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야만의 시대

지난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 위도 인근 해상에서 ‘서해 훼리호’라는 이름의 여객선이 침몰했다. 292명의 목숨이 희생된 이 사건은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항해에 부적절한 기상상태와 더불어 221명 정원의 선박에 무려 362명이나 되는 승객이 승선한 점, 화물 수송 겸용 여객선이 아닌데도 16톤 이상의 화물이 과적된 점이 맞물려 침몰의 주요 원인이 됐다. 유사시 350명이 넘는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안전요원은 두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20여 년 뒤, 세월호가 침몰했다. 이번엔 300명이 넘는 승객이 바다에 잠들었다. 수학여행 길에 올랐던 단원고 2학년생들, 일반인 탑승객들, 마지막까지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던 교사와 선원들의 시계가 일제히 하루에 멈췄다. 세월호 참사는 20년 전으로부터 한 치도 변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구조 및 사고 대응 과정에서 무능을 드러낸 정부, 받아쓰기식 보도와 진위가 불분명한 특종만을 쫓은 언론, 망각을 넘어 외면과 조롱을 택한 사람들. 그 모두가 가감 없이 드러난 우리 사회의 야만이었다. 그리고 3년, 유감스럽게도 아직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재난 상황에서 정부는 여전히 무능하다. 지난 2016년, 경주에서 진도 5.8의 지진이 났을 때 정부는 그곳에 없었다. 가장 먼저 지진 발생 소식을 전달하고 대피를 유도해야 할 국민안전처의 누리집은 마비됐다. 일부 지역에는 한 통의 재난문자도 발송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부가 지진과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발표한 것은 지진 발생 2시간 47분 후, 그것도 총리실을 통해서였다. 이후로도 추석 연휴까지 무려 300차례가 넘는 여진이 발생했다. 그러나 정부는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책임 회피성 발언과 함께 “정부를 믿으라”는 입장만 반복해서 내놓았다.
문제의식이 결여됐거나 사안의 본질을 호도하는 보도 행태도 여전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 측의 자료에 의하면, 지난 3월 22일부터 29일까지 KBS, MBC, 채널A, MBN의 인양 관련 보도 중 문제제기성 보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채 10%가 되지 않았다. 해당 방송사의 인양 보도 중 90% 이상이 해양수산부의 입장발표 등 단순 정보 전달에 그쳤다. 단적인 예로, 선미 램프 절단으로 인한 유실 가능성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었음에도 채널A는 유실 우려와 관련해 단 한 건의 보도도 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을 흐리는 보도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동일한 기간 동안 KBS는 세월호 인양이 세계 선박 인양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보도했고, TV조선은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을 음모론으로 일축하며 2008년 광우병 파동과 비교하기도 했다. 인양 과정의 지연 논란이나, 여러 의혹이 제기된 배경은 이들 보도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세월호에 대한 일그러진 시선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노골적 적의까지 강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지난 3월 23일, 한 대학교수는 학내 게시판에 ‘세월호는 한국 용공 세력이 북한과 손잡고 일으킨 사건’이라는 요지의 글을 게시했다.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는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 “바닷물에 쓸려갔을지 모르는 몇 명을 위해 수천억을 써야 하냐”라고 발언했다.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세월호는 단순한 해난사고”라며 “세월호가 왜 하필 지금 인양돼야 하냐”라고 주장했다. 이들 발언은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진상 규명 요구와 책임 추궁을 정치적 공작으로 매도한다. 특히 이와 같은 목소리가 지식인 계층, 사회경제적 상류층에 의해 거리낌 없이 생산 및 확대된다는 점에서 그저 단발성 망언으로 넘기기 어렵다. 

돈, 세월을 삼켰다

세월호 침몰은 무능한 정부, 황색 언론, 왜곡된 시선에 의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비화됐다. 이들이 3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한 사회 발전의 실패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사회라는 수식의 변수다. 박근혜 정권이 아니었다면, 언론의 인적/구조적 쇄신이 이뤄졌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 있다.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수식의 상수다. 우리 사회의 이면에 있는 배금주의라는 상수 말이다. 선박 노후화, 무리한 증축, 과속과 과적까지. 모두 효율의 극대화라는 탈을 쓴 배금주의였다. 훨씬 많은 인명이 구조될 수 있는 사고였지만, 그보다 앞서 침몰조차 하지 않을 수 있는 사고였다. 결국 배는 삐뚤어진 욕망으로 가득 차 기울었다. 부모는 자식의 속 빈 무덤가에서 울었다. 
그러나 여전히 효율성의 신화는 공고하다. 침몰 당시 선령 20년이던 세월호보다 5년 이상 오래된 여객선들이 아직 버젓이 운행 중이다. 해운법 시행규칙이 개정됐지만 선령제한만 30년에서 25년으로 낮아졌을 뿐이다. 선령 20년 이상의 선박이 의무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안전성검사를 보다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없는 것이다. 2014년 한 해 동안 주춤했던 과적 적발 건수는 불과 2년 만에 예년의 수준으로 회귀했다. 일반적으로 여객보다 화물 운송 업무로 얻는 수익이 월등히 크다 보니 처벌을 감수하더라도 과적을 쉬이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법의 허점을 노린 증축은 대형 여객선뿐만 아니라 소형 선박에서까지 횡행하고 있으며, 운항 시간표에 맞추기 위한 과속 항행 역시 마찬가지다. 단속 상의 어려움까지 겹쳐, 효율성의 탈을 쓴 배금주의는 언제든 제2의 세월호를 낳을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교묘히 도매금으로 넘기려는 양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망각에 대한 요구가 클수록 우리는 세월호를 잊어서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비록 깊은 바다에서 선체가 올라왔지만 인양은 또 다른 시작일 뿐, 그 어떤 변화도 확실히 담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아직 그대로다.


글 송경모 기자 
songciety@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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