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지 매거진부장 (인예국문·15)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기형도)’

세상이 온통 피투성이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 즉 살아있는 것이 죄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을 지경이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어깨 위로 비가 쏟아질 듯하다.

304명과 한 명의 죽음, 그리고 뉴스 토픽에도 오르지 못한 억울한 죽음들 사이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해당 사안이 폭로되면서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속속들이 들려온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찝찝함을 지울 수 없다. 흔들리는 민주주의, 정말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이 사라지고 나면 회복될 수 있을까.

한편 최근 문단 내에서 벌어진 성폭행과 관련한 폭로가 이어져 파장이 일었다. 이에  가해자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나, 어쨌든 미안하다’고 사과하거나 혐의 자체를 완전히 부정했다. 그게 끝이었다. 대체로 가해자들은 피해자들보다 힘이 세며, 문제 상황을 겪었음에도 그들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알고 있다.

반면에 피해자들은 자신이 고통 받았던 시간들에 관해 발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아픔을 공개하는 까닭은 우리가 언제고 피해자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치적 물 타기의 가능성이 있으니, 최순실 게이트의 문제에 여타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끼워 넣지 말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최순실로 대표되는 일당들이 자행한 국정농단의 행동들과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사망을 어떤 잣대로 구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전국 곳곳에서 연이어 이뤄지는 집회가 부디 평화적이기를 바라는 입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폭력성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저항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절대적으로 ‘평화적’일 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납득할만한 저항을 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저항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집회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가 팽배한 사회 속으로, 혐오적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수자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회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때문에 나는 이번 최순실 게이트가 정치적 맥락에서 해결되건 안 되건 간에 상관없이 늘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자신보다 더 피투성이인 이들을 끌어안고 저항을 선택한 이들을 기억한다.

우리가 진정 분개해야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번 사안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바뀌어야할 것들은 바로 우리 곁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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