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 김지성 기자 (경영·12)

무력감.
지난 봄, 대학언론사의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이다. 온몸으로 밀어내며 글을 써봐야 바위 같은 부조리는 손톱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가 세상을 향해 힘을 갖는 것은 고사하고, 몇백 명에게 읽히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하는 자괴감마저도 종종 들었다.

훈수질.
흔히들 미약한 상태를 바둑에 빗대 미생(未生)이라고 표현한다. 바둑에서 집이나 대마가 완전하게 살아있지 못한 상태 말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미생이라는 비유조차도 과분했다. 바둑판에 돌 하나 놓지 못하면서 멀찍이서 아무도 안 듣는 훈수질이나 재잘거리는 것 같았다.

본령(本領).
지난 여름, 너무 식상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물었다. 저널리즘의 본령은 무엇인가. 식상한 자문(自問)에는 식상한 자답(自答)이 뒤따랐다. 저널리즘은 곧 공공서비스다. 돈벌이의 측면에서만 생각한다면 저널리즘은 수지 안 맞는 장사다. 품은 많이 들어가지만 삯은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공동체를 조금이나마 낫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변화의 출발점은 문제의 인식이고, 문제의 인식은 언론이 진실을 보도함으로써 시작된다. 때로는 진실된 보도를 접한 단 한 명의 독자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있다면, 기자는 써야 한다. 그것이 기자의 업(業)이다.

꼴에.
무기력했던 봄과 뻔한 고민을 껴안았던 여름을 지나 가을이 왔다. 그래도 꼴에 이제는 기자가 뭔지 알겠답시고 뛰고 썼다. 개중에 나름 기억에 남는 기사를 꼽으라면, 주은혜 기자와 함께 썼던 마을버스 기사들의 노동처우에 관한 기사,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유출 사태가 일어나고 썼던 고도원 前 청와대 연설비서관과의 인터뷰 기사를 들고 싶다. 서울 시내 온갖 골목길을 다 돌아다녔고, 주말을 반납하고 충청도 산골로 내려갔다. 기사는 나름 잘 빠져서 나왔다. 잘 읽었다는 독자들의 한 마디가 고마웠다.

장작 패기.   
그런데 그런 기사들 써서 세상이 뭐 조금이라도 바뀌었나. 전혀 아니다. 여전히 마을버스 기사들의 노동 처우는 바닥을 기고, 청와대 돌아가는 작태는 지금도 눈 뜨고 못 봐주겠다. 그렇다면 나는 또 의미 없는 훈수질이나 해댄 것인가. 그건 아니다. 나는 장작을 패서 독자들의 손에 쥐어줬던 것 같다. 당장 그 장작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독자들이 그 장작으로 불을 피우리라 믿으며 또한 소망한다. 미약한 내 기사가 한 마을버스 기사에게 버텨나갈 힘을 줬길 빈다. 그래서 싸움을 이어나갈 힘을 얻었길 빈다. 미약한 내 기사가 국정운영에 대한 한 청년의 분노를 자아냈길 빈다. 그래서 그 분노로 거리에 나갔길 빈다.

도끼날.
사회부에서의 기자 생활이 끝나간다. 이제 곧 있으면 사회부의 부장이 된다. 이제 글 쓰는 일이 아니라 글 쓰는 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동료 기자들이 세상을 밝힐 괜찮은 장작을 독자들에게 드릴 수 있도록, 이번 겨울에는 도끼날을 무던히 갈아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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