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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주년특집]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다1960년대부터 1995년까지, 혼란의 사회 속 「연세춘추」
  • 권아랑 기자, 최명훈 기자, 한선회 기자
  • 승인 2015.11.08 00:57
  • 호수 1761
  • 댓글 0

지난 1957년 「연세춘추」로 제호를 바꾼 뒤 지금까지 우리신문은 우리대학교의 공기(公器)로서 그 사명을 다해왔다. 특히 60년대부터 3·15부정선거와 4·19혁명, 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유신 통치, 서울의 봄, 87년 민주화 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대학생으로서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검열 속 「연세춘추」의 노력

1960년대 우리신문은 암울한 시대 분위기를 밝히는 등불 같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4·19혁명이 있고 나서, 우리신문은 201호에 ‘한국의 십자군 운동’이라는 제목의 사설과 ‘4·19 학생시위에 3천여 명 참가’, ‘3·15부정선거와 마산 사건의 책임을 규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크게 싣는 등 이승만 정권의 비판을 담은 내용을 보도했다.
1962년 3월 15일에는 원래 속해 있던 학생처로부터 처음 독립했고, 같은 해 12월 10일에는 부속지로 「The Yonsei Annals」를 창간했다. 당시 우리신문은 학생처로부터 독립해 편집권이 비교적 자유롭게 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신문을 제작한 편이었다. 그러나 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 관련된 기사가 정부방침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삭제 당하는 등 당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유신통치가 있었던 1970년대는 검열이 더욱 심해졌다. 시위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폭행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1971년에 학교 측은 학생기자 대신 기성인들이 학내기자를 맡는 ‘전임기자제’의 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75년에는 다시 학생처로 귀속돼 편집권이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당시 검열은 신문 제작 후에 치안본부나 중앙정보부 등에서 배부의 유무를 지시했다. 특히 10·26사태가 있었던 1979년 학기 초에는 검열이 극에 달했고, 1980년 2학기까지는 계엄사의 사전검열로 인해 1980년 5월 874호는 4, 6면의 기사 전체가 삭제되기도 했다. 우리신문사 35기 편집국장을 지낸 강상현 동문(신방·75)은 “학내에 사복경찰, 중앙정보부 요원이 들어와 기사를 사찰했다”며 “해학·풍자 등 돌려 말하기 식으로 기사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우리신문은 1973년 기자칼럼 <십계명>을 게재하며 대학의 울분과 고민을 토로했고, 1977년에는 학생칼럼 <청송대>와 기자칼럼 <기자비망록>을 신설해 학생과 기자들의 의견을 실으며 비민주적인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강씨는 “당시 기자들은 투사와 같은 자부심으로 활동했다”며 “대학신문이 상대적으로 사회에 대한 발언욕구를 배출할 수 있었기에 인정을 받던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민주화의 시대, 그 속의 춘추

1980년대 우리 신문은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언론에 대한 검열과 배포, 중단도 많았다. 1982년에는 929호 1면에 실린 학생시위 기사를 비롯해,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대한 서평 등을 문제 삼아 인쇄중단 조치를 받는다. 이에 편집국장을 비롯한 13명의 기자가 자율적인 편집권을 주장하며 총사퇴를 결의하기도 했다. 1983년에 우리신문은 여러 교내시위에 대해서 다루고자 했지만, 이를 문제시한 학교 측에 의해 배부가 중단됐다. 특히 우리대학교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졌던 1987년 우리신문은 호외를 발행하면서 그 사태의 중심에 섰다.
한편 『The Yonsei Annals』는 1981년 우리 신문사로부터 독립해 학내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제반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면서 우리나라 대학 영자신문 중 선도적인 위치를 이끌어나갔다.

87년 민주화 그리고 변화

1988년 기나긴 군부 독재 시기가 끝났지만 여전히 우리신문은 편집권 침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88년 9월 10일 ‘이한열 추모비’ 제막식 사진 속의 ‘광주학살 부정비리 주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란 현수막 부분이 문제가 돼 신문 제작이 중지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편집권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당시 기자들은 학교 측으로부터 편집자율권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구두로 받았지만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어 1989년 3월에도 당시 주간·편집인 교수가 ‘전투경찰은 해체돼야 한다’와 ‘대학신문의 과제’ 기사의 전체 삭제 등을 요구해 기자들은 ‘편집자율권’을 내걸고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이후 6주 간의 투쟁 끝에 1989년 5월 우리신문은 ‘연세춘추 독립기구화 개정합의문’을 발표해 학생신문으로의 완전한 독립기구화를 실현하는데 한 발짝 다가섰다.
70, 80년대 군부 독재 시기에 우리신문은 민주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바라봤지만, 민주화 이후 다원화되는 사회에 발맞춰 여러 사회적 이익을 대변하고 대학 사회를 넘어선 다양한 관심사를 전달해야 했다. 또한 90년대에는 신세대라고 불리는 세대의 탈정치화와 학생운동에 대한 무관심이 자리 잡게 됐다. 이는 90년대 초 춘추 내부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겪은 기수와 그다음 기수 간 마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신문사 71기로 시사부장을 마친 신준호 동문(경제·93)은 “90년대 초는 사회적인 변화기로 춘추 내부에서도 여러 의견과 생각들에 대한 마찰이 있었다”며 “그 시대의 다양성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전했다.
90년대부터 신문의 제작방식은 조금씩 변해 현재의 신문제작방식의 전신이 됐다. 신씨는 “매주 금요일 저녁 6시에 모든 기사가 승인되면 그 기사들을 갖고 인쇄소에 가 편집 작업을 했다”며 “2박 3일 동안의 편집 작업이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추억이 많이 떠오른다”고 전했다. 이렇게 이전에는 연판*의 대장을 떠서 판 작업을 완료했다면, 9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며 전자출판 방식을 도입하면서 좀 더 현대화된 방식으로 제작방식이 변모했다.

*연판 : 활자를 배열한 판에 전체 틀을 만든 다음, 합금을 녹여 부어 뜬 인쇄판.

권아랑 기자
chunchuarang@yonsei.ac.kr
최명훈 기자
cmhun@yonsei.ac.kr
한선회 기자
thisun019@yonsei.ac.kr

권아랑 기자, 최명훈 기자, 한선회 기자  chunchuarang@yonsei.ac.kr, cmhu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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