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7일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꼭 1년 째 되는 날이다. 이 사건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분위기 속에서 강남역엔 다시 ‘포스트잇’을 붙이는 추모행렬이 이어졌고, 같은 날 우리대학교에서는 총여학생회의 주최로 장애인, 성소수자, 페미니즘, NGO 학회 및 단체와 함께 인권축제가 개최됐다. 당시 조현병을 앓던 남성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으로 규정한 경찰의 수사결과에도 불구하고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에 대한 상징적 사건으로 인식돼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시공간에서 평범한 20대의 젊은 여성이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고, 그로 인해 많은 젊은 여성들은 “살아남았다”는 포스트잇 글귀를 통해 더 이상 숨을 곳 없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분노와 불안, 그리고 원망을 사회를 향해 표출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강남역을 도배한 포스트잇 속에 아로새겨진 여성들의 절규에는 오랜 동안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묻지마살인, 가족동반자살, 강간살인 등의 사건 속에서 일상 곳곳에서 유린돼 온, 대부분의 경우, 어린 혹은 여성 생명에 대한 절망감이 묻어난다. 사실 강남역 살해범이 “여성에게 자꾸 무시를 당해 범행”했음을 자백했음에도 당시 국가는 경찰의 입을 빌어 이 사건이 여성혐오 사건임을 애써 부인하며 정신병 환자의 우발적 사건임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국가는 고질적으로 평등권이나 생명권, 혹은 인권을 수호하지 못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공동체적 폭력을 ‘비정상적’ 개인의 파편적 일탈로 폄하해 온 관행을 고수한다.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이를 두고 한국의 남성 문화가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과로 분석한다. 결국, 우리 사회 여성혐오의 문제는, 인정하든 안하든, 정 씨의 말대로, “있는데 없는 문제”로 치부돼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엽기적 살인이 일상화된 요즘이지만, 유독 강남역 살인사건이 범국가적 관심을 끈 이유는 젊은 여성의 개인적 죽음 이전에 대한민국 공동체가 더 이상 생명의 안식처가 될 수 없음에 대한 절박함과 무관치 않다. 그 죽음은 가정의 사적 공간도, 은밀한 폐쇄적 공간도, 인적 드문 외진 공간도 아닌, 붐비는 시각에 그것도 강남 도심 한 가운데서 여린 생명이 무참히 살해된 탓과 무관치 않다. 유사 사건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화장실에 비상호출기를 설치하거나, 남녀공용화장실을 금지한다거나 등의 방편은 사실 문제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강남역 사건 1주기를 맞아 다시 내걸린 포스트잇과 인권축제가 열린 연세대 백양로에서 참가자들이 저마다 써내려간 추도문들 중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메시지는 남녀차별의 문제보다도 오히려 “내가 안전하다는 믿음”을 염원하는 글귀들이다. 생명의 문제는 남자나 여자의 문제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인권의 문제이며, 인권의 문제는, 한나 아렌트가 언급한 것처럼, 국가의 운명과 결부돼 있으며 어느 한쪽의 쇠퇴와 위기는 다른 한쪽의 종말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 1948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국제인권장전 제 1조의 내용이다. 강남역 사건의 본질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그로 인한 폭력의 문제임을 부인하는 것은 분명 성 차별 문제를 외면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공동체적 폭력과 다름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은 최근 일베나 메갈 등으로 상징되는 성적 대결구도와 이성을 대상화하고 적대시하는 배타적 관계 속에선 그 해결책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오더라도 생명에 대한 가치를 경시하고 타인의 삶을 공감하지 못하는 차별의 속성이 남아 있는 한, 다양한 성적, 인종적, 계급적 차이를 이유로 사회적 약자는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강남역 사건 피해자가 꼭 여성만이겠는가. 이러한 타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의 악순환은 결국 “슬프고 미안합니다”라는, 아픔을 함께 나누며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 생명임을 인지하는 공감의 정서를 보편화하는 것으로부터 그 단절이 시작될 수 있다. 이번에 새로 취임한 19대 대통령이 1년 전 이맘 때 남긴 이 트윗의 내용에 담긴 공감의 정서가 이제는 우리 사회의 현실정치에서 뿌리내리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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