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화섭 문학상(희곡 분야) 당선작 ]


윤세훈(언홍영·15) 

등장 인물  : 회장, 세희(회장의 아들), 비서, 페인트공(내레이터), 디자이너, 소속사 대표, 기자 1,2, 방송국 회장

장소 및 배경 : 과거도 미래도 아닌 가상의 백색 세계.

무대 : 무대 중앙에서 하수에 가까운 쪽에 책상이 약간 비틀어진 채 놓여있다. 그리고 중앙엔 백색 소파 두개가 자리잡고 있다. 상수 쪽엔 회장실과 그 밖을 연결하는 문이 하나 덩그러니 서있다. 회장실을 둘러싼 벽을 포함한 모든 소품들 그리고 인물들의 얼굴까지 전부 백색이다.

 

내레이터가 뚜벅뚜벅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온다.

 

무대 중앙,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복장의 사람이 조명을 받은 채 말을 시작한다.

 

내레이터 : 여러분이 앞으로 보실 세계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또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세계입니다.

 

회장실 안, 백색으로 가득 찬 그 문 앞에 방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얼굴이 하얀, 페인트라도 칠한 듯한 비서와 한 소년이 흰 옷을 입고 선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비서 : (발을 동동 거리며)이거 진짜 큰 일 났는데. 회장님은 왜 이렇게 안오시나.

소년 : (한 쪽 볼에 손을 대고 있다) 아저씨 이게 그렇게 큰일이에요?

비서 : 큰 일 수준이 아니에요 글쎄!! 도련님, 아니 회장님까지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소년 : (박장대소하며) 하하하 에이 목숨은 무슨. (소파쪽을 향해 가며, 손은 계속 볼을 감싸고 있다.) 심심해요. 재밌는 거 없어요?

비서 : (핸드폰, 시계를 들여다보며)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니깐요!!

소년 : 그렇다고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요. 초성게임 알아요?

 

소년이 소파에 앉아있다가 눕기 위해 볼에 있는 손을 떼려고 한다.

 

비서 : (기겁하며 눈을 가린다)아 안돼요!!안돼!! 볼에 손 가만히 둬요 그대로!! 후…근데..그게 뭔데요. 초성게임이.

소년 : 왜 이렇게 오바야 진짜. 그냥 자음 정해놓고 그 자음을 초성으로 갖는 단어 말하면 돼요.

비서 : 알겠어요 뭐 해봐요 그럼. (소년이 또 손을 움직이려고 하자) 워우어워 손은 가만히!!!

소년 : 흠….그럼 ㅈ,ㅂ 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는 걸로 해요. 저부터, 정보.

비서 : 흠…자본?

소년 : 정부.

비서 : 방금 했잖아요 도련님. 제가 무조건 지는 게임인건가요 이거. 참..가뜩이나 서러운데 요즘.

소년 : 후…정보말고 정부요 정.부.

비서 : 아하, 정보, 자본, 정부..흠…..지배?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세차게, 큰 소리로 울리며 관심을 집중시킨다.

 

비서 : (책상으로 뛰어간 뒤 전화기 앞에서 고민한다.) 어!! 이렇게 바로 전화 오는 건 회장님밖에 없는데. 근데 이걸 믿으시려나. 어떻게 말씀드리지.

 

그동안 전화벨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더 이상의 사고를 할 수 없는 소음을 만들어내며 울려댄다.

 

소년 : 아 빨리 좀 받아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가 받을게요 그럼.

비서 : 아 알았어요. (수화기를 들며) 네 회장님 비서 ***입니다. (한참을 듣다가)네? 하하하하. 네네 안녕~

소년 : 아저씨 비서 맞아요..? 전화 그렇게 받아도 돼요..?

비서 : 무슨 이런 데까지 보이스피싱이 오는지. 글쎄 회장님 부인을 납치해서 붙잡고 있대요.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비서의 웃음은 과장된 채 점점 커져가고 바로 그 때 회장님이 들어온다.

 

회장 : 무슨 소란이야!

비서 : (웃음을 그치며 바로 옆에 열중쉬어 자세로 선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소년 : 엄마!!

 

비서가 황급히 소년 옆으로 가서 소년이 볼에서 손을 못 떼게 막는다.

 

회장 : 왜이래. 무슨 일이야.

비서 : 아니 그게…..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회장 : 뜸들이지 말고 짧고 빠르고 명확하게.

비서 : 그게….(소년의 볼에서 손을 서서히 떼며) 도련님 볼에 이상한 어두운 원이 나타났습니다. 회장님..

회장 : (놀라서 아무말도 못한 채 바라보며) 뭐야…. 저..저게 뭐야 대체!!!

소년 : 나도 모르겠..

 

소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장은 소년에게 다가가 손을 휘둘러서 뺨을 때린다.

 

회장 : 못난 놈. 아들일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비서는 놀라지만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놓인 물티슈를 뽑아 회장에게 갖다 준다.

 

회장 :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넌 잠자코 이 방안에 있어 앞으로. (관객을 보며)넌 이제 소수자야. 죽은 듯이 있으란 말야! 알아들어!? 아니지..아니지…이번 기회에 한번..

 

<암전>

 

조명이 다시 들어온다. 회장은 책상에 앉아있고, 아들은 소파에 마스크로 볼을 가리고, 입을 막은 채 앉아있다.

 

따르르르릉. 전화벨 소리와 함께 적막이 깨진다.

 

회장 : (전화를 받고) 들어오시라 그래.

 

비서가 두 남자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다.

 

회장 : (반갑게 맞으며) 들어들오세요. 오랜만에 뵙는군요.

