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 속에 비춰진 우리의 단상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흙 속에 심어놓았던 씨앗이 발화돼 풍성한 나뭇가지를 지닌 나무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이십여 년간 살아가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때로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점점 작아지는 스스로를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 속에서도 숨 쉬고 있다. 이번 ‘I’ 기획에서는 소설가 이승우의 단편소설 「칼」과 감독 미타니 코기의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속 인물들이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을 알아보며,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누구나 칼 한 자루씩 품고 산다

불안, 두려움, 증오….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감정을 날카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결핍 상태를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핍 상태에 빠진 인간은 방어기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 타인을 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왜소함을 감추기 위해 칼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항상 칼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칼을 가지고 무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라고 불리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것이 칼이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누구나 칼 한 자루씩 품고 산다고 나는 생각한다. 「칼」의 주인공은 일출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일몰 시간이 되면 퇴근하는 회사원이다. 주인공은 칼을 판매하는 일을 하지만, 그 일이 자신의 직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단골 칼 수집가인 남자가 주인공에게 ‘내 아버지의 하루를 보고해 달라’는 제안을 해온다.
이십 대 중반인 주인공은 아버지와의 가치관 충돌과, 한 여자를 향한 간절한 구애의 실패로 인해 좌절된 삶을 살았다. 또한 스스로를 ‘훌륭한 어떤 일을 꿈꾸기에는 내 처지가 너무 비참하다’고 정의 내리는 등 자존감이 낮은 상태다. 이런 주인공에게 새로운 일을 제안한 남자 또한 아버지에게 무시와 비난을 받으며 살아온 닮은꼴이다. 남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해하기 위해 칼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버지의 무시와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로써 칼을 수집해왔던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과 닮아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며, 자신의 품에 칼을 지니게 된다. 이 소설 속에서 칼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거나, 복수를 위해 칼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칼이란, 그 존재 자체로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완벽한 무기다.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받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모두 가슴 속에 각자의 ‘칼’을 품고 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어린 시절의 우리는 모든 것이 궁금했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일에 거침없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그것을 물어봐도 되는 것인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됐다.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으나, 현실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고 싶지 않음의 주체가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그 상황을 수용해야 하는 사람의 의견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구조와 사회 구성원들을 ‘방송국’을 통해 풍자한 영화가 있다. 바로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다. 이 영화의 배경인 방송국은 이 세계의 축소판이다. 때문에 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상들이 배치돼 있다. 영화 속에는 부조리한 상황을 만든 인기 배우, 부조리에 순응하는 총 편집자, 그리고 부조리에 반발하는 연출자와 작가가 등장한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의 주인공 스즈키 미야코는 라디오 드라마의 대본을 쓰는 신인 작가다. 그러나 로맨스를 쓴 미야코의 대본을 읽은 인기 배우는 대본을 바꾸지 않으면 드라마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인기 배우를 캐스팅해야만 하는 드라마의 제작진들은 미야코에게 대본 수정을 요구하지만, 미야코는 극구 반대를 한다. 그런 미야코에게 총 편집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두 믿고 있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꼭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올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 했다 그것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미야코가 쓴 대본이 누군가의 힘에 의해 바뀌지 않고 라디오 드라마가 진행될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분노와 순응 사이에서 순응을 선택한 총 편집자의 말은 어쩐지 서글프다. 총 편집자가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씁쓸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 배우와 총 편집자가 대본 수정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연출자는 ‘내가 다 책임질 것’이라고 말하며, 미야코의 대본이 지켜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미야코가 처음에 썼던 로맨스는 SF가 돼버린다. 미야코의 대본이 전부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문제 상황에 대해 대항한 연출자로 인해 부조리가 흔들렸다. 우리 안에는 총 편집자와 연출자, 미야코가 모두 존재하고 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세 사람이 꿈꾸는 ‘만족스러운 작품’ 같은 세상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우리에게 그 세상을 찾아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의 과정 중에 우리는 어린 시절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 모습이 때로는 위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결핍 때문에 스스로를 부정하고, 현실 타협적이고, 소심할지라도 그 모습 역시 우리의 일부다. 가만히 당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시라. 어린 시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당신의 ‘칼’과 당신이 꿈꾸는 ‘만족스러운 작품’이 궁금하다.

 

 

송민지 기자
treeflame@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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