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찾는다. 이것은 예술작품을 창작하게 된 순간부터 예술가에게 주어진 숙명적 임무다. 이에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 그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포해 창작하기도 한다.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中 「내일은 프로」

실패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그것에 실패하고만 시인 황병승.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실패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실패하고자 한 것일까. 이 실패의 의미에 대해 고민한 이가 있다. 그는 바로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다.
오르페우스는 잃어버린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다만 이승에 도달하기 전까지 절대 에우리디케를 보기 위해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방심한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고 말았고, 그 순간 아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찾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를 감각할 수 없게 됐다. 이에 오르페우스는 고통 받았으며, 삶의 어두움에 포박됐다. 우리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오르페우스를 갈증 나게 하고, 괴로움의 언덕에서 무수히 구르게 만드는 대상은 ‘잃어버린 에우리디케’지, 오르페우스가 ‘감각할 수 있는 에우리디케’가 아니다. 이미 오래 전 문학평론가 모리스 블랑쇼는 오르페우스에게 있어서 에우리디케란 ‘예술이 이를 수 있는 극단’이라고 비유한 바 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그러나 오이아그로스의 아들 오르페우스의 경우에는 신들은 아내를 데리러온 그를 실망시킨 채 되돌려 보냈습니다. - 신들이 그에게 보여준 것은 그녀의 환영이었고 실물은 넘겨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음악가에게만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에게는 기백이 모자란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알케스티스처럼 사랑을 위해 죽을 용기가 없었고, 따라서 살아서 하데스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들은 그에게 처벌을 내렸고, 여자들의 손에 죽게 만든 것입니다.
- 플라톤, 『향연』

에로스(Eros)에 대한 철학자들의 담론이 모아진 『향연』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처음부터 신은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신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그녀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었다. 만약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쳐다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녀를 찾는 일에 성공했을 것이고 그녀를 잃음으로써 느낀 고통 역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실패했으므로 에우리디케의 무한한 부재의 현전인 ‘망령’으로서 그녀를 봐야만 했다.
때문에 에우리디케를 향한 오르페우스의 시선 속에는 그 자신도 부재 상태다. 오르페우스 또한 그녀만큼 죽은 상태인 것이다. 그 죽음은 휴식, 침묵 그리고 평온한 세계로서의 종말인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죽음인 끝없는 죽음, 이별의 끝조차 부재한 반쪽짜리 죽음이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는 밤 속으로 되돌아가며 동시에 오르페우스는 예술작품의 근원으로 다가간다. 마치 처음부터 실패를 위해 실패할 것을 각오라고 한 듯이.

영감에 대하여 우리는 실패만을 예감하고, 길 잃은 격정만을 확인한다. 그러나 영감이 오르페우스의 실패와 두 번 잃은 에우리디케를 말한다면, 영감은 이러한 실패를 향하여 이러한 무의미를 향하여 나아가고, 저항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오르페우스를 지배한다. 마치 실패하기를 거절하는 것이 성공하기를 거절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심각하고, 마치 우리가 무의미한 것, 비본질적인 것, 실수라 부르는 것은 그 위험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유감없이 자신을 맡기는 자에게 모든 본래성의 원천으로 드러날 수 있듯이.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예컨대, ‘예술은 정의되지 않는다’고 말할 경우 결국 이 또한 예술의 본질에 대한 정의항이 될 뿐이다. 이처럼 예술은 예술 자체를 정의내릴 수 없게 해, 어떤 제약도 받지 않게끔 스스로를 방어하며 무한히 존재한다. 즉, 예술가가 예술의 본질을 정의내리려는 순간 예술 앞에서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예술가의 실패는 마치 내가 꾸는 악몽 속에 당신이 살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이 악몽에서 깨고 싶지만, 사랑하는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빠져나올 수는 없다. 또한 이 악몽은 내 것이기에 당신을 꿈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도 없다.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자꾸만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이런 고통의 심연 속에서 파들거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인 황병승의 「내일은 프로」처럼, 예술가들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 매번 실패한다. 그리고 그 실패는 반복된다. 이 관점에서 예술가는 실패 자체를 예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패를 깨부수기 위해 끊임없이 예술작품을 만들고, 바로 그 때문에 예술이 영겁의 시간 동안 존재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 모리스 블랑쇼의 주장은 작품을 창작할 때마다 돌림노래처럼 끊임없이 반복된다. 모든 예술가는 예술적 실패를 필연적으로 잉태하고 있다. 실패는 그 자체로 예술이기 때문에, 예술가는 모든 예술의 모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은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이며, 동시에 성공이다.

송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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