소속사 대표 : 네 안녕하세요. 윤회장님. 잘지내셨습니까.

디자이너 : (팔 붙잡으며)회장님!!보고싶었어요!!

회장 : 하하. 여전하시군요. 일단 자리에들 앉으시죠.

 

아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다.

 

소속사 대표 : (아들을 가리키며) 이 분은 누구시죠?

회장 : 하하 제 아들놈입니다.

세희 : 안녕하세요. 윤세희라고 합니다.

 

디자이너는 아들을 요리조리 살피고 아들은 고개를 떨구고 시선을 계속 피한다. 

 

회장 : 요즘 대표님 소속사 연예인들이 아주 잘 나가던데요.

소속사 대표 : 다 회장님 덕분이죠. 내년에도 저희 아이들 믿고 광고 맡겨 주시죠.

회장 : 그럼요. 광고만 맡기겠습니까. 이번에 승마 관련 영화에 저희가 투자를 하는데 그 쪽에도 한 번 말해두죠. 이번엔 정부에서도 투자하는 영화니.

디자이너 : 정부에서요?

소속사 대표 : 각하와 친분 있으시다는 소문이 사실…

회장 : (말을 자르며) 그건 말 그대로 소문이죠. 그 소문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여러분의 자유지만. 여러분이 믿는 대로 보일 것이고, 보이는 것이 진실 아니겠습니까. 그 우주만큼 광활한 자유 속에서.

디자이너 : 그런데 그 영화에 왜 투자하시는 거에요? 승마영화 재미 없을 것 같은데.

회장 : 재미라..재미보단 역사적인 영화가 될 겁니다. 저희는 그 영화에 말을 지원해주기로 했죠. 그리고 제가 투자를 하는 이유는 바로 여러분들을 오늘 이 곳에 모신 이유와도 연결되지요.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회장이 비서에게 손짓을 하자 비서가 장갑을 끼고 세희의 마스크를 벗기려고 한다.

 

회장 : (비서가 장갑을 끼는 동안) 그 이유가 다 이 놈 때문입니다. 그것도 바로 이 마스크, 정확히 말하자면 마스크가 가리고 있는 어두운 진실 때문이죠.

소속사 대표 : (비서에게)잠시! 저희가 이 진실을 목격한 후에, 그 후에 해야 할 역할을 미리 말씀해주시죠.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진실이 아니라면 전 듣지 않고, 보지도 않겠습니다. 때론 눈이고 귀고 막고 사는 게 편할 때가 있죠.

회장 : 하하. 역시 그 자리까지 올라가신 분 다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칼같으셔라. 그 칼로 꽤나많이들 짓밟으셨겠어요. (생글생글 웃으며)허나, 대표님이 소속 연예인들을 생각하신다면 그 진실이 무엇이든 일단 들으셔야 할 겁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는 디자이너.

 

디자이너 : (계속 둘의 눈치를 살피며) 저…회장님? 저도 이 진실을 마주했을 때 도와드릴 게 있는 건가요?

회장 : 네. 그럼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두 분께서 담당하실 겁니다. (비서에게 손짓하며) 계속해.

 

비서는 조심스레 세희의 마스크를 벗긴다.

 

디자이너 : 꺄악

소속사 대표 : 아니..아니 이게 뭐죠. 뭡니까 대체!!

 

회장 : (눈을 부릅뜨며) 뭐긴요. 바로 돈입니다. 돈!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석이죠. 이걸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바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이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석을 사기만 해서는 본인들이 잘 나간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딱 그 수준에 머무를 거예요. 맨 꼭대기가 아니고선 결국 그들이 뿌려놓은 페로몬을 졸졸 따라가며 경쟁하는 개미들이나 다름없죠.

 

디자이너 : (어리둥절하며)그게 무슨 말이에요?

회장 : (디자이너와 소속사 대표 뒤로 가서 그들의 어깨를 잡으며) 쉽게 말해서 가치를 만드는 겁니다. 페로몬을 직접 뿌리는 거죠. 저 얼굴에 난 어두운 원을 통해!!

 

소속사 대표 : (숨을 몰아 내쉬며)하..어떤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원의 정체가 뭐죠? 질병이라든지 바이러스라든지 혹은 돌연변이라든지. 의학적인 검사를 받으신 상태인가요?

회장 : (책상에 걸터 앉으며)그 부분은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은 진실보다 사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대표님. 제가 만들어내는 사실을 정보화시켜서 곧 전달 드리겠습니다. 만약 거절하신다면 지금처럼 제가 뿌리는 정보를 주워가며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오시면 됩니다. 그 앞에 뭐가 놓여있는지 모른 채.

디자이너 : (머리를 싸매며)아아! 도대체 무슨 얘기예요!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저보고!!

회장 : 네 그럼 이제 빠르게 전달 드리죠. 너무 시간을 허비했군요. 곧 학계에서 저 원에 대한 연구결과가 나올 것이고 새로운 ‘가치’가 탄생할 것입니다. 그 전엔 어디에도 없던.

소속사 대표 : 근데 그 결과가 부정적이면 어떡하죠?

디자이너 : 아진짜 질문이 뭐이리 많아요. 

회장 : 대표님! 절 과소평가하시는군요 하하. 진실은 중요치 않습니다. 사실을 만들어서 진실로 전달하면 그만입니다.

디자이너 : 네네. 그래서요?

회장 : (디자이너를 가리키며)어두운 원을 이용한 의류를 디자인해주시고 또 그 옷들을 소속 연예인에게 입혀주시면 됩니다. 그거면 끝입니다. 쉽죠?

