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사빌의 작품

전라의 여인이 관객들을 쳐다본다. 캔버스를 꽉 채운 비만의 여성, 그녀의 시커먼 음모(陰毛)와 몸 위에 그려진 등고선은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의 제목은 「계획(Plan)」으로 영국 미술가 제니 사빌(Jenny Saville)의 것이다. 여성의 육체를 가감 없이 표현한 이 작품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여성을 향한 사회적 편견과 잣대를 부수자는 의지는 아니었을까? 사실 사빌처럼 미술계의 많은 작가들이 여성에 대한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다. 페미니즘이 미술 속에서 어떻게 공론화되었는지 그 흐름과 성과들을 살펴보자.

 

‘여성성’은 실존하는가
 

▶주디 시카고의 작품

예술가들은 페미니즘을 어떻게 다뤘을까? 이들이 처음에 던진 화두는 ‘여성성’이었다. 과거 남성들이 작가층, 관람객층의 대부분을 구성했던 상황에서 1970년대 이전의 서양 미술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고, 여성 예술가들은 성별의 위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순수미술이 남성적인 기술과 메시지로 도배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남성성’의 ‘대척점’으로 생각되는 ‘여성성’이란 무엇일까?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성’이라는 본질을 두고 서로 충돌해왔는데, 그 중심에 선 논쟁은 바로 ‘본질주의’ 와 ‘구성주의’간의 싸움이다. 본질주의자들은 ‘여성적 감수성’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런 자연적인 본질이 사회적 관행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구성주의자들은 여성성이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이들은 ‘여성성’이라는 본질을 만들어낸 가부장제 등의 사회적 관행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본질주의 대 구성주의와 같은 이분법이 해체되고 있으며 ‘성차’로서의 ‘여성성’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여성의 성, 또 남성의 성을 무시한다면 페미니즘 담론 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미술로 살펴보는 여성주의
 

여성성은 미술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됐다. 영국 리즈대학교 교수 그리젤다 플록(Griselda Pollock)은 「시야와 차이: 페미니즘, 여성성, 그리고 미술의 역사(Vision and Difference: Feminism, Femininity and the Histories of Art)」에서 ‘사회적 성별 구조에서 오는 남녀의 차이가 남녀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가를 결정했다’며 여성성이 작가의 성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점을 지적했다. 주류 미술사를 이끌어 온 남성들은 여성과는 다른 사회적 ‘시각’을 지녔기에 이 점이 미술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미술에서 대상화된 ‘여성’은 남성작가의 시선에 비친 여성이었기에 여성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심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남성주의적 미술에 대항하는 것이 페미니즘 아트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여성주체의 입장을 강조하며 작품을 창작했다. 독일 미술가 키키 스미스(Kiki Smith)는 여성의 몸을 소재로 체액 및 배설물 등의 신체 분비물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조각들을 만들었다. 또한 영국의 미술가 제니 사빌(Jenny Saville)은 남성 중심 미술사에서 꾸준히 이상화 됐던 여성 누드를 재해석해 남성중심주의 시선을 비판했다. 
작가들은 재료와 기법을 통해서도 여성성을 나타냈는데, 페미니즘 아트의 대모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는 공예를 이용해 「디너파티 Dinner Party」에서 역사 속 위대한 여성들을 소개했다. 최후의 만찬을 여성들로 재창조하고자 했던 그녀는 테이블의 각 자리마다 이름과 성기를 도자기 그릇과 식탁보의 수(繡)를 통해 표현했다. 사회적 통념상 숨겨야만 했던 여성의 ‘성’을 표현하고, ‘가사(家事)미술’로 여겨졌던 공예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실제 가사미술과 공예는 전통적으로 ‘여성 예술’로 생각돼 왔으며 주류 미술과 다르게 ‘수준 떨어지는’ 예술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에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와 같은 작가들은 퀼트 미술을 통해 ‘여성 미술’을 폄하하던 가부장적 미술 질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이분법은 싫다, 뉴페미니즘!
 

▶링골드의 작품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페미니즘이 종결되었다는 이론의 ‘포스트페미니즘’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여성이 여성주의 운동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는 긍정적인 의견, 혹은 문제해결을 하지 못한 채 페미니즘이 막을 내렸다는 부정적 의견을 동시에 함축한다. 나아가 포스트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여성의 자유, ‘여성성’만을 강조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에 등장한 것이 바로 ‘뉴페미니즘’이다.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심화시키던 주류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새로운 페미니즘이 찾아온 것이다. 뉴페미니즘을 주장한 이들은 기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 방향을 ‘여성성’의 존재유무, 또 그 가치에 대한 담론에만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성, 계층, 인종 등 모든 주체로 확산해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뉴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링골드의 「Picnic at Giverny」에는 하나의 퀼트 작품 안에 흑인, 백인, 황인 등 여러 인종의 여성들이 나체의 백인 남성을 구경하고 있다. 이 작품은 남성중심주의적 시선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모든 인류의 평등을 주장하며 여성 또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하는 이유에 대해 역설한 것이다. 
한편 같은 맥락에서 남성학, 남성성 연구 또한 등장했다. 우리나라의 미술가 조이한씨는 저서 『그림에 갇힌 남자』를 통해 ‘남성성’이라는 굴레에 갇힌 이 시대의 남성들을 다뤘다. 조씨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남성들은 ‘신화적 존재’로 추앙되면서, ‘완전한 존재로서의 남성’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오늘날의 가부장제가 여성들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만들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는 강인하고 든든한 모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아트는 다양한 담론을 거쳐 다방면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성차별 비판이라는 핵심 목소리를 잃지 않았으며 여전히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맞서고 있다. 이젠 단순 미술품뿐 아니라 영화, 문학 등 모든 방면의 예술로 그 영향력을 넓혀나가고 있는 ‘페미니즘 아트’의 행보가 기대된다. 
 

조승원 기자 
jennyjotw@yonsei.ac.kr
<자료사진 디아티스트 매거진,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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