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노래 가사는 전부 무의미하거나 사랑 타령뿐일까?


요즘엔 들을만한 노래가 없어, 마음속에 담을만한 가사가 없어
-에픽하이, 「선곡표」(2007) 中

가끔 음악차트를 보면 질릴 때가 있다. 1위부터 10위까지 며칠 전에 컴백한 아이돌이 차트를 점령하고 있거나 사랑과 이별이 주제인 뻔한 노래들로 차트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으면, ‘들을 노래가 없다’는 말이 한숨처럼 절로 나온다. 사랑과 이별이 내 얘기 같은 적도 한두 번이지, 또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는 왜 이리 많이 쓰는지. 곱씹으며 음미할 만한 가사는 없는 걸까?
사실, 불평하기에 앞서 음악계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아이돌도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시대에 따라 아이돌 가사의 트렌드도 꾸준히 변해왔으니 지금부터 확인해보자!

표현의 자유를 얻다, 1990년대

 

아리 아리 아리 공부 고개를
오늘도 넘어 간다
음악 미술은 저리 미뤄두고 국,영,수를 우선으로 해야
아리 아리 아리 인정받고
일류 대학으로 간다

- 젝스키스, 「학원별곡」(1997) 中

지난 4월, MBC 『무한도전』이 1세대 아이돌 ‘젝스키스’ 특집을 방영한 이후 90년대 복고열풍이 다시금 강하게 불고 있다. 당시 어렸던 20대들은 잘 모르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90년대를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전성기’라고 부른다. 대중가요 스타일의 굵직한 변화와 그에 따른 대중의 호응도 열렬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서 있던 가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아이돌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선보인 랩댄스(rap dance) 음악은 이후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젝스키스를 비롯한 1세대 아이돌의 음악은 전부 이에 기인해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절 ‘노랫말’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전심의제도(아래 사심제)’의 철폐였다. 90년대 이전의 가사들은 공연윤리위원회(아래 공륜)의 사심제 아래 철저히 검열됐다.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가수들이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해, 사심제가 일제강점기의 잔재임에도 이어져 온 것이다. 사심제에 따라 가수들은 음반을 발매하기 전 가사와 악보집을 공륜에 제출해 심의를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가수가 표현과 예술창작의 자유를 침해당했다. 이는 헌법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가수 정태춘이 그 점을 들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제청을 요구해 지난 1996년 6월, 사심제는 완전히 폐지됐다. 덕분에 가수들은 거침없고 자유로운 표현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아이돌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귀엽고 달콤한 사랑을 노래하는 「캔디」로 추억되는 H.O.T의 데뷔곡은 무려 학교폭력 세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전사의 후예」였다. 이후로도 지난 1999년에 발생했던 ‘화성 씨랜드 수련원 화재 참사’의 추모곡으로 「아이야」를 발표하는 등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곡을 다수 발표했다. 젝스키스 역시 「커플」로 유명하지만, 데뷔곡은 ‘공부만능주의’를 꼬집은 「학원별곡」이었다. 댄스음악의 주 소비층인 10대에 타깃이 맞춰진 만큼 10대가 공감할 수 있는 세태에 대해 그들의 ‘우상(idol)’들이 목소리를 내며 등장한 것이다. 비록 세기말 감성과 ‘중2병’이 점철된 이들의 노래가 지금 듣기에는 다소 촌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이돌이 나서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거침없던 시대라니, 나름 멋있지 않은가.

