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정명교 교수

한강의 ‘맨 부커 인터내셔널 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수상이 전해지자 한국의 모든 미디어들은 앞 다투어 기사를 송출하기 시작했다. 지금 인터넷에 들어가면 거의 엇비슷한 내용의 무수한 이야기가 떠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사건 뒤에 숨어 있는 한국문학의 지속가능한 생존의 필요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소식은 한국문학에 관해 세 가지 차원에서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한국문학이 세계문학 안으로 진입하는 각별한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순수한 미학적 판단을 통해서 한국문학이 세계 독자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방식’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 안으로 진입한 계기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한국문학은 대체로 1세기 조금 너머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서양에서 발원한 문학 관념이 한국의 토양 속에서 배양되고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며 생장하였다. 한국문학의 진화에 가장 중요한 지렛대로 작용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매체인 한글이다. 한국문학은 한글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글은 독자적인 만큼 고립적이었다. 한국문학은 민족문학의 우물 안에서 팔다리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 말부터 세계의 모든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적·문화적 자원들까지 지구적 규모로 유통하고 순환하는 새로운 세계화의 질서가 열렸다. 한국문학의 경우, 이제 민족 문학이 아니라 하나의 독특한 세계문학으로 존재해야 할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이 그러한 필요에 부응할 경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 장벽을 뚫은 건 ‘번역’이었다. 1990년대 이문열의 『금시조』가 불역되고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에 소개되면서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광정에 얼굴을 내밀었다. 곧 이어 이듬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았다. 그때부터 ‘번역’이 한국문학의 필수 매개자가 되었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되고 번역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이 시작되었다. 그 지원 사업을 통해 적지 않은 수의 한국문학작품이 해외로 파송되었다. 한국문학 콜로키엄, 작가 해외 레지던스 등 한국문학과 세계 독자를 연결시키는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개발되었다. 그리고 반세기 이상이 지났다. 물량적 지원은 계속 증가했는데 그러나 결과는 아리송했다. 하위문화의 영역에서 K-pop과 드라마가 외국의 군중들을 매료시켰지만 고급문화로 연결되는 일은 드물었다(그것은 하위문화의 향유 양상을 따져 봐야한다는 숙제를 남긴다.) 오히려 최근 들어 한국문학에 대한 세계 독자의 관심은 서서히 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대신 ‘핵’을 보유한 괴상한 나라인 ‘북한’의 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증가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던 중에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세계적 권위를 가진 상을 쥐었다는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이 소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은 그 동안의 투자가 성과를 낳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번역의 품질이 이번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노력이 효과를 거둔 것으로 봐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문학 일반에 대한 관심의 저하 현상과 가뭄 속의 단비처럼 쏟아진 이 소식 사이의 괴리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는 바로 두 번째 차원으로 우리를 이동시킨다.
 

독자의 인정을 받은 한국문학

『채식주의자』의 성공은 순수한 문학적 평가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다. 그 동안 한국 문학의 우수성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들은 자주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권위를 동반한 인정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재작년 김애란의 번역된 소설집 『나는 편의점에 간다』가 프랑스에서 ‘주목받지 못한 상’을 수상하였는데, 그 제목 그대로 한국문학은 주목받지 못한 채로 그 존재의 ‘고지(告知)’만 이어가고 있었다. 이 현상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야만 미적 차원에서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의 호환 체계를 수립하는 일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다루었다. 게다가 그것들이 매우 ‘극단적’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이 세계 독자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 일차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흔하디흔한 세계문학의 한 ‘물건’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한강은 채식주의와 탐미주의라는 두 개의 상반된 태도를 평행시켰고 그 사이에 최대한의 긴장을 부여하였다. 그럼으로써 두 세계관이 오해를 통해 상생하고 입장에 의해 상극하는 격렬한 길항의 현장을 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작품의 미학적 성취는 이러한 다성적 자기장을 건축한 데서 비롯한다. 이것은 우선 서사의 승리이고 이어서 밀도의 개가이다. 즉 사건의 시작과 끝 사이를 일관되게 이어나갔던 것이고 다음 태도들의 복합적 의미 연관을 단일한 사건 안에 농밀하게 압축시켰던 것이다. 결국 오늘의 성과는 만인의 호기심을 부추길 수 있는 제재를 작가 특유의 개성적 형식을 통해 신비한 언어의 향로로 빚어낼 수 있었다는 것, 간단히 말해 보편적 제재와 개성적 형태를 결합시켜 특별한 미학적 차원을 열었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는 의미심장한 교훈을 오늘의 한국문학에 던진다.
1989년 거대 이념의 몰락과 디지털 문명의 폭발적인 팽창 이후로 한국문학은 개인들의 사사로운 욕망 세계를 그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 세계 역시 넓은 의미에서 일반적 제재이지만 독립적으로 떠도는 산만한 사건들로 현상되곤 했다. 실제로 세계 독자의 주목을 끈 것은 조금 달랐다. 즉 보편적이되, 이질적인 시선들을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유인력이 강한 제재들이었다. 좌우이데올로기의 충돌을 다룬 황석영의 『손님』, 성과 속, 공과 사의 거울 관계를 추적한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이 그런 예들이다. 다른 한편 21세기 한국문학은 제재의 산만성을 극복하기 위해 신기한 아이디어를 고안해서 거기에 태깔을 입히는 일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디어보다 서사의 완미함이다. 구조적 통일성이 구현될 때에만 독자들은 정서의 긴장과 휴식 사이의 긴 시간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고 그 추체험의 과정을 통해 감동이라는 정서적 고양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성공이 무엇보다도 서사의 승리라고 말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서사적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것이 문학의 본질로부터 제기되는 요구라면, 작품에 구축된 복합적 다성세계는 오로지 작가의 개성적 글쓰기의 결과이다. 또한 한국적 정서를 요령있게 끌어들여 갈등을 증폭시키는 비판적 재료로 활용하였다. 가브리엘 마르께스(Gabriel Marquez)가 라틴아메리카의 신비주의적 사유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의 붕괴의 역사를 재서술함으로써 세계문학에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연 것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방법이었다. 이것은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세 번째 차원에 대한 시사를 제공한다. 즉 한국문학 역시 만인이 공유할 수 있는 ‘원료’에 한국인의 전통적 의식의 반복과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농축된 집단무의식을 ‘장치’로 삼아 그에 대한 자신의 성찰의 결과로서의 작가 고유의 개성적인 문체를 ‘노동’에 투여하는 것이 여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문학의 광경을 창출해내는 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을 확장하는데 기여

마지막으로 한 마디.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뒤 뒤돌아보면 상을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가령 노벨문학상 첫 수상자인 프랑스의 시인 쉴리 프뤼돔(Sully Prudhomme)을 지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변변한 상 하나 안 받았지만 21세기 벽두에 뉴욕 타임즈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세기 영문학이 산출한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추대’되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수상이 아니라 그가 남긴 작품들이 훗날에도 읽힐 수 있도록 문학적 구조와 밀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번 수상이 작가에게 남기는 과제 역시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가 제련해낸 문학적 순도를 후속 작품들에 이월시켜 그 정밀성을 더욱 벼리는 일말이다.

 


<자료 사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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