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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주년특집] 연세춘추의 역사, 김우식 동인을 만나다우연한 시작이 맺은 연세춘추와 그의 인연
  • 남유진 기자, 김민호 기자, 전준호 기자
  • 승인 2015.11.07 18:39
  • 호수 1761
  • 댓글 0

어느 한 집단의 역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내내 연세춘추의 역사와 함께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김우식 명예교수(우리대학교·화학공학)다. 김 교수는 연세춘추 학생 기자를 거쳐 주간 교수, 편집인, 그리고 발행인(총장)까지 역임했으며 현재는 창의공학연구원의 이사장을 맡아 ‘창의적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이렇게 연세춘추와 인연이 깊은 김 교수를 우리대학교 GS칼텍스 산학협력관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 창의공학연구원 이사장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는 김우식 명예교수(우리대학교·화학공학)

연세춘추와 김우식

충남 공주에서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화학공학과 57학번으로 입학한 김 교수의 대학생활은 그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삼촌의 권유로 공대에 진학하긴 했지만 학교생활에선 흥미를 느낄 수 없었고 명문고 출신의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항상 혼자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1학년을 마치자마자 휴학을 결심했을까. 이렇게 방황하던 김 교수를 붙잡은 것이 바로 당시 연희춘추라는 제호를 가지고 발행되던 연세춘추다. 휴학을 신청하러 가는 길에 기자 모집공고를 본 김 교수는 우리신문사의 사무실을 찾아가 다짜고짜 학생 기자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돌하기 그지없던 이런 김 교수의 행동에 당시 편집국장은 원고지를 한 장 던져주고 글을 쓰게 했고, 고등학교 문예부 출신이었던 김 교수는 뛰어난 글 솜씨를 발휘해 우리신문사에 특채됐다.
학생 기자로 대학시절을 보낸 김 교수는 이후 조교수로 재직하던 중 안세희 전 총장에게 우리신문의 주간 교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김 교수는 “당시는 학교 안에도 중앙정보부 소속의 요원들이 돌아다니던 시절”이라며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쓰는 소위 ‘튀는’ 글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간 교수란 자리는 한없이 부담스러웠지만 김 교수는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김 교수밖에 없다”는 안 전 총장의 말에 주간 교수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주간 교수로 부임한 뒤 활발한 학생 운동 사이에서 ‘불구죽죽한’ 글을 쓰던 학생기자들이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만큼은 막기 위해 노력했다”며 “주간으로서 가장 큰 목표는 ‘학생들의 안전’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학생들과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남이섬 같은 곳에 함께 여행을 가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일도 다반사였다”며 “학생들과 항상 ‘웬수 같은 사이’였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웃어보였다. 김 교수의 노력 덕분인지 주간 교수로 있는 2년 동안 학생들이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은 없었다. 이후 김 교수는 편집인으로 우리신문사와 함께 영자신문사(現 Yonsei Annals), 연세교육방송국(YBS)을 맡게 됐고, 주간 교수 시절을 포함하면 총 3년간 연세대학교의 학내 언론사를 책임졌다. 이후 김 교수는 학생처장, 총무처장, 학장, 부총장을 거쳐 우리신문의 ‘발행인’인 총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김 교수는 “지금 돌이켜보면 연세춘추 덕분에 총장까지 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당시 1년 2개월 남짓한 기자 생활 동안 너무나 재밌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방황하던 자신을 잡아준 연세춘추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회상했다.
학생기자에서 주간 교수, 편집인을 거쳐 발행인까지 역임하며 우리신문사의 역사와 함께한 김 교수에게 ‘연세춘추’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김 교수는 “학생기자 시절부터 몸을 담았던 곳이다 보니 애착이 가는 것이 사실”이라며 “총장이 돼서도 연세춘추가 학생스러운 발랄함과 연세대학교다운 스마트함을 잃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사람 사는 게 곧 인간관계다

김 교수는 인터뷰 중간 중간 ‘사람’을 강조했다. 기자시절 김 교수가 가장 좋아한 일은 여러 교수들에게 원고 청탁 심부름을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 교수는 신문 제작 후 동기들과 짜장면을 먹고 양주를 마시던 추억도 잊지 않고 있었다. ‘상대방이 등 돌리기 전까지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김 교수의 철학은 그의 일생을 통해 나타났다. 기자 활동을 마친 김 교수는 학교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안다는 이유로 학생 화학공학회 회장으로 무투표 당선됐고 이후 김 교수는 4·19혁명 직전인 3월, 전국의 12개 대학 학생들을 모아 ‘전국 화공 학생 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 때의 인연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김 교수는 “당시 함께했던 서울대 이기준 전 총장과의 인연으로 총장 재직 시절 우리대학교와 서울대 교수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했다”며 “요새는 교류가 예전 같지 않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인생이란 곧 인간관계”라며 “인간관계는 자기 하는 것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의 ‘인간관계론’은 교수 시절에도 이어졌다. 편집인 이후에 맡은 학생처장 시절에는 최루탄 가스가 빗발치는 시위는 다반사였고 당시 우리대학교 학생들과 고려대 학생들이 연고전이 끝난 뒤 동양공전 설인종군을 경찰 쁘락치*로 오해해 취조 중 사망시키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이 참여정부의 요직으로 들어가 김 교수가 대통령과의 인연 한 줄 없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지금껏 스쳐간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대선에서 대통령을 찍지도 않은 내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인연이 다가올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연세인이 나아가야 할 길

김 교수는 초대 총장인 용재 백낙준 선생의 말을 인용해 “연세는 연세인의 연세요, 이 나라의 연세요, 세계 속의 연세여야 한다”고 말하며 연세인들이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는 기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 교수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그 길을 향해서 하늘이 감동할 정도의 정성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며 미래의 자랑인 연세인들에게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대학교 후배들에게 전할 말이 있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맹자의 삼경이라는 말을 꺼냈다. 김 교수는 “삼경 중 인경이라는 것이 있다”며 “인경이란 무엇인가 본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지도자는 바로 인경 같아야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지도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며 “연세인들이 앞으로 각계각지에서 활약하는, 인경 같은 지도자들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일흔여섯의 나이에도 연세인의 기상을 마음에 품고 후학 양성에 힘쓰는 그가 바로 이 시대의 ‘인경’은 아닐까.

*쁘락치 : ‘Фрактия’라는 러시아 말에서 유래된 말로 어떤 단체에 몰래 들어가 활동하는 스파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경찰을 위해 시위대 등에 몰래 들어가 정보를 제공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글 남유진 기자
yujin221@yonsei.ac.kr
김민호 기자
kimino@yonsei.ac.kr
사진 전준호 기자
jeonjh1212@yonsei.ac.kr

남유진 기자, 김민호 기자, 전준호 기자  yujin221@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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