이목을 훅! 채가지, 2000년대

 


Tell me tell me
tell tell tell tell tell tell me
나를 사랑한다고 날 기다려 왔다고
- 원더걸스, 「Tell me」(2007) 中

음반판매량의 정점을 찍은 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음악계는 초반에 쇠퇴의 길을 걸었다. MP3의 등장으로 음반판매가 급감했고,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것 같은 비슷한 사운드의 음악만이 우후죽순 등장하는 것에 대중들이 질린 것이다. 2000년대 중반에 와서야 2세대 아이돌 그룹이 등장했다. 대형 팬덤으로 한 획을 그은 동방신기나, 당시 최다 멤버 수를 자랑한 슈퍼주니어가 인기를 끌었지만, 노랫말은 아직 90년대 H.O.T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러던 지난 2007년, 원더걸스의 「Tell me」가 ‘후크송(hook song)’이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반복되는 단순한 가사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따라 부르기 쉽고, 공감하기도 쉬운 보편적 사랑 노래였기에 10대 한정이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텔미~’를 흥얼거렸다. 이후에도 수많은 아이돌이 후크송을 발표하며 모두 중독성을 무기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는데 여념 없었다. 그러나 과열된 후크 경쟁이 우리 대중가요 가사의 질적 하락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 전문가와 기성 언론에서 이어졌다. 이미 대중 스스로도 체감하고 있는 점이었다. 이처럼 후크 열풍은 아이돌에 대한 관심과 반감을 동시에 높이기에 충분했다.

이야기도 각양각색, 2010년~현재

눈 크게 떠 거기 충돌 직전 폭주를 멈춰
변화의 목격자가 되는 거야
밀어대던 거친 캐터필러 그 앞에 모두 침몰할 때
-f(x), 「Red light」(2014) 中

SNS의 등장과 유튜브의 활성화는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일조했다. 지난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미국 빌보드차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K팝’이라고 명명된 우리 대중가요는 청자가 더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게 됐다. 청자에 맞춰 가사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후크 요소가 많은 아이돌 곡에서 발견됐지만, 이전처럼 전면에 내세워지지는 않았다. 무조건 귓가에 맴돌게 하는 것에 급급했던 이전과 달리, 현재는 대중의 정서까지 담아내기 위해 가사 자체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도 이뤄지는 추세다. SM 엔터테인먼트 이성수 프로듀싱 본부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매년 그해 인기가요 100곡을 모아 가사를 분석한다”며 “주제부터 문체까지 변화 동향을 살핀다”고 전했다. 덕분에 SM 엔터테인먼트는 엑소의 「으르렁」처럼 10대 소녀팬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전형적 아이돌 곡은 물론, 은유적으로 세월호 참사를 비판한 f(x)의 「Red light」, 그리고 모든 소수자를 응원하는 엠버의 「Borders」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
섬세해진 대중의 감성에 맞춰 사랑 노래도 세분화됐다. 아이유의「좋은날」로 유명한 김이나 작사가는 그의 저서 『김이나의 작사법』을 통해 요즘 대중가요에서는 ‘사랑에 빠지기 직전’, ‘사랑에 빠진 직후’, ‘이별 직전’ 등과 같이 사랑의 진행 단계에 따라 무수한 상황과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이전 가요에는 없던 ‘연애 직전 설레는 단계’를 뜻하는 ‘썸’을 주제로 한 곡들이 많은 대중의 공감을 받은 점을 들 수 있다.
삶이 팍팍한 만큼 아이돌이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노래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지난 2015년 빅뱅은 「Loser」의 자조적인 가사를 통해 공감을 얻었고, 현재 음원차트 상위권에 있는 트와이스의 「Cheer up」과 I.O.I의 「Dream girls」, 에이핑크 정은지의 「하늘바라기」는 ‘힐링송’으로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제는 대중이 단순 감상자를 넘어 가사에 대한 담론까지 활발히 펼치는 시대다. 지난 2015년에 아이유는 자작곡인 「Zeze」의 가사가 명작소설 속 어린 주인공을 성적 대상으로 은유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에 빠졌고,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그가 ‘아이돌’의 범주에 속해있기에 대중들의 충격도 남달랐다. 이처럼 똑같은 가사라도 아이돌이 노래했을 때의 힘은 다르다. 아이돌이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하며 그 영향력이 전보다 더 커졌음에도 여전히 주 소비층은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은 더 많은, 색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아이돌도 표현의 자유와 수위에서 줄다리기하며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는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해보자. ‘마음속에 담을 만한 가사’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주인 기자
master0207@yonsei.ac.kr

<자료사진 DSP JYP SM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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