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의 『흐르는 북』 속 장면을 따라가다

노인과 청년이 서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노인의 눈에 청년은 그저 작은 전자기기 속에 갇혀 사는 철부지로, 청년의 눈에 노인은 그저 앞뒤가 꽉 막혀 말이 통하지 않는 어른으로 담겨 있지는 않을까.

최일남의 소설 『흐르는 북』 속 성규, 대찬, 그리고 민 노인의 모습은 세대 간의 분리와 소통의 부재를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의 민낯을 보지 못한 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은 어떨까. 우리 주변의 노인과 청년도 이 소설에서처럼 서로 분리 돼 있다. 그들은 길을 걸으며 스쳐 지나가지만 서로에게 일말의 관심도 표현하지 않는다. 말을 걸기는커녕 눈도 잘 마주치치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대 간의 소통을 시도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우리 주변에 흐르는 북 소리를 따라 우리 사이에 흐르는 또 다른 ‘북’의 실마리를 찾아
보자.
 

다른 듯 닮은 노인과 청년의 외출

 

"나가시게요?"
일당을 주고 불러온 요리 전문의 파출부와 함께, 오렌지빛 고무 장갑을 낀 채 잰걸음으로 주방 안을 헤엄쳐 다니던 며느리는, 현관 앞에서 구두를 찾고 있는 민 노인 쪽을 향해 빠르지도 처지지도 않게 말했다. (중략)
“응, 좀 볼일이 있어서.”
칠십 노인의 해질녘 외출에 대해, 그러나 며느리 송 여사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하철 3호선 탑골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모습

노인이 외출하겠다고 집을 나서면, 가족들은 『흐르는 북』 속의 며느리처럼 굳이 외출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들의 행선지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 말을 증명하듯 노인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이른 새벽, 아침 식사를 마친 노인들은 집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들의 행선지는 각기 다르지만 모두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 대부분이다.

지하철 3호선에 올라타면 그들의 외출을 엿볼 수 있다. 기자는 노인들의 일상을 따라 3호선 종로3가역에서 하차해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허울뿐이긴 하지만 복지시설이 몰려있어 많은 노인이 무료하게나마 시간을 보내는 장소다. 대다수의 노인은 이 공원에서 한 편의 풍경처럼 앉아 있다. 공원에서 소소한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무료함과 상관없이 흘러버린 시간에 다시 집으로 향한다.

청년의 외출은 이 소설 속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오늘날 그들의 행선지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외국어 공부부터 인턴활동까지…. 청년들은 해가 지기 전까지 각자 나름대로 치열한 일상을 보낸다. 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미래를 위해 세상과 싸운 청년들은 어둑어둑한 오후에야 숨을 돌린다. 노인들이 잠 든 저녁에서야 그들은 억눌러 왔던 젊음을 불태우기 위해 2호선에 몸을 싣는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 앞 거리 청년들의 모습

기자 역시 그런 청년들의 무리 속에 있었다. 기자는 건대입구역에 내려 청년들이 붐비는 거리를 지나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에서 친구와 밥을 먹었다. 다시 2호선에 올라탄 기자는 신촌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하늘의 모습과 달리 거리 곳곳에는 한낮처럼 활기를 띤 청년들로 가득했다. 거리에서 역동적인 춤을 추며 화려한 몸짓을 뽐내는 사람들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거리를 거니는 연인들까지….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탄 기자는 생각에 잠겼다. 잠깐의 자유를 만끽한 뒤, 다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노인과 청년의 외출이 정해진 이유는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거리에는 노인과 청년이 안정적인 직장과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 대신 그들이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는 공간들만이 그들에게 손짓하고 있다. 노인을 반겨주는 곳은 없고, 청년들은 정작 자신이 원하는 곳에는 가지 못한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마주칠 기회가 없는 노인과 청년은 이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마주침의 부재가 세대 간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 속에서 함께 흐르다

 

그러나 젊은 훈김들이 뿜어내는 학교 마당에 서자, 그런 머뭇거림은 가당찮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시간이 되어 옷을 갈아입고 아이들 속에 섞여 원진(圓陣)*을 이루고 있는 구경꾼들을 대하자, 그런 생각들은 어디론지 녹아내렸다.
(중략)
그새 입에서는 얼씨구! 소리도 적시에 흘러나왔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락과 소리와, 그것을 전체적으로 휩싸는 달작지근한 장단에 자신을 내맡기고만 있었다.


