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1920년대의 서울을 기억하다

 


인력거꾼. 아직도 몇몇 개발도상국에는 인력거꾼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있지만 우리는 이미 잊어버린 과거 서울의 모습이다. 그때의 모습을 서울은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현진건의 대표작 『운수 좋은 날』 김첨지를 따라가 봤다.

집 > 동소문 > 동광학교 > 남대문 정거장 > 인사동 > 창경원 > 집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말 그대로 김첨지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대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낯선 지명들 투성이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눈에 들어온 카페로 들어가 위의 장소들에 대해 조사해 봤다. 하지만, 웬걸 가장 중요한 시작점과 도착지인 김첨지의‘집’을 알 길이 없었다. 달리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책 곳곳에 나온 ‘30전’, ‘일 원 오전’ 등의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김첨지 집 찾기

“일 원 오십 전은 너무 과한데.”

동광학교부터 남대문 정거장까지 일 원 오십 전을 부른 김첨지에게 학생이 했던 말이다. 그 정도의 거리면 대충 예상되는 금액, 즉 어느 정도 합의된 금액이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이에 거리와 금액을 통한 비례식을 세워 김첨지의 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김첨지의 집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만한 다른 사실들에 주목해 봤다.

1) 김첨지는 가난하다.
조밥도 굶기를 먹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물론 약 한 첩 써본 일이 없다.
그때도 김첨지가 오래간만에 돈을 얻어서....
위 구절과 인력거꾼이라는 직업은 그의 변변치 못한 생활을 짐작케 한다. 이를 통해 김첨지는 서울의 변두리나 빈민촌에 살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2) 김첨지는 동소문 근처에 산다.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
동소문에서 주로 인력거꾼 노릇을 했다면 그 근처에 집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서울에 위치한 성문 밖에는 성문 안의 높은 집값을 감당할 수 없었던 빈민들이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하며 빈민촌을 이뤘다. 김첨지도 그 빈민촌 중 하나에서 살았을 것이다.
3) 그는 집에서 동소문(혜화문)까지 ‘앞집 마나님’을 30전에 태웠고, 남대문 정거장(서울역)에서 인사동까지 ‘큰 가방을 든 손님’을 60전에 태웠다.
4) 남대문 정거장(서울역) -> 인사동 : 약 2.9km
5) 30전 : 60전 = X : 2.9km, X=약 1.45km
6) 낙산 이화마을 -> 동서문(혜화문) 약 1.7km

이러한 단서를 바탕으로 그 당시 서울의 빈민촌 중 동소문과 가장 가까운 낙산 이화마을에  김첨지의 집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화마을부터 인사동까지

 

▲ 일제 강점기 가난했던 이들이 모여살던 이화마을. 이제는 벽화가 그 고달픔을 대신하고 있지만 비좁은 골목, 가파른 오르막길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화마을은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살던 곳으로 ‘토막촌’이라고도 불린 빈민촌이 형성됐던 곳이다. 해방된 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고,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이 서울로 몰려들며 낙산의 판잣집 또한 늘어나 판자촌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가난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의 집이었다. 김첨지도 그중 하나였다. 이화마을로 올라가는 가파른 오르막길에 숨이 막혔다. 김첨지 는 제 한 몸 끌고 올라가기도 벅찬 이곳에서 매일 인력거를 끌고 오르내렸을 것이다. 손님을 태우지 않아도 그가 먹여 살려야 할 아내와 젖먹이 자식의 무게가 그의 인력거를 늘 무겁게 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이화마을은 그때의 어려운 이들의 슬픔을 잊은 듯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벽화 마을로 변해있었다. 골목골목이 사진을 찍으러 온 관광객들, 연인들로 북적거렸다. 물론 지금도 부유한 이들이 사는 곳은 아니지만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이들은 더는 찾아볼 수 없다.

 

▲ 서울 4대 소문 중 하나로 또 다른 이름은 혜화문이다.

 


이화마을에서 한참을 걷다 보니 동소문이 나왔다. 지금은 동소문 주변에 도로가 깔렸지만, 그 전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었던 곳이었을 것이다. 1920년대 동소문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가도가 연결돼 있던 곳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동소문 근처에 터를 잡은 사람들도 생겨났는데 성안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성 밖에는 가난한 이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지금의 동소문 밑에도 역시 사람들이 살았지만 그때의 생기 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축된 동소문은 김첨지의 시절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도, 과거를 담은 동소문도 그곳에는 없었다.

아쉽게도 동광학교는 오늘날 찾아볼 수 없어 그다음 장소인 남대문 정거장으로 떠났다. 남대문 정거장은 워낙 오가는 인구도 많고 짐을 든 이도 많아서인지 인력거꾼들에게 최고의 시장이었다.

 

 

▲ 원래의 남대문 정거장은 염천교 쪽에 더 가깝게 위치했었는데, 1910년대 '경성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1925년 경성역이 새로 생겼고 이는 지금 문화서울역284로 보존돼 있다.


 그렇다고 정거장 인력거꾼의 등쌀이 무서우니 정거장 앞에 섰을 수는 없었다.

