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생각의 무능’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 A양도, 번듯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장인 B씨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가장 C씨도, 지극히 평범하게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이 모두 ‘악마’가 될 수 있다면 믿겠는가? 이에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홀로코스트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을 기록한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서 ‘악의 평범성’을 제시했다. 그녀에 따르면, 악은 평범한 이들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독일계 유대인인 아렌트는 히틀러 나치 정권의 억압을 피해 미국행 망명길에 올랐다. 그렇게 아렌트는 미국에서 자유로운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을 통해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등의 대작을 남기면서 20세기 대표적인 정치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러던 중 지난 1960년 아렌트는 나치정권시절 유대인 대량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망명 중에 이스라엘 정보부에 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아렌트는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Newyorker)』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그 재판 과정을 취재하기로 한다.

▲ 한나 아렌트

 

살인마는 평범했다
 

아이히만은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학살하기 위해 가스실이 있는 열차를 고안한 장본인이자, 이들을 폴란드 수용소행 열차로 이송하는 총 책임자였다. 이러한 그의 잔악성과 비도덕성을 심판하기 위한 예루살렘 재판(1961)을 지켜본 아렌트는 뜻밖의 인상을 받게 된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일 것만 같았던 그에게서 어떠한 ‘특별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량학살을 저지른 희대의 살인마라고 하기에 그는 너무나도 정상적이고 평범했다.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아이히만은 ‘나는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저 상부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대량학살에 있어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적이 없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도리어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의 의무는 오직 ‘절대 권력에 대한 복종’이었다.
아이히만의 변호인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Robert Servatius)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상부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한 충실한 관료이자 근면한 인간이었다. 더욱이 재판을 지켜본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의 판정에 따르면, 그는 그저 ‘정상인’이자 ‘준법정신이 투철한 한 명의 국민’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 재판 이후,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제시하게 된다. 그녀에 따르면,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들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녀는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한나 아렌트의 저서

 

아이히만은 나치의 희생양?
 

한편,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행한 ‘반(反)인륜적인 범죄’를 비판하기 이전에 먼저 당시 국제정치에 만연했던 ‘전체주의의 폭력’을 근본악으로 규정했다. 20세기 전체주의는 인간의 다원성을 저해하고자 절대적 폭력인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전쟁은 폭력적 정치형태로 변모하면서 정치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됐다. 이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정의 법률고문이자 국제법학자인 퀸시 라이트(Quincy Wright)는 ‘인류 역사상 2년에 한 번 꼴로 중요한 전쟁이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전쟁에 마취돼 전쟁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됐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반(反)유대주의를 목표로 유대인 대량 학살과 전쟁을 자행했다. 특히, 이들은 사람들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언어 규칙을 만들어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했다. 나치당은 ‘학살’을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로, ‘유대인의 이송작업’은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등 비인간적이고도 잔악한 범죄를 ‘관료 용어’로 칭했다. 이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학살을 묘사하거나 지칭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다.
인간의 조건을 ‘말’과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는 아렌트에 따르면, 나치 정권의 언어 규칙은 인간 본연의 성질을 무너뜨렸다. 아렌트에게 ‘말’은 사람들이 현실을 알게 해 변화를 도모하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철학에 따르면, 결국 전체주의의 언어 통제는 인간본연의 성질인 ‘복수성(human plurality)’을 저해하고, 나아가서는 개인을 전체의 일부로 귀속시켜 개개인의 판단력을 상실하게 했다. 이는 곧, 어쩌면 아이히만이 나치 정권 체제하의 희생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무능
 

그렇다면, 그는 정말 무죄일까? 아렌트는 재판 과정을 통해 아이히만에게서 세 가지 무능을 발견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이는 행동의 무능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아렌트의 주장에 따르면, 나치당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한 ▲상투어 ▲관용어 ▲암호화된 언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관료들의 현실적응을 방해했다. 아이히만은 이러한 나치의 언어규칙에 철저히 세뇌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그의 원죄의 원인을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에서 찾았다. 그는 상부의 지시와 명령을 행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비판적 사고나 판단과정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 재판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책임의 윤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그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생각의 무능은 존재하는 인간이 지닌 모든 악을 합친 것 보다 더 큰 파멸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것이 예루살렘 재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라고 전했다.
당시 아렌트의 주장은 유대인들에게 반(反)민족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전범자들에게 면죄부의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의 용기 있는 주장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피폐해진 국제사회에서의 보편타당한 정의구현을 위한 냉철하고도 양심적인 발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 예루살렘 재판에서의 아이히만

 

바쁜 현대인들에게 ‘생각의 무능’은 기술발전에 따른 속도경쟁과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망 속에서 개인의 무의식 속에 잠식되고 있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생각의 부재 속에서 오늘도 우리들의 비인간성은 서서히 악으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윤미 기자
joyme@yonsei.ac.kr
<자료사진 flickr.com, wikim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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