 열풍의 선두주자가 됐다. 그 과정에서 걸크러쉬는 가요·예능·드라마를 막론하고 대중문화 전반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산업분석팀 장민지 박사는 “그간 방송에서 주체의식을 갖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주로 남성으로 등장했다”며 “방송이나 미디어를 통해 기존에 보이지 못했던 주체적인 모습을 표출하는 여성들이 걸크러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걸크러쉬 열풍은 빅데이터 분석으로도 확인된다. 빅데이터 통계사이트인 ‘구글 트렌드(Google Trend)’에 따르면, 걸크러쉬에 대한 관심도는 지난 2015년 중순을 기점으로 치솟았다. 이후 지난 2016년 8월, 걸크러쉬는 관심도 정점을 기록한 뒤 2017년 현재까지도 그 여세를 몰아가고 있다. 이에 장 박사는 “2017년의 미디어 편성 내용들을 보면 걸크러쉬 현상에 기반을 둔 예능 및 드라마가 상당하다”며 “이 열풍은 향후 몇 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사회적 코르셋에 크러쉬된(Crushed) 여성, 걸크러쉬를 좇다

그렇다면 왜 최근 들어 걸크러쉬 현상이 대중문화의 큰 줄기로 확대된 것일까?
걸크러쉬가 나타나게 된 기저에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라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깔려있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여권의식 신장과 사회진출 확산이 꾸준히 이뤄져 왔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시선·고정관념 등으로 인해 상당수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요구하고 성 역할을 구분해 고착시키는 것 등을 넘어 직장 내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배제하는 유리천장 및 임금 격차 등과 같은 실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주요국가 성별임금격차」에서 우리나라가 30여 개 회원국 중 남녀 간 임금 격차율이 36.7%로 가장 큰 나라이며, 해당 격차율은 평균치인 15.6%보다 2배를 훨씬 웃도는 수치라는 점으로 입증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최근 여성의 권리 실현 및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성주의’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이는 여성들의 권리 의식을 더욱 일깨웠다. 문화평론가 하재근 씨는 한 매체에서 ‘종래의 여성을 억압하던 사회적 행태에 대해 권리 의식이 성장한 여성들이 당당한 걸크러쉬 여성에 대한 열망을 보이게 됐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현실에 짓눌린 여성들이 대중매체 속 특정 여성들을 선망 및 대리만족의 대상으로 삼아 걸크러쉬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수동성을 요구하는 기존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주체적인 자아를 추구해 나가기도 했다. ‘내 이상형은 조신하게 살림하는 남자다’라 외친 김숙의 경우, 전통적 가부장제 의식을 전복시켜 여성들을 통쾌하게 했으며 가정 내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재고를 가능케 했다.
장 박사는 “기존 방송의 남성 주류적인 경향은 여(女)성을 여(餘)성으로 전락시켰다”며 “걸크러쉬 열풍은 주체가 되지 못했던 모든 여(餘)성들이 힘을 실어준 결과”라고 밝혔다. 또한 우리대학교 문과대학 성평등위원회는 “걸크러쉬는 기존 ‘여성성’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자 도전”이라며 “주체성·당당함과 같은 속성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타파하려 했다는 데 그 긍정적 요소가 있다”고 전했다.

걸크러쉬,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하지만 일각에서는 걸크러쉬가 현재의 열풍을 넘어 사회적 현상으로 굳어졌을 때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먼저, 널리 확산된 걸크러쉬 현상으로 인해 한 인간의 개별적 특성이 가려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일례로 군대 예능에서 이시영은 남성에 앞서 자신의 몫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걸크러쉬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시영이 수동성으로부터 탈피했다’라고 여기는 사회적 시선 속에는 오히려 ‘여성은 수동적 존재’라는 기존의 선입관이 전제돼있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은 수용자로 하여금 적극성이 그 개인의 자체적 특성일 수 있음을 간과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장 박사는 “특정 여성을 ‘걸크러쉬를 유발하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개인의 특성을 고려해 ‘능력 있는 여성’ 등으로 칭하는 것이 적절하다”라고 전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고착화 된 걸크러쉬 현상 속에서 동성애적 맥락이 배제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걸크러쉬의 이면에는 동성애를 단순히 동경으로 무마하려는 이성애 중심적 사고가 담겨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동성 간 성적 끌림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결국 성 소수자를 타자화하며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황소연 활동가는 “걸크러쉬의 기저에는 동성애적 성향을 인정하지 않고 꺼리는 시선이 존재한다”며 “유행처럼 번진 걸크러쉬 현상의 본질을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우리대학교 총여학생회는 “걸크러쉬라는 단어의 남용은 성 소수자의 존재를 지워버린다”며 “단어 하나로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감정을 분절적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일 수 있다”고 답했다.

걸크러쉬는 이제 낯선 단어가 아니며, 이는 우리 사회의 여권 신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남용되거나 오용됨으로써 기존의 그릇된 사고방식을 고착시키지 않도록 그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글 전하연 기자
seiyeonii@yonsei.ac.kr
<자료사진 언니들의 슬램덩크2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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