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번화가에서 한 사람이 길을 가다 갑자기 쓰러졌다. 당신이라면 아무 망설임 없이 선뜻 다가가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아마도 ‘다른 사람이 도울 거야’, ‘괜히 나섰다가 손해만 보겠지’와 같은 생각으로 방관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그보다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먼저 짚어보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The Y」가 방관자를 만들어 내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알아봤다.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사라졌다

지난 2015년 10월경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에서 한 아파트 경비원이 새벽에 출근하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CCTV 확인 결과 쓰러진 그를 동료 경비원이 발견할 때까지, 몇몇 시민들이 그 곁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비원은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위험에 처한 타인을 보고 돕지 않는 것은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 즉 ‘방관자 효과’와 관련이 있다. 이는 주위에 목격자가 많을수록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다. 구조를 필요로 하는 이를 봐도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이다. 번화가에서 사람이 쓰러져도 유독 구조하려는 사람이 적은 이유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남을 도우라고 가르치는 우리네 정서에 반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쓰러진 경비원을 방관한 이들을 처벌할 수 없다. 우리나라 법률에는 보호의무가 없는 자, 즉 피해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자가 그를 구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처벌할 수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응급의료법」이 적용될 수는 있다. 「응급의료법」 제5조 1항에는 ‘누구든지 응급환자를 발견한 즉시 응급의료기관 등에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처벌 규정이 없어 사실상 처벌하기는 어렵다.


도와주고 누명 쓰기
 

응급사태에 놓인 환자를 돕는 상황에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이 유독 자주 발생한다. 응급처치의 특성상 처치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흉부를 강하게 압박해야 하는 심폐소생술은 실행 시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질 확률이 높다. 실제로 계곡에 빠진 여성을 구조해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가 갈비뼈가 부러져 고소당한 남성의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2008년 6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개정됐다. 해당 법률 제5조의2에 따르면, 의료종사자가 아닌 일반인이 응급처치를 하다가 재산상의 손해나 사상(死傷)을 발생시킬 경우 그 책임이 감면 또는 면제되지만, 사망에 대해서는 완전한 면제를 받지 못한다. 심폐소생술을 해도 7-80% 가량의 심정지 환자는 사망한다는 통계를 볼 때, 이는 불완전한 규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법률상으로 구조의무대상에 해당하는 직업군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2013년 수원지방법원은 응급처치도중 환자가 사망한 사건에 대해 의사의 과실치사혐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유족에 대한 손해배상판결을 내렸다. 응급의료행위 도중의 우연한 사고를 고의적 과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검찰은 기소유예처분을 내렸으나, 재판부의 결정은 구조의무자에 대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는 불만을 야기했다. 이에 대해 우리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본과생 조모씨는 “(이 때문에) 많은 의대생들이 응급의료비중이 높은 외과, 산부인과 등을 기피한다”며 “의료과실에 있어 의사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지만 생명과 직결된 의료행위에 대한 법적 보상이나 처우가 확실히 미흡한 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한편 의인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도 많은 사람들이 방관자를 자처하는 이유다. 여기서 의인이란 지난 14일 화재현장에서 타인을 구하고 유명을 달리한 고(故)안치범씨와 같이 선의로 타인을 구하려다 도리어 피해를 입은 이를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의사상자를 지원하고 있지만 막상 의사상자로 지정되기까지 관할 지역, 시도청, 보건복지부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게 현실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 필요한가?
 

방관자와 관련된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의 제정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지난 6월 25일 새누리당 박성중 의원은 ‘위급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돕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골자의 구조 불이행죄를 발의했다. 하지만 이를 둘러싸고 사회적으로 각종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해당 법안에서 규정한 ‘위급 상황’이라는 표현이 애매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처벌받아야 할지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가해자를 제압하거나 남을 돕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힐 경우 이를 어디까지 허용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이렇듯 모호한 적용 기준 외에도 개인윤리의 법제화에 대한 거부감 등의 반대 목소리도 존재한다. 우리신문의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반대’ 응답자의 58.3%가 개인윤리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으며, 한 대상자는 ‘개인행동의 법제화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우리대학교 박상기 교수(법학전문대학원·형법)는 “도덕적 가치의 강제라기보다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연대적 의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그는 해당 법안의 등장배경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공동체 정신의 허약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전했다.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피해 보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종종 들어오던 말이다. 타인의 사생활에 간섭했다가 공연한 피해를 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리라. 하지만 동시에 ‘위험에 처한 타인을 도와야 한다’는 것도 도덕적인 상식이다. 방관자를 권하는 사회, 또는 남을 돕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사회.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고 싶은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글 장혜진 기자
    jini14392@yonsei.ac.kr
    최형우 기자
     soroswan@yonsei.ac.kr
그림 김은지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