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슈리글리 편 : 단순한 그림, 복잡한 풍자

데이비드 슈리글리(David Shrigley)의 작품은 인테리어 업체와의 활발한 콜라보 덕분에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한순간 찾아온 영감의 순간이나 뼈를 깎는 창작의 고통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예술가로서의 ‘준비과정’을 겪던 대학생 예술가 지망생 슈리글리, 그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하던 대로 하다 보니 예술가가 돼 있었다

‘데이비드 슈리글리 展’이 전시된 복층 구조의 지하전시장인 ‘현대카드 스토리지’는 여러 조소 작품과 함께 방대한 양의 스케치로 가득 차 있다. 스케치북 크기의 흰 종이에 검은 펜으로 동물이나 사물, 단조로운 모양새의 사람들을 그려낸 300여 장의 그림은 한 벽면에서부터 전시장 내부 계단까지 이어진다.
슈리글리는 대학 시절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막상 졸업한 뒤 정확히 무엇을 해야 예술가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졸업 후 조금씩 그린 그림을 모아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있는 그림들을 엮어서 소규모 책자를 찍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중, 슈리글리의 그림을 접하며 그의 그림이 쉽고 재미있다고 느낀 인쇄소의 한 남자가 그의 그림들을 자신의 갤러리에 전시하고 싶어 했다. 슈리글리는 그렇게 첫 전시를 하고 책을 출판하게 됐다. 
첫 전시가 열린 후 그의 그림은 빠르게 주목받았고 현대미술잡지인 『Frieze』의 표지로 실리기까지에 이른다. 그는 이것으로 인해 한 순간에 인정받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가 유명하다거나 성공한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해 왔던 일을 계속했을 뿐인데,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는 새 목표하던 예술가가 돼 있었던 것이다. 
대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번뜩이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해왔던 일을 계속 하는 것,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데서 성공의 씨앗이 탄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타조 박제 작품 「Ostrich」. 슈리글리 작의 대표격인 이 작품은 그의 역설적인 예술관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곳곳에 숨어 있는 풍자의 메시지, 
슈리글리의 작품

단순해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메시지의 공백을 스스로 메우게 만든다는 점에서 오히려 충만하다.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엉뚱하게 배치된 그림들과 덩그러니 놓여진 조소들을 보면 오히려 온갖 생각이 떠오르며 기분이 멜랑콜리해진다. 슈리글리의 작품들은 일상적인 사물의 재현에서 풍자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들이 그려져 있는 만큼 그 풍자는 만리타국인 대한민국까지 와서도 유효하다. 데이비드 슈링글리의 작품에 숨어 있는 블랙유머를 발견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되어 줄 것이다.
타조의 머리를 잘라낸 뒤 박제한 작품인 「Ostrich」는 슈리글리 전시의 마스코트와도 같다. 슈리글리는 동물을 박제한 작품을 다수 제작했고, 그 중 많은 작품은 머리가 없다. 세상에서 제일 큰 조류라는 타조가 머리를 잃고도 마치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듯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은 역설적인 만큼 우습다.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작품들 중 가장 독창적인 것은 「The Artist」일 것이다. 관람객들은 벽을 따라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색의 선과 원이 혼잡하게 뒤엉킨 그림인 「Drawing by the Artist」를 보게 된다. 그리고 전시장 동선의 끝에 다다르면 그 그림을 그린 장본인인 「The Artist」를 만나게 된다. 바로 로봇청소기이다. 검은 단발머리의 가발을 뒤집어쓰고 멍청한 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는 로봇청소기는 콧구멍에 펜을 꽂은 채 선과 원을 그려낸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탄생한 것은 혼란 그 자체다. 거리와 각을 재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다 벽에 부딪치고, 그러는 사이 선과 원을 그려내는 청소기의 행동은 계산적이고 예측 가능한 만큼 다소 멍청해 보인다. 검은 단발머리 로봇이 혼란스런 선을 토해내고 있는 모습이 새삼스럽게도 낯설지 않은 것은 착각일까. 

슈리글리는 인터뷰 영상에서 “남을 위해 작품을 만들면 남과 나 자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늘 나를 위한 작품을 만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커다란 목표를 좇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는 것만으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글 최서인 기자
kekecathy@yonsei.ac.kr
<자료사진 David Shrig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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