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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스위치는 당신이 쥐고 있다!유전과 환경의 조화, 후성유전학
  • 서형원 기자
  • 승인 2016.03.05 19:29
  • 호수 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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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유명한 뇌 과학자 제임스 팰런(James Fallon)은 연구 도중 우연히 자신의 뇌가 자신이 연구하던 사이코패스의 뇌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후 팰런은 유전자 연구를 통해 자신에게 폭력성과 공격성을 증가시킨다고 알려진 MAOA 유전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하지만 팰런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뇌 과학자가 됐다. 유전자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요인이라면, 어떻게 팰런은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속은 같아도 겉은 다른 쌍둥이


팰런은 이 답을 ‘후성유전’에서 찾았다. 후성유전은 영어로 ‘Epigenetic’으로, ‘유전의’라는 뜻을 가진 ‘genetic’에 ‘이후, 후대의’ 라는 의미의 접두사 ‘epi’가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후성유전학은 유전자가 부모세대로부터 물려진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 즉 외부 요인에 의해 달라지는 유전자의 발현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후성유전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쌍둥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쌍둥이 중 일란성 쌍둥이는 유전자 공유 비율이 100%로, 완벽히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이 쌍둥이 형제는 다른 환경에서 양육될 경우, 성격도 체형도 다르게 성장하며 다른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이는 다른 환경, 경험 등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이들의 유전자가 다르게 발현됐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 캐나다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The Nature of Things』는 이러한 쌍둥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이자 영화감독인 레오라 에이슨(Leora Eisen)씨는 아주 건강하지만, 그녀의 일란성 쌍둥이자매는 백혈병 투병 중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그녀는 이러한 차이의 이유를 후성유전학으로 밝히고자 했다. 후성유전의 또 다른 예는 우리 몸의 세포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모두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피부가, 일부는 뇌가 되는 등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각자의 필요성에 따라 다르게 유전자가 발현된 후성유전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후성유전은 어떻게 일어날까? 후성유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첫 번째 방식은 탄소와 산소 화합물인 메틸기 분자에 의해 일어나는데, 이 메틸기 분자는 DNA에 달라붙어 접촉 부분에 위치한 유전자의 발현을 막는다. 두 번째 방식은 히스톤에 의해 이뤄진다. 히스톤은 단백질로 구성된 실타래로, DNA가 이에 감겨 있다. 히스톤에 DNA가 어떤 강도로 감겨져 있느냐에 따라 유전자 발현이 달라지는데, 세게 감겨 있을수록 발현이 억제된다. 메틸기 분자가 발현 여부를 결정하는 ‘스위치’ 역할을 한다면 히스톤은 정도를 조절하는 ‘손잡이’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스위치와 손잡이는 우리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작동된다.

이처럼 후성유전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지닌 유전자는 변하지 않지만 어떠한 유전적 특성이 발현되느냐는 바뀔 수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온전히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팰런은 MAOA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아 사이코패스 대신 뇌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

