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위작인 것으로 알려진「미인도」일 것이다. 천경자는 20세기 한국 회화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예술 인생은 불청객처럼 끼어든 위작 논란으로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남의 물감으로는 도저히 흉내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처연한 것이었다. 천경자의 화폭이 여인으로 채워진 배경에는 그녀의 20대, 꼭 우리와 같은 ‘이맘때’의 인생이 있었다. 천경자 작품의 주제의식을 결정한 그녀의 ‘이맘때’. 그녀의 20대는 어떤 시기였을까.

 

천경자의 혼을 엿보다

 

「미인도」에 관한 논란은 지난 1991년 천 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중 하나였던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미술관은 해당 작품이 천 화백의 작품이 맞다고 거듭 주장했다. 작가의 말보다 평론가와 전문가의 말에 힘이 실리는 한국 미술계의 풍토에 충격 받은 천 화백은 절필하고 미국으로 이민하기에 이른다. 안타깝게도 천 화백은 지난 2015년 별세했으나, 20년 넘게 이어져 온 위작과 진작 논란의 첨예한 대립 구도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천경자는 위작 논란을 겪은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도 굴곡 많은 일생을 살았다. 천경자의 그림에는 대개 여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힘든 삶을 산 천경자가 직접 그려낸 작품들과「미인도 」사이에는 온도 차가 있다.
천경자가 미술을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가족들은 ‘시집을 가거나, 공부하려면 의학을 택하라’며 반대했다. 그런 가족들을 설득해 가며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21세의 그녀는 귀국해 동경에서 만난 유학생과 결혼했으나 남편과는 갈등만을 빚었다.
22세의 천경자는 고등학교 미술 교사가 됐으나 남편과의 갈등은 그녀를 고통스럽게만 했다. 천경자 화백은 수필「진고개의 음향과 개인전」에서 둘째를 출산한 뒤 남편이 보낸 미역을 두고 ‘협박장 같아 가슴이 떨렸다’고 회상하고 있다. 집에 좀처럼 들어오지 않던 남편과는 결국 이혼했다.
학교 강당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던 천경자는 서울의 백화점에서도 개인전을 가지게 됐으나, ‘이혼녀’라는 신분은 그녀에게 주홍글씨가 됐다. 한 기자가 회장에 나타나 쏘아붙였다. ‘남편을 섬길 줄 모르는 고약한 여자의 그림을 시민들에게 보일 수 없다’고. 그녀의 나이 25세였다.

 

슬픈 청년기, 고통을 딛고 일어서다

▶▶그라나다의 두 자매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따뜻한 색조로 그렸다. 천경자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여행 중에 만난 타국의 여성들을 화폭에 담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의 상설전시인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展’에 전시된 30여 점의 그림을 살펴보다 보면 작가가 여인을 바라보았던 따뜻한 시선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그녀 자신의 삶에서 비롯한 공감의 시선일 것이다.
20대는 많은 이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어리다는 이유로 미숙함을 허락받는 나이다. 동시에 가치관과 인생관이 자리 잡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20대의 천경자는 결혼의 실패와 동시에 ‘이혼녀’로서 생활의 어려움과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경험해야 했다. 그런 젊은 때를 보낸 천 화백은 평생 여인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그녀에게 20대 시절이 어떤 의미였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있다. 28살 무렵 완성한「생태」 가 바로 그것이다. 그맘때의 그녀는 그야말로 인생의 여로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시기를 걷고 있었다.
당시 천경자는 개인전에서 만난 김상호(가명)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되었고, 아버지 없는 아이를 임신한 셈이 된 천 화백은 낙태하기 위해 황달이 올라오도록 말라리아약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랑하는 여동생 옥희의 결핵이 재발했다. 생활이 어려웠던 천 화백은 동생을 입원시킬 수도, 이렇다 할 약을 쓸 수도 없었다. 천경자 화백은 수필「유리상자 속의 꽃뱀」에서 ‘가난해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날 수 있는 순간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고 서술했다. 뱀을 그린 것은 오로지 ‘생(生)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고.
불행의 연속을 경험하고 있던 28살의 천경자는 광주의 한 뱀집에 드나들며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생태」는 전시회에 걸린 여느 그림과는 달리 무채색의 어두운 풍경을 보여준다. 그림 속에 거무튀튀하게 엉켜 있는 정체불명의 대상은 다름 아닌 35마리의 뱀이다. 어디가 꼬리이고, 어디가 머리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은 뱀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당시 겪고 있던 고통의 시기를 구체화한 것만 같다. 천 화백이 고통 속에 그려낸 뱀의 형상을 본 관람객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의 기록인「생태」는 그를 단숨에 유명 화가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이렇듯, 시커먼 뱀을 그리며 20대를 보낸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슬픔의 표현인「생태」를 계기로 주목받아 홍익대 교수직에 임용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이후 50년의 생애 동안은 과거의 절망에서 벗어나 그 내면에 응축된 슬픔을 외부로 치환했다. 
그녀는 꽃과 면사포에 둘러싸인 여인들의 모습을 거듭 그렸다. 여인들은 각자 환상적이거나, 초현실적이거나, 이국적인 모습으로, 화려한 색채로 드러난다. 그녀의 붓끝이 얼마나 섬세하게 여인의 목덜미를 스쳤을지, 얼마나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물들였을지, 붓터치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슬픈 시기를 지나온 후 평생 작품에 담아낸 것은 타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었다.

여인을 그린 천경자의 작품은 결코 단순한 모델의 재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삶을 토대로 형상화한 통찰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린 작품 하나하나에는 결코 타인의 혼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미인도」의 난입은 천 화백에게 있어서는 삶에 대한 부정인 셈이다. 천경자의 그림은, 오로지 덩어리진 슬픔을 삼키고 뒤엉킨 뱀을 그려냈던, 처절한 20대를 보낸 이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최서인 기자 
kekecathy@yonsei.ac.kr

<자료사진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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