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백』,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말하다

1894년, 프랑스군의 유대인 장교였던 드레퓌스 대위가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그의 죄목은 간첩행위, 프랑스군의 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독일 대사관에서 나온 서류에 적힌 한 필적, 그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 유일한 증거였다. 프랑스군의 수뇌부는 드레퓌스가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를 얻었음에도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드레퓌스는 그렇게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지난 2013년 1월, 한국에서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탈북 화교 유우성씨가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는 것이다. 서울시청에서 탈북자 지원 업무를 맡고 있던 그는 국정원과 검찰로부터 탈북자들의 정보를 북한으로 넘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10월, 대법원은 유우성씨의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탈북자 유우성, 그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자백』(최승호 감독)은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의 과정을 면밀히 추적해 날것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준다. 

강압 수사와 자백
국정원의 유우성 간첩 만들기 1탄

▶▶ 영화 「자백」의 최승호 감독. 現 뉴스타파 PD. 前 MBC 『PD수첩』 PD

지난 2004년, 중국 국적이지만 북한에서 나고 자란 화교 유우성씨는 탈북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현행 법률은 중국 국적을 지닌 북한 화교에게는 탈북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북한 화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그 신분이 밝혀지면 탈북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박탈당한다. 유우성씨는 탈북 후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이 중국 국적임을 밝히지 않았다. 탈북 후 2년이 지난 2006년, 유우성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밀입북해 5일 동안 북한에 머물렀다. 물론 이는 실정법 위반이다. 이후 그는 우리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시청에서 탈북자 지원업무를 담당하는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남한 사회에 정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12년 10월, 유우성씨의 여동생 유가려씨가 탈북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탈북자들은 한국에 입국 후 국정원의 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를 받는다. 유가려씨 또한 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그녀가 중국 국적의 북한 화교임이 밝혀진다. 이때부터 유가려씨에게 오빠 유우성씨의 간첩혐의에 대해 자백하라는 국정원 수사관들의 회유와 협박이 쏟아진다. 발로 차고 때리는 등 폭력도 이어졌다. 영화 『자백』은 당시의 장면을 회고하는 유가려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오빠가 간첩이라고 자백하면
오빠와 같이 계속 한국에서 살 수 있다’

‘오빠가 2006년 말고도 북한에 들어가
보위부*의 지령을 받지 않았냐’

구금 상태에서 국정원 수사관들의 강압 수사를 견디지 못한 유가려씨는 결국 오빠가 북한 보위부의 지령을 받는 간첩이라고 허위자백을 한다. 최승호 감독은 “당시 유가려씨는 수사관들로부터 구타도 당했다”며 “변호사 선임권 등도 고지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자백은 두 남매를 옭아맨다. 마치 주인 모를 필적이 드뤠피스를 옭아맸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난 2013년 1월, 유우성씨는 국정원에 의해 체포·구속된다. 

증거조작
국정원의 유우성 간첩 만들기 2탄

객관적인 증거의 명백히 모순되는 부분이 존재하고 진술의 일관성, 함의성의 측면에서도 의문이 듭니다. 따라서 공소사실을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인정하기 부족하여 유우성 피고인의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합니다. 