『흐르는 북』의 민 노인은 대학생인 손자 성규에게 ‘봉산 탈춤 발표회’에서 북장이**로 장단을 맞춰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민 노인은 몇 번의 거절 끝에 성규의 써클과 함께 무대에 서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두어 번의 연습 뒤 마침내 민 노인은 성규의 대학 친구들과 함께 신명 나게 공연을 한다. 무대 위에서 민 노인과 성규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있다.

소설 속 성규와 민 노인처럼 세대를 뛰어넘어 교감하기 시작한 모습을 찾은 곳은 ‘서울 노인 영화제’였다. ‘서울 노인 영화제’는 ‘예술을 통해 세대 간 대화의 장 마련’이라는 목표로 지난 2008년을 시작으로 매년 가을에 진행돼 왔다. 오는 10월 20일, 제9회를 앞둔 이 영화제는 세대에 구애받지 않고 공감과 소통을 통해 삶의 순간을 함께 나누는 영화 축제로 자리 잡았다. 서울 노인복지센터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영화제에 더불어, 더욱 많은 노인과 청년 간의 대화를 위해 ‘찾아가는 영화제’를 운영하고 있다. 이 영화제는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들 혹은 ‘서울 노인 영화제’를 놓쳐 작품을 감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운영되는 순회 상영회 성격을 띤다. 서울 노인복지센터에 신청하면 관계자들이 찾아가 지난 ‘서울 노인 영화제’에서 당선된 작품을 상영 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 서울 노인 영화제의 무대 인사 모습

지난 22일, 서울 노인복지센터에서 열린 ‘찾아가는 영화제’에서는 소설 속 민 노인과 성규가 만든 화합의 무대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벌써 많은 노인이 ‘찾아가는 영화제’를 참여하기 위해 모여 있었고, 호기심으로 가득한 여러 눈이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해당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은 지난 2015년 ‘제 8회 서울 노인 영화제’의 당선작 『어머니 오야』이다. 세대 간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는 이 영화는 우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의 단체 관람 요청으로 상영됐다. 10분가량의 짧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관객들은 오로지 작품을 통해서 세대 간의 교감을 나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스크린 앞에서 기자는 노인과 청년 간 이해와 화합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90세 노인의 하루를 다룬 작품 『어머니 오야』의 상영이 끝난 후, 무대 인사 시간이 이어졌다. 서울 노인복지센터 박종택 영화 해설가의 말에 따르면, 영화 속 어머니와 아들이 통화하는 장면은 『어머니 오야』의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오야’는 ‘응’ 혹은 ‘여보세요’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어머니’에서 ‘오야’로 이어지는 대사는 아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다. 이에 박 해설가는 “영화 속 ‘어머니’가 가족, 마을 공동체와 교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며 세대 간 연결과 화합이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에 덧붙여 서울 노인복지센터 이효순 영화 해설가는 “노인과 청년이 함께 살아가려면 이처럼 교감이 밑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두 해설가가 말한 것과 같이 교감 없이는 세대 분리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감이 대화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뭐야, 이놈의 자식.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얏!"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버지의 손바닥이 성규의 볼때기를 후려쳤다. 옆에 있던 어머니의 쇳소리가 그의 뺨에 달라붙었다.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것 좀 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아버지의 생각 속으로만 저를 챙겨 넣으려고 하지 마세요."
성규는 얻어맞은 자리를 어루만지지도 않고, 되려 풀죽은 목소리가 되었다.
"네가 알긴 뭘 알아. 네가 내 속을 어떻게 알아."
“그런 말씀은 이제 그만 좀 하셨으면 해요, 안팎에서 듣는 그 말에 물릴 지경이거든요. 너는 아직 모른다. 너도 내 나이가 되어 보라…… 고깝게 듣지 마세요. 그때 가서 그 뜻을 알지언정, 지금부터 제 사고와 행동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략)”

 

한편, 『흐르는 북』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찬과 성규 사이의 말다툼이 손찌검으로까지 번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제대로 된 대화가 없으면 성규와 대찬처럼 갈등과 반목을 겪기 마련이다. 지난 26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YOU 콘서트’는 세대 간 분리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했다.