디자이너 : (어리둥절하며)저 그러다가 매장당해요! 아직 매장 몇 개 열지도 못했는데 내가 먼저 매장당하게 생겼네. 그건 아무리 윤회장님 부탁이어도…

회장 : (말을 끊으며) 일단 그렇게만 해주시면 뒤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미 언론과 학계엔 연락이 들어갔습니다. 그 발표가 나고 나면 돈 냄새 맡은 지렁이들이 우후죽순 밟힌 줄도 모르고 신나서 꿈틀대기 시작할거예요. 여러분들이 그 지렁이들을 밟을지 아니면 좋다고 꿈틀거리는 지렁이들이 될지 그건 여러분의 몫입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소속사 대표 : 그럼..회장님만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근데 홍보는 누가 담당해주시는 거죠? 언론에 여론이 따라오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불안하네요. 너무나 기이하지 않습니까. 전혀 새로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인데.

회장 :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게 이것뿐이던가요. 대중들의 상상은 깨지라고 있는거죠. 그게 나쁜쪽이든 좋은쪽이든. 우린 그들에게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겁니다. 더 상상하라고!

디자이너 : 근데 너무 소수 아니에요? 아드님 한 명빼곤 아무도 없으면, 막 소수는 말이없다 그런 얘기하잖아요.

회장 : 소수도 소수 나름이죠. 다수는 소수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들보다 약한 소수는 짓밟으며 권력을 유지하죠. 태초에 권력은 소수로부터 나옵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수는 그들보다 약한 소수들을 억누르기 바쁘죠. 저흰 이 어두원 원을 그 꼭대기의 소수에 올려놓으면 그만입니다. 그들보다 강한 소수에. 

디자이너 : 아하! 저 신나요. (자리에서 일어나며)돈 들어오는 소리들린다~이제 이 바닥 뜰 때도 됐지. 이제 이름으로만 먹고 살 때가 오겠구나!

소속사 대표 : 저 회장님? 근데 그게 아까 그 영화와는 무슨 관계인 거죠?

회장 : 네 잘 물어보셨습니다. 지금 저 원에서 세포를 추출해 내서 말에게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저 원으로 둘러싸인 말들이 생겨날 겁니다. 느닷없이 제 아들로부터 그 원이 출발하면 거부감이 따를 테니깐요. 자연에서 먼저 발생한 것처럼 보도가 나갈겁니다. 곧 그게 진실이 되겠죠.

디자이너 : 그 보도가 나가면 저는 미리 준비해놓은 디자인들을 바로 쏟아내는 거고!

회장 : 네 맞습니다. 이제 감을 잡으셨군요. 그리고 그 보도에 이런 워딩이 따라 붙겠죠. ‘진화’! 동물들 중엔 말, 인류에선 바로 제 아들이 그 진화의 시발점이 될 겁니다. 여러분이 그 진화를 이끄시는 겁니다.

소속사 대표 : 근데 왜 하필 말이죠?

회장 : 말은 예로부터 민간 무속신앙에선 말을 무신으로 여기고 쇠나 나무로 말 모양을 만들어 수호신으로 삼기도 했죠. 말을 제왕출현의 징표로서 신성시했으며 초자연적인 세계와 교통하는 신성한 동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기존에 이런 말의 무속적으로 신성한 이미지와 ‘희망’을 연결짓는 겁니다. 또한 에오히푸스부터 에쿠스까지 과학적으로도 말 무리만큼 그 진화과정이 잘 알려진 동물도 별로 없죠. ‘희망’과 ‘진화’ 두 키워드를 내포하는 동물이 바로 말입니다.

비서 : 풉 (눈치없이) 그냥 도련님이 말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하하하하

 

지나칠만큼 박장대소하는 비서. 비웃는건지 웃는건지 헷갈린다. 그러다가 문득 분위기를 파악하고 웃음을 뚝 그치자 앉아 있던 세희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소속사 대표 : (헛기침을 하며)흠흠. 근데 저 어두운 원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디자이너 : 그러게 뭐가 좋을까나. 대단히 의미 있는 거나 크리에이티브한거 붙여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 때 죽은 듯이 앉아 있던 세희가 손을 든다.

 

세희 : 저…..이왕 이렇게 된 거 제 이름을 이용해서 지어주시면 안될까요? 화석이나 원소 같은 거 보면, 발견하는 사람 이름 붙이던데. 듣자하니 어차피 제가 굉장히 가치 있어지는 거 아닌가요?

디자이너 : 으휴. 누구 아들 아니랄까봐

회장 : 방금 뭐라 하셨죠?

디자이너 : 아니, 아니에요 하하. 맞지맞지. 의미는 나중에 붙이면 되는 거잖아 하하.

소속사 대표 : 흠, 세희, 세희, 세희. 희세.. 섹 어떨까요. 흰 섹.

회장 : 뭐 이름이야 중요치 않지만 이름을 만든 이유는 너 말대로 니 이름 갖다 붙이기엔 아직 가치가 없는 상태라 안돼. 그래도 일단 흰 섹으로 해두지. 그럼 저 새로 나타난 걸 ‘섹’이라 하고 저 어두운 ‘섹’을 ‘흰 섹’이라고 하죠. 교수님들도 이름 짓느라 고생하는 것 같던데 아주 좋아하겠구만.

 

 이 때 또다시 울리는 전화벨. 따르르릉. 비서가 전화를 받는다.

 

비서 : 회장님. 지금 가시면 됩니다.

회장 : 자 그럼 저랑 만나뵐 분이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디자이너 : 누구요?

회장 : (디자이너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시면 압니다. 아. 아까 대표님이 말한 소문을 검증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군요.

 

 회장을 선두로 해서 일렬로 문을 향해 가고 회장이 먼저 문을 빠져나간다.

