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휴학, 배움을 멈추고 저항을 배운다

정민기(철학·15)

무슨 말을 더 보탤까. 우리가 배우고 만든 것이 이 지지부진한 세계다. 우리가 믿고 지켜오던 가치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대통령은 헌법을 어겼고, 많은 부역자들이 그것을 도왔다.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여기에 말을 더하기도 힘들다. 그들은 단지 정치와 헌법의 질서만을 파괴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의 질서’를 파괴했다. 먹고 사느라 지쳤지만 열심히 살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우리는 지치도록 살아왔다. 그러나 이 믿음의 바깥에서, 어떤 이는 부당한 권력으로 말을 타고 법을 넘어 대학문을 밟았다. 그의 어머니는 권력을 부당하게 장악했다. 대통령은 이 모든 일의 몸통이었다. 말 대신 저항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을 관통하는 삶. 내겐 내 몸과 주변만큼의 공간이 있다. 광장의 촛불은 곧 내가 주권자로서 이곳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외침이다. 촛불 하나하나의 공간이 모여 만든 광장은 일상을 비-일상화한다. 먹고 살아야 만하는 생활의 공간에서 잠시 벗어난 비-일상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물을 수 있다. 그것은 생활에 대한 물음이며, 그 생활을 떠받치고 있던 권력에 대한 물음이다. 광장은 권력을 반성한다. ‘이것도 나라냐?’ 주말에 귤 까먹으며 쉬어도 될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드는 촛불은 그래서 저항이다. 
대학가에 ‘동맹휴학’ 결의가 확산되고 있다. 10일, 먼저 몇몇 학교가 동맹휴학을 시작했고 이는 꾸준히 확산 중이다. 촛불이 공간의 점거라면, 휴업은 시간에 대한 점유다. 무난히 지나갔을 생활의 시간이 멈춘 동안, ‘먹고 삶’의 시간과 그 시간을 장악하는 권력에 대해 물을 수 있다. 지역의 농민들이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올라오는 바로 그 긴 시간. 공간과 시간의 삶에서 사람들은 그 ‘살아있음’으로 저항한다. 부당한 권력의 앞에서, 먹고 살고 더 나아지려 노력하던 생활의 시간을 우리는 잠시 멈춘다. 생활의 시간을 생활로서 속박해왔던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삶을 멈춰 삶을 만든다.  
학생에게 휴업은 휴학이다. 지금 이 사태를 낳은 수많은 사람들 모두 ‘배운’ 자들이다. 휴학은 단지 강의실 바깥으로 나가 거리에서 항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배움’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다. 많이 배운 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가 이 지경이라면 학생은 배움의 의미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배움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반성하기 위해 학생으로서의 우리는 잠시 배움을 멈춘다. 이 세계에 물음을 던지고, 다시 바로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배움을 다시 묻는 일이다. 물음은 종종 강의 시간 밖에 있다. 
이 지지부진한 세계에 항거하기 위해 우리는 멈춰야하고, 거리로 나가야하고, 살아있음을 통해 다시 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저항이다. 강의실 바깥으로 나간다고 해서 학생의 본분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이기 때문에 나가는 것이다. 배움이 만들어 놓은, 만들어 놓을 세계에 대해 다시 묻기 위해 배움을 멈추는 것이다. 지금 여러 대학에서 추진 중인 ‘동맹휴학’은 그 거대한 저항이며 물음이다. 여기, 우리는 배움을 멈추고 저항을 배운다. 배움을 멈춰 배움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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