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숫자 한자리가 바뀌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인 만큼 한해가 떠나가는 것 역시 속절없다. 당신의 지난 2015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바쁘게 살아가는 도중에도 놓칠 수 없는 의미 있는 순간들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들을 SNS에 올릴 사진 속뿐 아니라 머릿속에도 확실히 새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런 이들에게 ‘길드로잉’을 제안한다. 말 그대로 잠깐의 시간을 내서 우리가 다니는 수많은 ‘길’들을 그리는 것이다. 흔한 사진과 달리, 풍경을 담기 위해 오랜 시간 대상에 집중해야하기에 사소한 광경 하나하나까지 드로잉 북은 물론 머릿속에도 새길 수 있다. 그렇다고 길드로잉이 어렵냐고?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부터 손재주가 없는 기자가 담아도 그럴듯한 지난 2015년 12월 31일의 풍경을 보자.

광화문 광장, 할리스 카페 2층에서

우선 지난 한해 많은 일들이 있었던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하얀 천막과 노란리본물결이 수놓은 광장을 둘러싸고 수많은 차들이 바삐 움직였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그려야할지 막막했지만, 멈춰있는 대상인 이순신 장군을 시작으로 광장의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리려고 하는 순간 귀신같이 움직이는 사람들. 이것이 드로잉의 묘미 아닐까. 또한 한 풍경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지나갈 때는 간과했던 모습들이 보인다. 특히 교보생명건물의 명물인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라는 글판의 문구를 곱씹어보게 됐다. 풍경도 그렇다. 초 단위로 변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매일 같은 풍경은 사실 없다. 이런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길드로잉의 매력이다.

북촌 한옥마을, 북촌 8경 중 7경에서

다음은 우리 한옥이 주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사랑받는 북촌 한옥마을을 찾았다. 한해의 마지막 날답게 평일임에도 찾는 이들로 북적였다. 기자가 그림을 그리기로 한 골목은 마침 북촌 8경 중 7경으로, 기와지붕 사이로 보이는 남산타워가 독특한 멋을 주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관광객들의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음을 배경음악으로 집중해서 기와를 하나하나 그리고 색칠하다보니 30분 동안은 한 자리에 멈춰 있었다. 중국어, 영어 등 세계 각국의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길 몇 번이나 반복해 관광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렇듯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곁들여 풍경을 추억할 수 있는 것, 이 역시 길드로잉이 주는 재미다. 그림을 마무리 할 때 즈음 하늘이 다홍색으로 물들었다. 색연필을 챙겨왔더라면 더 다채로운 표현이 가능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았지만 기자는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드로잉의 재료는 정해져 있지 않으니 각자 원하는 도구를 챙기는 것도 잊지 말자.

보신각, 타종행사 6시간 전

북촌에서부터 쭉 걸어 내려온 보신각 앞은 타종행사준비가 한창이었다. 방송사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무대를 세팅하고 경찰과 경호원들이 타종행사를 위해 주변을 정리했다. 보신각에는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서 스케치를 시작했다. 구도는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현장에서 고개를 살짝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오늘의 주인공 ‘종’을 중심으로. 길드로잉은 자신이 원하는 풍경만을 담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종로 한복판에 서서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조금 부끄러웠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카메라를 꺼내들어 보신각을 찍고 갈 때는 남들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한편 점점 바람이 매서워지며 손이 얼어 그림을 그리기 힘들어졌다. 이것이 너무 추운 날에는 야외드로잉은 추천하지 않는 이유다. 기자는 추위 속에서 스태프의 “하나 둘 셋, 둘 둘 셋” 마이크테스트 구음을 배경음악 삼아 바삐 손을 움직였다.

연세로, 파리바게트 2층에서

학교 앞이라니 종강 이후로 다시는 오기 싫은 곳 아니던가. 그러나 한해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마지막 코스를 가장 오기 싫지만 다음 학기에도 어김없이 와야 하는 곳으로 잡았다. 몸을 녹이기 위해 자리 잡은 파리바게트 2층에서는 우리대학교 신촌캠 근처 일명 ‘빨간 거울’ 잠망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연말을 맞아 전봇대마다 걸린 빛나는 일루미네이션도 2층이라 가깝게 보이며 아름다움을 더한다. 오늘도 역시나 잠망경 앞은 만남의 장소로 사람들이 바글바글. 이 많은 사람을 다 그려야할까? 그럴 필요는 없다. 앞서 말했듯 담고 싶은 것만 그릴 수 있는 것이 길드로잉의 장점 아니던가.
우선 유플렉스 건물과 지하도 입구, 잠망경을 그리고 전봇대를 중심으로 특징만 잡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그리는 동안에도 계속 움직이기에 배경을 먼저 그린 후 재밌는 광경만 포착해서 채워 넣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자와 같은 드로잉 초보는 건물처럼 형태파악이 쉬운 것을 그리는 것을 추천한다. 배경을 그려 넣는 동안 시야 한 편에서 흥미로운 광경을 포착했다. 바로 벤치에 앉아있는 담요를 두른 고양이탈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드로잉을 마치고 내려가서 구경할까 싶었더니 마치기도 전에 유유히 고양이탈 청년이 일어섰다. 괜히 아쉬웠지만 드로잉을 하지 않고 단순히 지나가던 길이라면 지나쳤을 것 같아 더더욱 길드로잉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이 기사를 읽는 내내 흥미롭고 마음속 한편이 설렜다??당장 무지노트 한 권과 좋아하는 필기구 한 자루를 챙겨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어디든 좋다. 밋밋하다 느껴지는 집 앞도, 그만보고 싶은 등굣길도 사실은 매순간 다른 풍경을 품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유롭게 펜 가는대로오늘 그린 풍경 한 장이 먼 훗날 문득 생각날 추억 한 장이 돼있을 것이다.

 

글·그림 이주인 기자
master0207@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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