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8인의 헌법재판관 만장일치로 인용됐다. 그 결과, 지난 2016년 10월 JTBC의 최순실 태블릿 PC 보도 이후 시작된 탄핵 정국은 마침내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의 파면으로 귀결됐다. 지난 3개월 동안 우리 사회는, 대통령 탄핵인용 여부를 두고 양 갈래로 나뉜 ‘촛불’과 ‘태극기’ 물결이 표상하듯,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불황과 맞물려 심각한 정치적 분열과 사회적 혼란을 경험했다. 이번 헌재의 판결 직후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지금까지의 정치적 반목과 공동체적 분열을 극복하고 사회적 통합을 강조하는 반응을 앞 다퉈 내보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최순실 국정농단 스캔들로 초래된 국정 리더십의 부재는 사드배치, 위안부합의, 청년실업, 경제파탄 등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전 국정 영역에서 광범위한 위기를 초래했다. 더 나아가 이번 탄핵인용은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 실정의 결과이자 대한민국 역사의 퇴보로 인식되고 있다. 이정미 헌법소장 권한대행은 대통령이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했고 그의 파면이 헌법 수호에 압도적으로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탄핵인용 배경을 밝혔다. 실제로 헌재의 판결문에는 공무원 임명권 남용, 언론자유의 침해, 기업으로부터의 불법자금 모금, 공무상의 기밀 유출 등 제왕적 절대권력에서나 가능했을 법한 현상들이 망라돼 있다. 특히, 탄핵소추 재판과정에서 대통령 변호인단이 보여준 비상식적 변론태도, 의도적 재판지연, 그리고 재판관에 대한 비논리적 공정성 시비 등은 대통령 불소추특권에 의지해 연명하던 박근혜 정권에 내재된 적폐의 정도를 극명히 드러냈다.

분명 이번 선고는 사필귀정의 역사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지난겨울 내내 세종로를 가득 메우며 8할에 이르는 국민의 여망을 담아 “박근혜 퇴출”을 외쳤던 촛불들은 이번 파면 선고에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쾌감으로 촉촉해진 그들의 눈시울은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비정상을 정상화하고 나라의 주권과 권력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민주국가에 대한 믿음의 실증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치적 분열과 사회적 갈등이 박근혜 한 개인의 퇴출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이는 단순히 헌재의 탄핵인용에 흥분해 태극기를 휘두르며 폭력 시위를 주도했던 ‘탄기국’이나 박사모가 여전히 판결에 불복하고 있다거나, 여전히 박 전 대통령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구태의 정치인들이 잔존해서가 아니다. 포스트-박근혜 시대를 위한 보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현안은 개별적 적폐의 제거에 있다기 보다는, 애초에 그 적폐를 가능하게 하고 또 다른 적폐를 언제든지 재생산할 수 있는 우리사회, 우리자신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실천이다.

이번 판결을 통한 적폐의 제거, 혹은 비정상의 정상화는 박근혜 한 개인의 퇴출을 넘어 민주적 대의제도를 통해 ‘수첩공주’를 국가원수로 선출한 우리 내부의 뿌리 깊은, 식민근성에 버금갈 의타성에 대한 청산 의지와 실천의 수반 없이는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정치생활 초기부터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달고 무지, 무능, 불통의 대명사였던 ‘공주 박근혜’는 과거 독재자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와 연민이 만든 정치적 허상이다. 세월호 사건과 유가족을 대하는 그의 언행과 태도에서 이미 알 수 있듯, 그의 정치적 허상은 현실정치 속에서의 타인에 대한 공동체적 경험과 이에 바탕을 둔 공감과는 거리가 먼 지도자였다. 또한 이러한 허상을 향한 맹목적 추종 역시 마치 폐쇄적 가상현실 속에서 이상화된 과거를 우상화한 결과와 다름이 아니다. 이는, 카이스트 전치형 교수가 한 칼럼에서 한병철의 저서 『투명사회』를 인용해 언급한 것처럼, 타인과의 교감에 기반 한 ‘경험’과 달리 자기 자신만의 현실에 빠져 원하는 ‘체험’만을 선택적으로 경험하고 그 체험만을 즐기며 순응하는 ‘가상현실’ 속에서의 미몽에 빠진 결과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과 헌정유린을 척결하고 민주적 법치국가로서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민주적 광장에서 태극기와 함께 휘날리는 성조기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적폐를 척결하고 새로운 희망을 설계하기 위한 국민들의 공동체적 경험과는 거리가 먼 가상현실적 체험에 가깝다. 평생 자신만의 가상현실세계에 빠져 살던 수첩공주는 파면 후에도 여전히 파란 궁전에 머물러 있다. 천 교수의 말처럼 지금부터 현실의 ‘경험’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과거의 미몽적 허상과 적폐를 청산하고 화합과 통합을 향한 미래는 준엄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공동체적 경험과 타인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이를 통한 민주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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