 

소속사 대표 : (혼잣말)이거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그래 자본만 보고 가자. 근데 저사람은 어디까지 영향력이 있는거야.

 

 이어서 소속사 대표도 문을 빠져나간다.

 

디자이너 : (혼잣말) 정보, 정부, 자본…저 사람, 사람은 맞겠지? 진화니 뭐니 진짜 자기가 신 인줄 아는 거 아니야? 아 몰라 난 자본에 지배당할래.

 

 말을 마치고 디자이너도 문을 빠져나간다.

 

비서 : (한숨을 크게 쉬며)하..도련님 괜찮으세요?

세희 : (정면을 바라보며) 아저씨, 저 무서워요.

비서 : 네 지금 이 새로운 상황을 안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안 그래도 회장님도 두려움을 이용해서 조종하려는 전략을 이용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뭘 그렇게 오버를 떠시는지. 이게 다 도련님 위해서라고요.

세희 :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저를 위해서라고요? 그럼 저는 이제 뭐가 되는 걸까요.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진실에 따라 저는 진화한 인류가 되는 걸까요?

비서 : (혼잣말)아니 또 왜저래. 괜찮으세요 도련님?

 

 비서는 세희에게 가까이 가서 눈 앞에 손을 위아래로 흔든다.

비서 : 그래요. 많이 놀라셨겠죠. 좀 쉬세요 도련님.

세희 : 저 지금 쏟아지는 소나기에 정수리가 적셔진 기분이에요. 그것도 아주 억수같이 퍼붓는 어쩔 수 없는 소나기요.

비서 : 네?

세희 :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세상이 온 몸을 짓밟고 있는 것처럼 숨은 들어오는데 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겠고, 정신 없이 휩쓸린 몸과 옷을 말릴 걱정에 더러운 쓰레기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아 하늘이 원망스럽고, 이 소나기가 언제 그칠 건지 한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 두려워 차라리 외면하며 손으로 눈을 가리기도 하죠. 내 계획 속에 없던, 선택하지 않았던 그런 어쩔 수 없는 소나기. 마치 제 선택과 상관 없이 제가 이 세상에 나온 것처럼.

비서 : 그래서 지금 기분이 더럽다 뭐 쓰레기같다. 이런 얘길 이렇게 길게길게 돌려 하시는 거 맞죠?

세희 : 아니요. 이후를 생각하면 불안해서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인데. 그 소나기를 맞는 순간만큼은 짜릿해요. 갑작스레 맞닥뜨린 소나기에 사람들이 오갈 데 없이 거리를 헤매고 있어요. 그 때 잠시 눈을 감고 그 아수라장에서 이 소나기가 피부에 스며드는 그 감촉에만 집중했을 때 느끼는 짜릿함이 있어요. 지금 그 짜릿함이 느껴져서 흥분돼요. 이 비가 나만을 위해 내리는 것만 같고.

 

비서가 뒷걸음질 친다.

 

세희 : 그리고 나중엔 ‘흰 섹’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디선가 거센 빗소리가 들린다. 기존의 모든 가치, 질서를 무너뜨릴 만큼, 없었던 것처럼 씻겨 낼만큼 거센 빗소리. 비서는 세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세희의 시선이 놓인 곳을 같이 바라본다.

 

<암전>

 

빗소리가 그치며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상수에서 한 명씩 모델들이 ‘흰 섹’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나와 무대를 런웨이 삼아 가로로 가로질러 하수로 들어간다.

한 명이 들어가고 두번째 모델이 나와 무대 중앙에서 포즈를 잡고 있을 때 전체 조명이 어두워지며 음악 소리는 서서히 약해진다. 핀 조명으로 하수 쪽에 등장한 마이크를 잡고 서 있는 기자를 잡는다. 모델은 계속해서 포즈를 취한다.

 

기자 : 몇달 전부터 말의 몸에서 어두운 원이 발견된 이후로 연일 실시간 검색 1위를 차지하는 등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진화의 현장을 목격하여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세상에 희망을 준 다는 의미를 담아 ‘섹’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었고 어두운 원을 ‘흰 섹’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동물을 넘어서서 인류에게도 세상에 희망을 가져다 주는 진화의 씨앗인, ‘흰 섹’을 지닌 인종이 탄생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상 CSS 김승연이었습니다. .

 

기자가 퇴장하며 음악소리는 처음보다 더 커지며 모델 의상에 그려진 ‘흰 섹’ 무늬는 점점 더 과감해지고 점점 더 넓은 영역으로 ‘흰 섹’이 오염되고, 그 옷들을 입은 모델들이 등장했다가 퇴장한다.

 

<암전>

 

조명이 다시 들어오고 세희가 소파에 앉아있고 비서가 그 옆에 서있다. 세희는 이전과 다르게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다. 비서와 세희의 의상이 바뀌어 있다.

 

비서 : 도련님 벌써 두달이 지났네요.

세희 : 벌써 그렇게 됐나요.

 

조명이 들어옴과 동시에 상수를 통해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검정색(극 중 흰 섹)의 페인트를 벽에 바르기 시작한다. 바른다기보단 던지듯이 흰 섹으로 기존의 모든 걸 더럽히듯이. 그는 처음에 등장했던 내레이터와 같은 인물로서 다른 인물에게 보이지 않는다. 벽에 ‘섹’을 그린 후 그다음엔 ‘흰’을 그리며 ‘흰 섹’이라는 단어를 전달한다. 또한 몸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한다.

 

비서 : 얼룩말부터 시작해서 고양이를 비롯해서 다른 동물들까지 지금 난리가 났어요. 전부 흰 섹으로 점철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세희 : 이제 저도 곧 있으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겠죠?

