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아랑 보도부장

혼자 캐리어 하나 끌고 유럽여행을 다녀온 지 어언 1년이 지났다. 꽤 긴 기간 동안 여자 홀로 외국을 돌아다닌다고 하니 위험하다고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여행을 통해 느끼고 배운 것들이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여러 미술관들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감상했던 경험을 빼놓을 수 없다. 사진으로만 보던 모나리자, 비너스의 탄생 등 유명한 작품들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는 너무 신기해서 마냥 신났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내 인상에 박힌 작품은 루브르박물관 한쪽 벽을 꽉 채우고 있던, 지금은 제목은커녕 화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다. 예상컨대 그 그림을 정석으로 감상하는 방법은 작품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었겠지만, 감상 포인트를 바꿔보니 같은 그림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을 가까이서 보니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수많은 붓터치들이었다. 분명 멀리서 봤을 땐 나무였는데 근접한 위치에서 보니 정확히 뭘 그린 것인지 알아채기 어려웠다. 작품을 전체적으로 볼 때는 ‘배경’의 역할을 하던 존재가 사실은 각각의 구성요소의 합이었다.

순간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화가는 배경의 작은 나무를 표현하기 위해 붓으로 점을 하나 찍었을 뿐이지만, 그 점을 찍기까지 참 많은 생각들이 오갔을 것이다. 감상자들이 작품을 바라보는 포인트도 고려해야 했을 것이고,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와 중심 캐릭터와의 조화도 따져야 했을 것이다. 하나의 작품에는 버릴 붓놀림이 하나도 없다. 화가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단순한 붓터치를 적절하게 배치해 서로 어우러지게 만들 수 있는가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수많은 붓터치들이 각각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를 얼마나 잘 찾는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폭의 명화를 완성시킬 수 있느냐에서 화가의 역량은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의 요소요소가 모여 완결성 있는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적당한 위치를 고민하는 화가의 계산이 반드시 수반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정치에선 어떨까? 유능한 정치인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를 구현해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후보자 등록기간이 마감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여·야의 공천 파동을 바라보고 있으면 과연 공관위가 공천과정에서 ‘화가로서의 고민’을 한 적이 있을까 의심이 든다. 야당은 ‘셀프공천’ 논란으로 시끄러웠고, 여당 역시 계파갈등으로 후보자 등록마감일까지 ‘간을 보는’ 행태를 보여줬다. ‘공천’의 사전적 의미가 ‘공정하고 정당하게 추천하다’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연 진정한 공천이 이뤄졌는지 궁금하다. 정치에서 실익을 챙기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민생을 최우선으로 여기겠다는 주장대로라면 적절한 대표자들이 적절한 자리에 앉아, 적절한 정치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 위해선 당장의 이익보다는 큰 그림을 예상할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어쨌든 공천은 마무리됐고, 오는 4월 13일 제20대 총선이 남았다. 이번 총선을 통해 선출될 각 지역구의 점들이 전체적으로 어떤 완결성 있는 그림을 그려낼지 궁금해진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