▶일자리 문제에 대한 청년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는 기성세대의 모습

기자가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을 때, 많은 기성세대와 청년들이 ‘YOU’라고 새겨진 같은 모양의 티셔츠를 입고 토론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YOU’는 ‘Young Old United’라는 뜻으로, 대한은퇴자협회는 이번 토론회와 같이 세대 간 통합을 도모하는 ‘YOU운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토론회는 취업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청년들의 거리 인터뷰 영상으로 시작됐다. 토론회에 참가한 기성세대들은 영상 속 청년들만큼이나 반짝이는 눈으로 영상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이 끝난 뒤, 무대에서 청년과 기성세대 간 대화가 이뤄졌다. 그 대화를 지켜보는 노인까지….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듣고, 공감하며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오해의 벽을 깨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기자는 토론회를 지켜보며 청년과 중년, 노년층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청년과 노인은 사회에서 소외된 채 안정적인 일자리를 쫓으며 각자의 방식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일자리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눈 ‘YOU 함께 일하기 토론회’는 세대 화합 선언으로 막을 내렸다.

2017년 말 우리나라는 노인 인구 비율이 전체의 14% 이상인 고령사회로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세대 갈등의 심화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세대 화합을 위한 시도와 세대 간 대화의 장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YOU 토론회’와 같이 서로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을 때, 우리는 『흐르는 북』의 결말과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뭐라구? 우리 성규가 데모하다 잡혀갔다구. 언제 어디서. 지금 어딨어? 이일을 어쩌지. 이일은 어떡한다지.”
(중략)
“수경아. 늬 오래비가 붙들려간 게, 나나 이 북과도 관계가 있겠지.”
둥 둥 둥 딱 뚝.
(중략)
“아무래도 그 녀석이 내 역마살을 닮은 것 같아. 역마살과 데모는 어떻게 다를까.”
딱 둥둥 뚝.

 

이 소설은 성규가 시위를 하다 잡혀간 뒤, 취기가 오른 민 노인이 방에서 북을 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어쩐지 씁쓸함을 담고 있는 민 노인의 북소리는 소설 밖으로 고스란히 전달 돼,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소설 속에서 성규와 민 노인은 여러 대화를 나눴지만, 결말부의 민 노인이 하는 혼잣말은 그들이 정말로 화합했는지 의문을 남겼다. 다만 민 노인은 자신과 성규가 닮았다며 그들 사이에 ‘무언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을 했을 뿐이다.

비록 무대 위에서 교감하며 대화의 시작점을 찾았지만,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성규는 경찰서에 잡혀간다. 교감은 그 자체로 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찬과 민 노인 그리고 대찬과 성규에게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 그들은 그들 사이에 공통으로 흐르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소설 『흐르는 북』의 제목에서 ‘흐른다’는 단어의 뜻은 서로를 존중한다는 가치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이다. 비록 그 가치가 민 노인에서 대찬, 대찬에게서 성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세대를 걸러서도 민 노인과 성규 사이에는 흐르는 ‘북’, 즉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있었다. 북이 흐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대의 연결을 상징한다.


서울 노인복지센터와의 전화를 끊고 나니 기자의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에게서 걸려왔던 수많은 부재중 전화들이 떠올랐다. 이와 동시에 온갖 핑계를 대며 다시 전화 걸지 않았던 지난날도 떠올랐다. 기자와 기자의 할머니,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부모 자식 사이에는 저마다 어떤 ‘북’이 숨어있을까. 과연 우리 사이에 흐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 나서야 할 시간이다.

 

 

*원진: 원 모양의 진영.
**북장이: 북 연주자.


 

글 박혜지 기자 pphhjj66@yonsei.ac.kr
홍란 기자 nancho@yonsei.ac.kr

사진 신용범 기자 dragontiger@yonsei.ac.kr
천시훈 기자 mr1000sh@yonsei.ac.kr

<자료사진 대한은퇴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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