비서 : 그럼요. 봐봐요. (옷을 가리키며) 제 옷도 도련님의 흰섹 원과 같은 원들을 달고 있잖아요. 이젠 옷뿐만 아니라 얼굴에 흰 섹을 그리는 화장품들도 줄을 지어서 출시되고 있다고요.

세희 : 그럼 이제 제 역할은 뭘까요?

비서 : 네?

세희 : (비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제가 그 흰 섹의 창시자이자 주인으로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비서 : 이제 공개되어도 세상의 비난을 받지 않겠죠. 그럼 된 거 아닌가요?

세희 : 그건 당연한 거고요. 이미 세상은 달라지고 있어요. 지금의 가치 체계에선 제가 새로운 인간, 신인류가 되면서 ‘인종’이라는 개념도 생길 수 있는 거잖아요. 전 너무나 두근거려요. 제가 어떤 것까지 할 수 있을지.

 

 세희의 말이 시작하면서부터 페인트 공은 ‘My precious’를 벽에 쓴 뒤 골룸(반지의 제왕 캐릭터)처럼 뛰어다닌다. 다시 그 위를 칠하며 지운다. 

 

비서 : (책상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듣기만 해도 무서워요. 기존의 가치들은 이제 다 심해에 가라앉는 보물선 신세가 돼버리는 건가요.

세희 : 보물선이요? 하하 그냥 고철덩어리가 되는거죠.

비서 : 아니요. 언젠간 또 다시 가라앉은 선박이 담고 있는 물건들이 부상하는 날이 올 거에요. 도련님 말씀대로라면 가치란 영원한 게 없는 거잖아요.

세희 : 그렇겠죠. 그래서 다시 못 올라오게, 부셔버리고 짓밟아버려야죠.

 

 페인트공이 ‘zombie’라는 글씨를 적는다. 좀비 흉내를 낸다.

 

비서 : 도련님, 점점 회장님 쏙 빼 닮아가시는 것 같아요. (가슴을 탁 치며)뿌듯합니다!

 

따르르르릉. 전화 벨이 울리고 비서가 급하게 뛰어가서 받는다.

 

비서 : (수화기를 받으며)네 회장님. 예 알겠습니다.

세희 : 뭐라세요?

비서 : 아 이제 들어오신답니다.

 

 회장을 선두로 하여 들어오는 CSS(방송국) 회장.

 

회장 : 아 인사드려라. CSS 회장님이시다.

세희 : 안녕하세요. 윤세희라고 합니다.

CSS 회장 : 네 반갑습니다.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보니 저도 확실히 자연산이 다르군요.

세희 : 자연산이라는 표현은 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만.

CSS 회장 : 하하, 농담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회장 : 인사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자 앉으시죠.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아들을 보도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군요. 벌써 찌라시가 돌고 있으니 이러다가 다른 데 특종 뺏기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겠어요.

CSS 회장 : 그럼요. 지금 아드님이 혜성같이 등장하실 때 종교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라니까요. 하하.

세희 : 종교요?

CSS 회장 : 지금 저희가 만들어낸 여론은 세희씨를 인류의 희망,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새로운 인종!!으로 볼겁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으로 추앙받아도 지나치지 않을 분위기가 형성돼 있죠.

세희 : 누가 만들어냈다뇨? 어쨌든 ‘흰 섹’은 제가 만들어낸건데.

회장 : 그만. 널 구해주시는 분이야. 그 흰 섹이 너에게 독이 돼서 혀들이 모여들어 너에게 불을 붙였을거라고. 잠자코 가만히 있어. 마스크는 왜 착용 안한거니.

세희 : 더 이상 제가 숨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세상이 절 원하니까.

회장 : 입 다물어! 지금 무슨 말버릇이야. 김비서 세희 좀 데리고 나가 있어.

 

비서가 세희를 데리고 나가고 문 밖에서 실랑이를 살짝 벌인다.

 

비서 : (마스크를 건네며) 마스크 쓰고 가세요 도련님.

세희 : (마스크를 쓰려다가) 됐어! 집어치워!

 

세희는 마스크를 문 앞에 던지고 상수로 퇴장. 비서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온다. 이 때 페인트공은 ‘상실’이라는 단어를 벽에 적는다.

 

회장 : 요즘 집에만 갇혀 있다보니 많이 피곤한가 봐.

CSS 회장 : 아닙니다 회장님. 허허. 저 나이 땐 다 저렇죠.

회장 : 둘이 있을 땐 그냥 선배라고 불러. 김비서 나가봐.

 

비서는 다시 방을 나가고 문 밖에 서서 엿듣는 척을 한다.

 

CSS 회장 : 네 선배! 잘 지내셨죠? 정신 없으시겠어요 요즘.

회장 : 정신 있던 적이 없어서 괜찮아. 방금 세희 행동은 못 본 걸로 해줘. 저 나이 때 다 그럴 순 있지만 내 아들이 그럴 순 없지.

CSS 회장 : 네 하하. 제 특기가 기억상실인거 잊으셨습니까.

회장 : 하여간 말은 잘해요.

CSS 회장 : 어제 기사는 보셨는지요. 아드님이 등장하실 때 밟을 레드카펫을 깔아놓는 아주 섹시한 꼭지였습니다.

회장 : 응 잘 봤어. 그런데 야마에 굳이 말의 이야기를 넣었어야 했나. 세희를 소개하는 꼭지는 야마에 ‘진화’ ‘희망’ 그리고 ‘인종’이라는 단어를 하나씩 사용해서 각기 다른 꼭지로 만들어줘.

