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일상이 지겨워질 때가 있다. 눈앞에 쌓인 과제와 일감들이 나를 위한 건지, 내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 헷갈릴 때. 온종일 애매한 기분으로 보내는 나날이 반복될 때. 이때다 싶었는지 글쟁이 최고의 적, 매너리즘이 몽마(夢魔)처럼 덮쳐온다. 으, 떠나고 싶다. 그렇다고 막상 떠나려니 또 무섭다. 돌아왔을 때 내 자리가 없으면 어떡하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고민 속에서, 기자는 지갑과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이태원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오로지 나만을 위한 단 몇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게스트하우스 파티(아래 게스트파티)는 투숙객들끼리 홀 또는 옥상에 모여 여는 파티로, 게스트하우스의 ‘아이덴티티’다. 자칫하면 스쳐 지나버렸을 인연들을 한데 모아 여는 한밤의 맥주 파티는 젊음, 활기, 치기 어림 그리고 무모함을 한가득 담고 있다. 파티에 참석하는 투숙객들이 대부분 2~30대여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운 것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게스트파티는 보통 투숙객이 많은 주말 저녁에 열리며, 투숙객 외의 외부 손님도 환영하는 개방된 이벤트다. 참석을 희망하는 이들은 약 5천 원에서 1만 원가량의 비용을 지급해야 하며 전화 또는 이메일로 간단하게 신청할 수 있다. 어느덧 이태원 해밀톤 호텔 앞 정류장에 다다른 기자는 이번 파티가 우울한 기분의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하며 게스트하우스의 옥상에 올랐다.

▲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내려다 본 전경.

좋은 사람, 좋은 바람 그리고 맥주 한잔

해방촌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에는 아직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기자를 뒤따라 옥상에 올라온 쟝 저메일(Jean Germail, 29, 아래 쟝)은 짧은 반바지를 입고 덜덜 떠는 기자와 달리 셔츠에 니트까지 껴입은 채 맥주병을 한 아름 안고 ‘한국 맥주도 꽤 맛있다’며 싱글거렸다. 그는 캐나다인으로, 지난 1월 음악 사업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입국한 후 이태원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태프 일을 하고 있다. 제주도, 경주 등 서울 밖 유명 관광지에는 주로 한국인 스태프들이 머무르지만, 이태원이나 홍대의 게스트하우스는 많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외국인 스태프가 많다.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는 숙식을 보장받을 수 있으므로 많은 외국인 체류자들이 선호하는 아르바이트 중 하나다. 또 다른 스태프 엘리자베스(Elizabeth, 27)는 “남자친구와 세계 일주를 하는 중이며 6개월 정도 한국에 머무르다 떠날 것”이라고 전했다. 이윽고 쟝이 소주와 맥주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자 투숙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가장 늦게 올라온 엘리자베스가 자리에 앉는 것을 시작으로 파티가 시작됐다.
투숙객들을 이끄는 파티의 매력 포인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중 진정한 묘미는 자기소개가 아닐까 한다. 이곳에서 기자는 어느 대학교 학생도, 누구의 딸도, 누구의 친구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날 것 그대로 자신을 내보일 수도, 철저하게 숨길 수도 있다. 기자는 이름만 밝히려 했지만 쟝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매우 궁금해 했다. 사실 파티의 분위기는 보통 스태프의 주도에 따라 달라진다. 일전에 방문했던 경주의 한 게스트하우스 파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이름만 노출한 채 놀았었다. 하지만 굳이 숨길 이유도 없을뿐더러 아무렴 어떠랴, 오늘 하루 인연일 수 있는데. 기자를 비롯한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즈음, 옥상에는 서양식 술 게임 판이 벌어졌다. 게임은 파티 멤버들 간의 어색함을 깨줄 뿐만 아니라 서로 승부욕을 부추겨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좋은 도구다. 스태프들이 준비한 ‘몸으로 말해요’와 같은 스피드 퀴즈나, 일명 ‘주루마블’과 유사한 카드 게임은 사람들 사이의 벽을 이내 허물었다. 벌칙으로 마시는 술도 한몫했다. 야외라 혹여 목소리가 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아무 생각 없이 크게 웃어젖히고 나자 언제 이곳이 낯설었냐는 듯 마음이 편해졌다.

술 못 마셔도, 영어 못해도 다 괜찮아

술이 사람들의 친밀도를 높여주는 활성제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술 없이도 얼마든지 파티를 즐길 수 있다. 이른 저녁에 열리기 때문인지 거나하게 마시는 이도 없었다. 다들 상대가 무엇을 마시는가보다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 누가 묻지 않아도 나서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성은’이라고 밝힌 한 남성은 “학회 참석으로 서울에 올라온 김에 이곳에 머무르게 됐다”며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라 놀랐다”고 전했다.
쟝과 엘리자베스가 한국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파티는 영어로 진행됐다. 다 함께 어울리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인들끼리도 영어로 사담을 나눴다. 기자의 회화 실력이 절대 출중하지 않았기에 내심 긴장했으나, 사람들은 서로 통역을 도와주고 쉬운 단어로 대화를 이어가는 등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에서 근무하는 최지훈(26)씨는 “휴가 때면 가끔 이곳에 와 사람도 사귀고 영어 실력도 키운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간혹 막힐 때면 스스럼없이 기자에게 통역을 부탁해오곤 했다.
특이하게도 이날 파티에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들은 게스트하우스보다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한 숙박시설을 선호하기 때문에 게스트파티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알고 보니 이 아이들은 이곳에서 투숙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엘리자베스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스태프들은 포도 주스와 오렌지 주스를 구해다 줬고 사람들은 아이들을 반겨줬다. 아이들의 서투른 재롱과 느린 대화 속도가 지루할 법도 했지만, 투숙객들은 밝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들과 어울렸다.

▲ 해가 저물 무렵 옥상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사람이 다르고 장소가 다르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게스트파티의 분위기는 항상 천차만별이다. 최씨의 동료인 박화목(27)씨는 “어느 때는 새벽 1시가 넘도록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한다”며 “그 분위기가 좋아 종종 이곳을 방문한다”고 전했다. 그러고 보니 파티 시작 전에 쟝은 기자에게 근처의 펍(Pub)을 추천하며 파티 후에 무엇을 할 계획인지 물었다. 그는 스태프가 주도하는 파티 시간은 대략 두 시간 정도이며 그 후에는 마음 맞는 투숙객들끼리 술을 더 마시러 나가거나 놀러 다닌다고 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게스트하우스를 찾는다는 홍가영(23)씨는 “파티에서 여행 코스가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다니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자 역시 그런 만남이 좋아 여행도 파티도 많이 찾아다니는 편이다. 그런 기자에게 이번 파티는 ‘해소’였다.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 그간 혼자 끙끙 앓던 고민을 털어놓은 기자에게 쟝은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좋아하는 걸 잘하면 돼”라고 말해줬다. 그의 앞에서는 웃고 말았지만, 그날의 들뜬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이 간단한 걸 왜 그리 꼬아놓고 고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체험기를 읽고 있는 여러분도, 출구 없는 막막한 상황에 놓여있다면 한 번쯤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유쾌한 맥주 한 잔 마셔보는 건 어떨지 제안해본다.

글 장혜진 기자
jini14392@yonsei.ac.kr

사진 주은혜 기자
gracecho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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