아예 정거장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남대문 정거장은 1910년대 '경성역'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문화서울역 284로 불리는 '경성역'이 1925년 신설되며 사라졌다. 그떄의 남대문 정거장은 오늘날의 서울역보다 염천교에 가까운 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서울역은 그때의 남대문정거장만큼이나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갔다. . 이 북적거리는 곳에서 김첨지는 유달리 운 좋은 이 날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러구 갈 게 아니라 이 근처를 빙빙 돌며 차 오기를 기다리면 또 손님을 태우게 될는지도 몰라’란 생각이었다. 오늘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 한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하랴. 

 

▲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골동품 거리로 오늘날은 젊은 문화예술의 거리로 거듭나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방문하는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김첨지는 인사동으로 가는 손님 하나를 태울 수 있었다. 김첨지를 따라 인사동으로 향했다. 골동품과 각종 예술품을 팔았던 그때처럼 인사동은 여전히 문화의 거리였다. 일본인들 대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있다는 점만 빼고! 인사동은 옛 서울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아쉬웠던 점은 정겨웠던 골목들은 모두 공사 중이었다는 것이다. 작은 골목골목 들어선 상점과 찻집을 구경하는 것이 인사동을 찾는 이유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그곳에 현대적인 건물들이 세워질 것이다. 김첨지의 이야기가 담긴 서울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운수 좋은 날
 

흐리고 비 오는 하늘은 어둠침침하게 벌써 황혼에 가까운 듯하다. 창경원 앞까지 다다라서야 그는 턱에 닿은 숨을 돌리고 걸음도 늦추어잡았다. 한 두 걸음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조차 괴상하게 누그러웠다. 그런데 그 누그러움은 안심에서 오는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을 빈틈없이 알게 될 때가 박두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손님을 받던 김첨지는 집에 갈 때가 되자 불안해진다. 평소에는 북적거리던 인사동도, 즐거움이 요란 시리 가득 찼던 창경원도 그날만큼은 유독 을씨년스러웠을 것이다. 기자가 갔던 창경궁도 밤이 다가와서인지 사람이 없었다. 쭉 늘어선 돌담길이 어여뻤지만 김첨지가 무거운 비를 맞으며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걸었을 생각을 하니 기자도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차가워졌다. 두려움이 김첨지를 집어삼킬 때쯤, 그는 친구 치삼이를 만나게 된다. 으슬으슬했던 몸은 따뜻한 선술집의 안주와 막걸리에 녹아갔지만 김첨지의 마음은 아니었다.

 


“우리 마누라가 죽었다네.”
   ......(중략)......
“죽기는 왜 죽어, 생떼같이 살아만 있단다. 그 오라질 년이 밥을 죽이지.
인제 나한테 속았다.”
하고 어린애 모양으로 손뼉을 치며 웃는다. 김첨지는 화증을 내며 확신 있게 소리를 질렀으되 그 소리엔 안 죽은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가락이 있었다. 

한참동안 불안한 마음을 술로 달랜 뒤 김첨지는 설렁탕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기자 역시 다시 김첨지의 집으로 그를 뒤따라갔다. 피곤한 몸에 술이 들어가자 물먹은 솜 마냥 몸이 무겁지는 않았을까. 진즉 땀이 식어버린 몸에 쌀쌀한 비가 내려 몸이 으슬으슬하지는 않았을까. 비좁은 오르막골목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며 김첨지가 느꼈을 불안감이 기자에게도 번졌다. 한참을 위를 향해 가다 보니 어느새 저물어가는 서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첨지는 이때쯤 그를 맞이하고 있는 비극을 만났겠지...’ 아름답게만 보였던 서울의 야경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였다.

 “이 원수엣돈! 이 육시를 할 돈!”
하면서 풀매질을 친다. 벽에 맞아 떨어진 돈은 다시 술 끓이는 양푼에 떨어지며 정당한 매를 맞는다는 듯이 쨍 하고 울었다.

선술집에서 치삼이가 집어주는 돈을 내팽개치며 김첨지가 했던 말이다. 하루만 일을 쉬면 안 되겠냐며 애원하던 아내를 뒤로하고 비 내리는 일터로 김첨지가 나와야 했던 이유, 자기 삶의 무게도 버거웠던 김첨지가 끊임없이 남의 무게까지 끌어야 했던 이유. 그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근대화 계획으로 서울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근대식 건물, 문화가 들어왔다. 반짝반짝한 새 도시로 거듭나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뒷골목에는 빛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김첨지들이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어렵게 올랐던 오르막길을 다시 내려가며 책 속의 한 구절, ‘정당한 매를 맞는다’를 계속해서 곱씹어봤다. 더 이상 서울에는 김첨지를 기억하는 곳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화마을 꼭대기에서 본 서울은 김첨지가 살았던 그때의 서울보다 훨씬 더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80년이 지난 지금도 분명 김첨지 같은 이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여전히 ‘정당한 매를 맞아야 하는 돈’도 존재할 것이다. 취재가 잘 된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지만, 마음 한쪽이 먹먹해 오는 것은 왜일까 싶다.
 

*경성부 : 일제강점기 서울의 명칭.
 

글 서형원 기자 
ssyhw35@yonsei.ac.kr
사진 이청파 기자
 leechungpa@yonsei.ac.kr

그림 안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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