만들어지는 영재, 길러지는 괴물


후성유전의 등장은 과학계에 계속됐던 ‘유전이냐 환경이냐’라는 논쟁을 종결시켰다. 유전과 환경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환경에 의해 유전이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자신의 열등한 유전자를 탓하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해줬다. 지능과 영재성은 유전자에 의해 운명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 노력과 같은 후천적 요인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10년 국제 학술지 ⌜PLOS ONE⌟은 지능과 관련된 유전자와 실제 지능간의 밀접성에 후성유전이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한국SI영재교육 연구소 자문교수로 있는 재능대학교 아동교육상담과 하종덕 교수는 “남들보다 월등히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이를 우리는 천재라 부르는데 이들의 경우는 후천적인 환경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뛰어난 업적을 남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하 교수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르다”며 “유전자는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아 발현되기도, 사장되기도 하기 때문에 본래 갖고 태어난 유전자, 그리고 교육과 같은 후천적 환경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영재성과 능력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 프로그램 『영재 발굴단』에 나온 아이들만 봐도 든든한 가정의 지원이 영재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영재학술연구소의 조석희 박사가 정부와 민간기관에서 발굴한 영재의 18년 후 성장 모습에 대해 한 연구에 따르면, 81명 중 서울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비율은 단 19.8% 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어린 시절 발견된 영재성이 성장 배경에 따라 다른 정도로 발현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후성유전은 사이코패스와 그의 성장배경간의 연관성을 다시 한 번 주목하게 한다. 사실 사이코패스 성향의 범죄자와 그의 성장 배경 간의 밀접한 관계는 이전부터 많이 다뤄져왔다. 연쇄살인마의 불우한 가정환경과 아동 학대 피해자였던 사이코패스 등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미 법무부에서 지난 2012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죄수 중 41%가 가정 폭력 목격, 37%가 가정 폭력을 직접 경험한 바 있는 등 상당수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괴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흔히 ‘사이코패스 유전자’라고 알려진 MAOA 유전자는 사실 모든 X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로 모든 사람이 이를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잠재적 범죄자이지만 우리의 환경이 우리 안의 괴물을 잠재웠다는 것이다.

팰런은 그의 저서 『괴물의 심연』에서 이러한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팰런은 자신이 사이코패스와 유전자 및 뇌 구조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그의 조상 중에는 자신이 부인을 살해한 살인자까지 있음을 밝혔다. 또한 평소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했고 그의 딸은 그림을 그릴 때 그를 종종 어두운 그림자처럼 그렸다는 것도 얘기했다. 그럼에도 팰런은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았고 그 이유로 대부분의 사이코패스와는 다른 환경을 꼽았다.

“나는 결단코 범죄자가 아니다 ...(중략)... 살인자들은 학대를 당한 적이 있었고 나는 그런적이 없었다.”

그의 집안에는 대대로 일반인보다 많은 MAOA-A 유전자가 흘렀지만 그의 증조부 때는 발현됐음에도 그에게서는 발현되지 않은 것은 후성유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병을 잠재우는 후성유전


후성유전이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질병 치료에 있다. 후성유전에 의하면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스위치 역할을 하는 메틸기 분자나 정도를 조절하는 히스톤 단백질에 의해 발현 여부와 정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병을 발생시키는 유전자의 스위치를 꺼버리면 어떻게 될까? 해당 유전자는 발현되지 않고 질병을 치료, 아니 예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그동안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질병에도 해당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암이다. 암이 발병하면 암 유전자에 의해 일반 세포들도 암세포가 돼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후성유전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부모가 암이 있고 자녀세대에 암 유전자가 유전됐다면 암을 피해갈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후성유전에 따르면 암 유전자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발현을 막을 수만 있다면 암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Fragile-X 증후군’이 있다. 이는 유전성 지능저하의 가장 흔한 원인으로 꼽히는 질환으로 주로 남성에게 많이 나타나며 심각한 지적 장애, 언어발달 저하, 자폐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이 증후군은 정상적인 인식 발달에 필수적인 FMR1이라는 유전적 요소가 메틸기 분자에 의해 발현되지 않아 발생한다. 이는 암과는 반대로 FMR1의 발현을 돕는 방법을 통해 치료가 가능한 셈이다. 이외에도 후성유전에 의해 유전자가 발현되거나 사장돼 발생하는 질병들이 많이 존재한다. 정확히 어떤 유전자가 어떤 질병을 발생시키는지 아직까지 연구 중이지만 후성유전은 새로운 치료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유전자 운명론을 믿었던 사람들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후성유전.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천재성이 드러날 수도, 우리안의 괴물이 깨어날 수도 있다. 또한 그동안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각종 질병까지도 후성유전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된 만큼 아직 새롭고 낯선 학문이지만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앞으로 더 큰 투자와 연구가 필요함이 분명하다.

글 서형원 기자
ssyhw35@yonsei.ac.kr
<자료사진 스켑티즈>

서형원 기자  ssyhw35@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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