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새해가 밝았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2016년과 어느새 마주했다. 더불어 5학기의 연세춘추 생활도 끝났다. 시원함보다는 어째 걱정이 앞선다. 2016년의 춘추는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걱정거리가 너무 많다. 사실 춘추에 걱정이 없었던 적이 있을까마는 앞으로의 걱정거리는 너무하다싶을 정도이다. 어련히 잘 헤쳐 나가겠거니 싶다가도, 춘추의 미래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미간을 찌푸리는 습관이 생겼다. 짜증, 분노, 슬픔, 무력, 피곤 등 수많은 감정이 미간의 주름 속에서 교차한다. 그 감정의 선들이 느껴지는지, 주위 사람들은 가끔 내 미간을 톡톡 두드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멋쩍게 웃어넘기고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정의 밑바닥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미간의 주름 속에 가장 크게 자리한 감정은 ‘외로움’일 것이다. 워낙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해서인지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는 한다. 스무 살 때부터 집에서 나와 지냈음에도, 외로움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혼자 있지 않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 외로움을 느끼면 더욱 외롭고 더욱 슬프다. 이 감정은 편집국장을 맡은 한 학기 동안 자주 느끼고는 했다. 특히,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외로움은 몇 배로 더해졌다.

SNS를 돌아다니다가 외로움에도 피로가 있으면 좋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외로움이라는 것에 피로가 쌓이면 그 외로움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한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헌데 생각해보니, 내 외로움은 피로를 겪는 것 같기도 하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끊임없이 글을 읽다보면, 피곤함은 외로움을 짓누른다. 토요일 아침이 밝아오면, 내 외로움은 극도로 피로한 상태인 것이다. 그런 상태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미간에는 주름이 잡힌다.

새해에는 나를 짓누르는 감정에 초연해지려고 한다. 조금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무엇에든 감정을 앞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어가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춘추 일도 그러한 일 중 하나였다. 어떠한 것도, 어떠한 상황도 모든 인간을 100% 만족시킬 수는 없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을 완벽히 깨닫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나보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무언가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드는 것 같다. 깨닫고 다짐하며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미간은 찌푸려져 있다. 이것은 무슨 감정일까.

연세춘추에서의 마지막 글이 끝나간다. 끝났다. 후련하다. 아쉽다. 쓸쓸하다. 시간은 참 무섭게도 빨리 흘렀다. 아쉬움과 미련을 뒤로 하고, 좋아하는 시 하나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쯤에서 남은 것이 없으면
반쯤은 성공한 거다
밤을 새워 어둠 속을 달려온 열차가
막다른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처럼
길게 한 번 울부짖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종착역

긴 나무의자에 몸을 깊숙이 구겨넣고
시린 가슴팍에
잔숨결이나 불어넣고 있는
한 사내의 나머지 실패한 쪽으로
등 돌려 누운 선잠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이 툭 떨어지고
그 위엔 오늘 날짜
별 내용 없는 조간신문이
조용히 덮이는

다음 역을 묻지 않는
여기서는 그걸 첫차라 부른다

이덕규, <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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