지난 2013년 8월, 서울중앙지법은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하지만 국정원은 유우성씨가 2006년 이외에도 수시로 밀입북을 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은 그 증거로서 중국 공안당국의 유우성씨 출입경 기록을 검찰에 넘긴다. 그리고 2013년 10월, 이를 바탕으로 항소심이 시작된다. 그런데 2013년 12월, 영화 『자백』의 제작진은 국정원이 제시한 유우성씨의 출입경 기록이 위조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최승호 감독은 “출입경 기록은 우리가 유우성씨에 대한 취재를 통해 밝힌 사실과 맞지 않았다”며 “위조된 출입경 기록 문서 자체도 상당히 엉성했다”고 말했다. 국정원과 검찰은 증거는 위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2014년 2월, 중국 정부는 주한 중국대사관을 통해 국정원이 제시한 증거는 위조된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지난 2014년 4월,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또한 유씨의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2015년 10월, 법률심**인 대법원의 3심에서 유우성씨의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가 최종 선고됐다. 재판부는 유우성씨가 중국 국적을 숨기고, 한 차례 밀입북한 혐의에 대해서는 「여권법」과 「북한주민이탈보호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해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내렸다. 한편 증거조작에 가담한 국정원 직원들 중 과장급 직원 단 한 명만이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 직원들은 선고유예 판결을 받는 데 그쳤다. 최승호 감독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국정원은 철저한 상명하복의 집단이다”라며 “유우성이 간첩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결재단계에서 개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국의 정보기관이 간첩몰이를 위해 문서를 위조하고, 검찰은 이를 그대로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하는 2010년대 한국사회의 씁쓸한 민낯이다.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영화 『자백』의 마지막 엔딩크레딧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자행됐던 간첩조작 사건들이 수없이 이어져 나온다. 납북 어부 간첩, 재일동포 간첩, 학생 간첩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엔딩크레딧에 나오는 간첩조작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두 재심청구***를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최승호 감독은 “간첩조작사건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고자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어서 최승호 감독은 국정원의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서도 “간첩조작 사건의 동기는 예나 지금이나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을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내부통제를 하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간첩조작 사건으로 사람들은 자유로운 생각, 표현,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는

영화에는 1970년대 간첩조작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재일교포 ‘승효 할아버지’가 잠깐 나온다.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했던 그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으로 고통받는다. 승효 할아버지와 유우성씨 등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비극을 반복치 않으려면, 국정원의 개혁이 요구된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예산통제 ▲정보공개 ▲국정원 대공(對共)수사권의 검·경 이관을 쇄신책으로 제시한다.
먼저 예산통제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국회의 정보위원회가 국정원의 예산을 심사할 수는 있으나 구체적 세목에 대한 접근은 어렵다. 반면 미국 상·하원의 정보위원회는 CIA를 비롯한 정보기관의 예산을 항목별로 철저하게 검증한다.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오동석 교수는 지난 2013년 국회 ‘국정원 국회개혁특위’에서 ‘국정원 예·결산 심사의 비공개성을 유지하더라도 국회 정보위원회 차원에서는 예산항목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으로 정보공개의 경우. 미국 CIA는 비밀 해제된 문건을 주기적으로 공개한다. 하지만 국정원은 비밀 분류 현황 자체가 공개되지 않아, 비밀문건의 양조차 알 수 없다. 정보의 보안 가치가 없어지는 먼 훗날에라도 정보가 공개될 가능성이 있다면, 정보기관의 탈법적 행위는 조금이나마 억제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검찰·경찰로 이관하면, 정보 기능과 수사 기능이 분리돼 권력 집중에 따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과 군사적 긴장 관계에 놓여있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경우에도, 정보 기능만을 수행할 뿐 별도의 수사권은 가지고 있지 않다.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기관의 대(對)간첩활동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국정원이 권한 남용, 증거 조작 등 초법적인 행태를 보인다면, 국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국정원이 양치기 소년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면, 정작 국가의 안위가 위협받는 중요한 순간에 국정원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국정원의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쇄신이 필요한 이유다. 
 
드레퓌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1899년, 프랑스의 작가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나는 고발한다』라는 격문을 발표한다. 이 글은 프랑스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에밀 졸라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에밀 졸라는 진실을 향한 소신을 꺾지 않았고, 드레퓌스는 1906년에 결국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드레퓌스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영화 『자백』의 제작진과 같은 수많은 에밀 졸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 아닐까. 

*보위부: 북한의 비밀경찰 및 정보기관 
**법률심: 법원이 사건을 심판함에 있어서 법률문제에 대해서만 심판
***재심청구: 피고가 상소 기간이 끝난 후 자기의 무죄를 입증할 만한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여 다시 재판해 줄 것을 청구하는 것

글 김지성 기자
speedboy25@yonsei.ac.kr
사진 천시훈 기자
mr1000s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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