CSS 회장 : 네 알겠습니다. 저희 애들은 항상 총맞을 준비가 돼있다고요. 근데 아드님 이름은 직접적으로 거론하라고 지시할까요?

회장 : 오오 그건 안되지. 기업이름은 거론하되 아들의 직접적인 이름은 거론하지 말아줘.

CSS 회장 : 왜요?

회장 : 공개하지 않으면 아래에서 알아서들 파고 올라올게 뻔하잖아. 숨겨진 것을 파내야 그걸 대단한 것처럼 생각할거야. 아, 그리고 조심할 부분은 그렇다고 행여나 존칭을 사용하지도 마. 대중의 반감을 살 수가 있으니.

CSS 회장 : 키야. 역시 오늘도 선배한테 한 수 배워 갑니다. 선배 근데 들리는 소문에 이번 창평올림픽을 흰섹을 메인 테마로 만들어서 기획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거기 문화 기획쪽도 선배가 관리하는 거 맞죠?

회장 : 그 부분은 내가 직접적으로 관리하고 있진 않아서 물어봐야 되는데. 근데 아마 맞을거야. 만약 맞다면 그 때까지 여론이 흰 섹에 우호적이어야 되는데. 잘 할 수 있지?

CSS 회장 : 그럼요. 그런 거야 저희가 항상 하는 일인데 염려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요즘 단독 없어서 그거 단독으로 써볼까 했는데 안 되겠네요.

회장 : 아직 안돼. 찌라시 돌면 일단 전면 부정하는 정부 발표 나갈 거야. 그리고 나서 흰 섹이 지니는 희망 이미지가 구축되면 그 때 기획했다고 말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CSS 회장 :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단독으로 나갈만한 거 뭐 없을까요? 예를 들면 기존의 ‘섹’에도 이름을 붙인다든지.

회장 : 그건 아직 성급해. 흰 섹이 안정된 위치를 차지할 때까지 기다려야 돼.

CSS 회장 : 그건 또 왜요? 아아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까봐 그렇죠.

회장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이제 뭘 좀 아네.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위가 될 수 있으니 아직 위험해. 허울 좋은 공존이라는 말이 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흰 섹이 기존의 섹을 묶어 놓고 있을 때, 그 때 명명해도 늦지 않아. 아 그리고 하나 안 그래도 말해주려고 했어.

CSS 회장 : 어떤 거요? 저 이번에도 저번처럼 기대해도 되는 거죠?

회장 : 풉. 내가. 우리 아들 단독인터뷰 시켜줄게. 다른 데랑은 인터뷰 안 할거야. 

CSS 회장 :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말요? 감사합니다!! 역시 선배사랑 나라사랑 아니 나라가 선배니까, 모르겠다 그냥 선배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회장 : 적당히 하세요. 뭘 그런걸 가지고. 난 전달할 거 다 끝났어. 혹시 할 말 있어?

CSS 회장 : 제가 뭘 있겠어요. 아, 최근 만들어진 법이 이런 거 잡는 법이라던데 그 부정뭐더라. 부정청..

회장 : (말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가며)너도 참 한심하다. 이미 거미줄로 사방팔방 연결된 거미들이 굳이 자기 집 망가뜨리면서까지 상대방 죽이겠니. 그 줄 끊어지면 다 죽어 이 바닥 사람들. 손해보고 싶어하는 사람 없다 이 세상에.

CSS 회장 : 네 그럼 회장님, 아니 선배만 믿고 가겠습니다.

회장 : 그래 가봐. (수화기를 들고) 김비서!

 

비서가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다.

 

비서 : 네 회장님.

CSS 회장 : 어 왜?

회장 : 너 말고, 아니 CSS 회장님 말고 저 말한 거 아니겠습니까.

CSS 회장 : 하하. 장난입니다 장난. 이거 원 회장말고 그 위에 다른 칭호를 하나 또 만들어야겠는데요. 대장 어떻습니까 대장. 하하.

회장 : 네 안녕히가세요.

CSS 회장 : (헛기침하며) 아 네 그럼 이만.

 

CSS 회장은 방을 나가고 비서와 회장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들리지는 않는다. 회장은 방을 나가다가 방 문 앞에 떨어진 마스크를 줍는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상수로 퇴장한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핀조명이 기자를 비춘다.

 

기자 1 :  진화에 방아쇠를 당기는 흰 섹이 드디어 인간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그 희망의 전도사는 대기업…(인이어를 만지며) 네. 네. 속보입니다! 신인류의 길을 개척한 사람이 총 네 명으로 확인 됐습니다. CSS 방송사 회장의 아들이 그 첫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유명 디자이너와 얼룩말 유전자 연구원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기업 GH그룹 회장의 아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계층에서 희망의 상징이 발견되어 이는 신의 계시라는 평가가 따르고 있습니다.

 

기자 2 : (기자1의 말이 끝나기 직전에) 이번 선거 결과가 예측을 빗나감에 따라 1급 공무원 내에서도 용퇴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급격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매번 정권에 따라 능력보다 이념이 우선시평가 받는 관료사회에 시급한 해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뒤바뀌는 인사가 급변하는 사회에 발 맞추기 위한 관료사회의 노력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CSS 이재용입니다.

 

조명이 밝아지고 책상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회장이 보인다. 비서가 이를 말리고 있다. (페인트공은 이 때 등장하지 않는다)

 

회장 : 하하하하. 그래 내가 용퇴해주지. 이 자린 이제 누가 꿰차려나. 난 그래도 아직 자본이 남았어! 그래. 그 새끼는 알고 있었을거야. 이 배은망덕한 새끼 후배라고 챙겨줘서 키워줬다니 주인을 못알아보고 이 개새끼가 주인 발을 물어? 내가 얼마나 그 동안 정보를 많이 줬는데!!! 이게 바로 줄을 갈아타?

