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혜 사회부장 (언홍영·14)

 얼마 전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인을 만났다. 점심 먹을 시간을 정하려고 하자, “근무시간 내 자유롭게 1시간을 쓰면 되니까, 편한 시간에 보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야근은 정말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거의 없으며, 하게 되더라도 그에 응당한 수당 지급은 당연하다. 직장 상사가 어떤 이유로든 신입사원의 삶을 침범하는 일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상대방의 개인정보에 대해 함부로 묻지 않는다. 물론 그것으로 인한 단점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곳에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지난 2016년 10월, 유명 방송사의 드라마 신입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자살을 택하면서까지 알리고 싶었던 문제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 고 이한빛 PD의 유서 中

한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이 PD가 55일이라는 제작 기간 동안 쉰 날은 이틀이었으며,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4.5시간이었다. 또한 살인적인 근무환경과 더불어 이 PD는 노동착취의 주체가 돼야 했다. 제작진이 제작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외주업체를 교체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비정규직 스태프를 해고하고 그들로부터 계약금을 환수하는 일은 이 PD가 강제적으로 도맡아야 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일하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고 싶어 했던 이 PD는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일이 몰리긴 뭘 몰려. 원래 신입사원은 그런 일 하는 거야’
‘그나마 그 프로그램은 타 프로그램 대비 근무 강도가 특별히 높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PD의 죽음에 대해 방송사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원래 그래’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 잔인한 말로 수많은 노동현장에서는 인권의 사각지대가 양산되고 있다. 청년노동자들은 장시간 동안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며 일한다. 혹자는 이들에게 ‘이것도 못 견디면 이 바닥에서 못 살아남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란 없다. 내재된 구조적 문제를 덮어두려고 하는 가진 자들의 프레이밍만 있을 뿐.

잘못된 것은 마땅히 바뀌어야 한다. 청년들의 꿈을 담보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열악한 근무환경은 원래라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다. 미래 우리의 일터는 떠나고 싶은 직장이 아닌,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으며 오래 머물고 싶은 공동체가 돼야 한다.

기억하자, 하나씩 바꿔나가자, 먼저 투표로 시작하자.
지금도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상대로 한 개인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나가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은 싸워나갈 힘이 된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해결돼야 할 필요성과 원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의 기억과 관심 속에 남아있을 때이다. 이 PD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잊지 말자.
그리고 투표하자. 그토록 기다리던 대선이다. 모든 변화는 개개인의 생각 변화와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더는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하지 않도록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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