비서 : 진정하세요 회장님!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후…하…

 

이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던 세희가 입을 연다.

 

세희 : 저는 어떡하죠

회장 : 뭐!

세희 : 저는 어떡하냐고요! 저 같은 사람이 또 있다잖아요!

회장 : 넌 흰섹에 맞춰 살아가면 되지. 내가 그 자리에 앉혀줬어. 넌 손가락질을 받으며 길에선 돌을 맞으며 연신 마녀사냥을 당해 인터넷 상에서 화형을 당했을거야. 그런데 니가 지금 나한테 불만을 토로해?

세희 : 다 어머니 닮은 덕분이죠. 1등과 2등이 같아요? 1등만 알아주는 거 알잖아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2등은 없지. 1등 밑은 없어. 다 똑같다고!!! 다른 사람은 저보다 훨씬 흰섹점이 많다잖아요!! 빨리 더 만들어주든가 해!

회장 : 내가 널 낳았어. 이건 너의 선택이 아니었지. 그래서 난 일종의 책임을 진거야. 그래서 널 보호한거지. 그렇다고 내가 지금 너의 요구를 들어줘야 되니. 난 너의 보호자일뿐이야. 그 이상은 너가 알아서해. 권리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야. 너가 나한테 요구할 권리는 끝났어. 내가 널 낳았다고 모든 걸 책임질 의무도 이유도 없어!

세희 : (책상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 던지며) 듣기싫어요!!!

 문밖을 뛰쳐나가다가 검은 페인트통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쏟아 붇는다.

세희 : 내가 주인이야!!내가 만들어낸거야!!!내가 흰섹의 주인이라고!!!내가 바로 유일한 신인류야!!!!!!

 

세희가 상수로 퇴장하고 비서와 회장만이 무대 위에 남아있다. 회장이 다리의 힘이 풀리며 쓰러지려고 하자 비서가 회장을 부축하여 소파에 앉힌다.

 

회장 : (긴 한숨을 내쉬며) 자넨 자식 낳지 말게.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우린 받쳐줄 수 없어. 항상 내일도 오늘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며 살지. 근데 그 불안이 고스란히 내 자식에게 전달이 돼. 난 그 불안에서 그 자식을 꺼내주고 싶었어. 시대가 지나며 변하지 않는 물질이 있다면 바로 이 존재에 대한 불안이야.

비서 : 그 불안 덕분에 사회가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개인의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회장 : 그렇지. 그런 허울 좋은 말들을 붙이기들 좋아하지. 가치가 내 세대 안에서도 이렇게 휙휙 바뀌는데. 가진 만큼 더 불안에 떨지. 모순적이지 않나. 이 불안 덕분에 사회가 발전? 개인의 이익 챙기다가 우연히 사회가 발전하는 거겠지. 그렇게 내일의 가치가 부상하면 오늘의 가치는 쓸모 없는 것 이상을 넘어서 악의 존재가 돼버려. 그들이 밟고 일어나기 위한 발판이 돼야 하니깐. 내가 가진 건 이제 곧 자본 뿐일거야. 이 자본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기엔 다른 자본력이 등장해버렸어. 그들이 이제 날 갉아먹기 위해 달려들겠지. 그렇게 난 그들의 발판이 될거야. 그들이 새로 쓰는 정의에 필요한 악.

비서 : 회장님…정의의 반대말은 또 다른 정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회장 : 아니. 애초에 정의는 없어. 정의는 승리한 사람들이 휘갈기는 역사일 뿐이야. 그때그때마다 달라지지. 누가 바닥에 깔려있고 어떤 이들이 그들을 밟고 있는지에 따라서.

 

 회장이 자리에 일어나서 책상에 앉는다.

 

회장 : 난 시계를 보고 있었어. 일반인들은 시계의 부품들로서 하나의 세상이 작동하는데 제 역할을 다하지. 근데 그 시계는 결국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째깍째깍 바삐,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거야. 그 누군가에 내가 들어가 있었지. 근데 어느 순간 나도 시계의 일부가 됐고 난 그걸 몰랐어. 시계가 될 것이냐, 시계를 손목에 찰 것이냐. 이건 내 선택이 아니었던 거야.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도 한마리 물고기였던 거지. 나보다 강한 이빨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나도 그 안으로 휘말릴 뿐이야. 이 ‘섹’도 마찬가지일거야. 두 논리가 양립할 수 없듯이, 하나가 이기면 하나가 죽고. 공존의 세계는 없듯이. 곧 흰섹이 모든 걸 집어삼키겠지. 그런 날이 올 때까진 내가 살아남을 줄 알았어.

비서 :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떡하실 거예요? 모든 걸 잃으신 것도 아니잖아요!

회장 : 그래. 난 지금 권력을 잃은 거지. 그런데 권력이 나의 전부였어. 난 모든 것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야. 난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날거야. 자본이라도 지키려면 그게 살 길일거야. 숙청당하지 않으려면.

비서 : 세희 도련님도 남아있잖아요. 

 

회장 : 그래 세희가 남았지. 그게 걱정일 뿐이야. 세희도 곧 깨닫게 되겠지. 똑똑한 아이니깐. 가치가 역전되는 걸 몇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직접 경험했으니. 해수면이 상승하듯이 서서히 잠식해나가다가 결국 모든걸 삼켜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기존의 것들 것 전부 전복시킬 거야. 요즘 세상의 속도라면 멀지 않은 날에 도래하겠지. 더 이상 그 전복이 세희의 세상에서 또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암전>

 

검은 블라인드를 내려서 모든 배경을 검정색으로 바꾸고 소품에도 검은 천을 씌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섹으로 범벅된 남자 두명이 서 있다.

 

세희 : 오늘로써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도 벌써 사십년 째네.

비서 : 그러게요. 그 때만 해도 흰 섹의 원이 볼에 조그맣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난리가 났었는데 이젠 언제 검은 섹이 있었냐는 것처럼 세상이 흰 섹으로 가득 차버렸어요.

세희 : 그래..그 때 몇 달이었지만 불과 40년전…나의 일부이지만 그 경험은 지금 어디에도 없지. 역사 속의 산물이라며 장롱 안에 먼지가 수두룩하게 쌓인 이불이 됐어. 아무도 찾질 않지. 나의 일부인 그 경험, 그 세계를 찾지 않는다는 건 날 찾지 않는 것과도 같아.

비서 :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죠!..는 의미가 있다면 지나가지 않았겠죠?

세희 : 난 오감이 전부 사로잡혀 살고 있었어. 권력이 나의 모든 구멍을 틀어막았고 난 권력의 숙주가 돼버렸지. 권력을 실어 나르는 기계였던 거야. 철저하게 조종당했지. 그 때의 나는 없었어. 모든걸 권력에 넘겨주고 인간성을 상실한 상태였어. 마치 좀비와도 같았지. 하지만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도 여전히 밖을 내다보면 수많은 좀비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어. 물론 나도 살아남기 위해선 그들과 함께 서로를 물어 뜯고 있지. 강한 돌풍 속에서 간판들이 언제 내 머리를 강타할지 모르는 느낌 아나? 난 항상 그런 불안 속에서 살고 있어. 아무리 위로 올라가도 그 위엔 또 누가 있지 그렇게 계속 올라가다간 결국 그 속엔 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서 : 좀비는 자의식이 없겠죠. 회장님이 그 자의식을 지니고 상실감을 가끔씩이라도 느낀다는 것 자체가 회장님은 그 좀비들과 다른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거라고요.

세희 : 그런가. 애초에 좀비가 진화된 인류고 퇴화의 산물이 바로 이렇게 상실을 느끼는게 아닌가싶어서. 문득 어머니도 생각나서 괜한 감정이 올라오네.

비서 : 그럼 회장님을 반인 반수라고 하는 게 어때요. 하하 원하는 때에 맞쳐서 딱딱 변신하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겠네요. 하하. (헛기침)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차라리 좀비가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차라리 그들처럼 살아야 되는 상황이라면 현재를 지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세희 : 아니 그건 또 아니야. 그렇게 산들 결국에 상실을 느끼기 마련이지. 우리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난 그 결핍을 불현듯 나타난 흰 섹 덕분에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이야.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담는 내용은 다르지만 상실과 결핍을 잊고 산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지. 검은 섹은 잊혀졌어. 40년 전은 벌써 다른 시대가 돼버렸어.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그 해 여름의 무더위를 잊듯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검은 섹은 마치 단 한번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싸그리 지워졌어.

비서 : 그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죠. 전 두번이나 목격했다고요. 회장님, 아니 회장님의 회장님. 아니 회장님의 어머니이자 전 회장님. 후..아무튼 어머님이 도련님을 사랑하셨던 마음 그리고 또 하나.

세희 : 또 하나?

비서 : 제가 도련님, 아니 회장님을 곁에서 모시고 있잖아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없진 않다는, 기억 해야하는 것이 있다는 방증이죠 제가. 살아있는 역사라고 거창하게 말해볼까요 한번.

세희 : 그말인 즉슨 시대가 지나도 자본의 힘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는 건가?

비서 : 에이, 모든 인간 관계가 돈에 의한, 이해 타산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건 아니라고요. ‘인간애’라는 단어를 아실까 몰라. 아 물론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 월급이 오르지 않고 그대로라는 점을 보면 자본도 그대로네요.

 

따르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르릉

 

세희 : 아니, 나 말고도 여기에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비서 : 그러게요. 근데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봤던 것 같지 않나요? 아아 아가씬가봐요.

 (수화기를 들며) 네, 전화 받았습니다. 네 아가씨. 지금 계세요. 들어오세요. 네.

 

상수에서 빠른 걸음으로 양손으로 볼을 감싼 채 한 소녀가 등장한다.

 

아가씨 : 아빠!!! 나 큰일났어!!!

비서 : 무슨일이에요 아가씨.

아가씨 : (울먹거리며)좀 조용히 좀 해봐, (볼에서 손을 떼며)아빠 나 볼에 검은 섹 점이 났어.

 

아가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상수에서 페인트공이 문을 통해 방안에 들어온다. 그리고 검은 섹(실제론 흰색)페인트로 벽에 무한대를 나타내는 기호(처음엔 리본모양으로 시작해서)를 연속해서 덧칠하며 그린다.

 

세희 : (박수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 그럼 또 시작해볼까.

 

 조명이 꺼지고 무대 앞 쪽을 핀조명이 비춘다. 페인트공이 페인트칠을 멈추고 그 핀조명 안에 들어간다.

 

내레이터 : 네. 지금까지 보신 이 세계는 처음에 말씀 드렸다시피 가상의 세계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만약에 아~주 아주 아주 만약에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건가요? 어차피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이긴 하지만요. 어떻게 이런 흑 아니면 백의 세계가 존재하고, 기득권층이 대중들을 조롱하며 몇몇 사람들에 의해 가치가 만들어나가는 세계가 존재하겠어요. 말도 안되죠. 안 그래요?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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