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90%를 위한 노력, ‘적정기술’

TV, 컴퓨터, 스마트폰 등 당장 우리 주위만 둘러봐도 현대사회는 기술과 기계에 대한 의존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접하는 많은 기술들은 시장에서 구매력이 있는 전 세계 10% 사람들에게 잘 팔릴 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술에서 소외된 90%를 위해 적정한 인간중심 기술에 대해 고민하며, 이를 통해 우리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술이 있다. 바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다.

적정기술이란

적정기술이란 기술이 사용되는 공동체의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그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고액의 투자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으며, 현지에서 나는 재료를 활용해 지역 주민들에게 소비될 제품을 만들어낸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적정기술 제품은 ‘라이프 스토로우(Life Straw)’다. 라이프 스토로우는 오염된 물의 미생물을 자동으로 걸러내는 휴대용 정수기 빨대로, 오염된 물로 인한 수인성 질병을 예방하고 식수부족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그 외에도 적정기술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물을 담아 먼 길을 가기에 편하도록 만든 원통형 물통인 ‘큐 드럼(Q Drum)’ ▲전기 없이 낮은 온도로 채소나 과일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게 해주는 항아리 냉장고 ‘팟인팟 쿨러(Pot-in-pot-cooler)’ ▲산림의 황폐화와 실내 매연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하는 어린이들에 대한 대안으로 개발된 원료 ‘사탕수수 숯’ 등이 대표적으로 알려졌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나눔과 기술’의 대표이자 적정기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포항공과대 산업경영공학과 장수영 교수는 “모든 기술은 구매력 있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개발돼왔다고 할 만큼 지금까지의 기술은 시장을 위해서 움직여왔다”며 “이러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제품들을 개발하는 것이 적정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적정기술은 소수의 욕구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에서 소외된 90%를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철학을 연구하는 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손화철 교수는 “적정기술은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에 집중하며, 기술을 전수받은 사람들이 직접 그것을 만들어 사용하게끔 하는 것이 목표”라며 “이는 맹목적인 진보와 대량생산 체계를 당연시하는 기존 기술과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라고 전했다. 즉, 적정기술의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환경 친화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이다.

▲ 물의 미생물을 자동으로 걸러내는 휴대용 정수기 빨대 ‘라이프 스토로우(Life Straw)’로 물을 마시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소외된 이들을 위해 시작된 적정기술


적정기술의 시작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영국의 값싼 직물이 유입돼 경제가 종속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간디는 직접 물레를 돌려 옷을 짓는 운동을 시작했다. 물레를 돌리는 것은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누구든 필요한 만큼의 옷을 만들 수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적정기술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후 간디에게 영향을 받은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가 지난 1965년에 유네스코 주최로 열린 컨퍼런스에서 제안한 ‘빈곤 탈출 및 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이 적정기술의 첫 번째 줄기가 됐다. 슈마허는 이 기술이 개발도상국(아래 개도국)의 토착 기술보다는 우수하지만, 선진국의 거대 기술에 비해서 값싸고 소박하다는 의미에서 ‘중간기술’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중간기술이라는 용어가 열등한 기술인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고, 발전의 사회적·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기술적인 측면만을 강조한다는 비판이 대두되면서, 중간기술 대신에 적정기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적정기술은 개도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자본 집약적이고 자원과 에너지를 과소비하는 기술에 대한 ‘대안기술’ 또는 선진국의 사회적 격차 해소를 위한 ‘사회적 기술’의 형태로 발전해 왔다.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혹은 우리나라에서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손 교수는 “첨단기술이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지 못하고,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와 지속 불가능한 개발이 이어지는 데 대한 반작용”이라며 “모든 인류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정기술 운동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발전된 국가의 기술이 다른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기에 적정기술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또한 ‘적정기술미래포럼’ 대표인 한밭대 화학공학과 홍성욱 교수는 “제품을 비용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굉장한 혁신이며, 매우 창조적인 작업”이라며 “요즘 많은 선진국에서 중산층이 무너져 구매력이 없어졌지만, 그들이 여전히 좋은 성능을 바라기 때문에 개도국에서 만들어진 혁신적 제품들이 선진국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학 사회 속 적정기술

대학 사회 안에서도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효성그룹이 지원하는 대학생 해외봉사단 ‘블루챌린저’는 도움이 필요한 국가로 떠나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적정기술을 찾아내고, 직접 그 기술을 접목한 제품을 현지에 전파하는 활동을 한다. 올해 블루챌린저 봉사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지현(화공·09)씨는 “한 사람의 창의적인 생각이 소외된 많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멋있어 적정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개도국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그 지역의 상황과 맥락을 이해해야 하므로 현지의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이 활동은 매우 좋은 기회였다”고 전했다. 이어 김씨는 “앞으로 국내에서 적정기술적인 문제 해결 방식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소외된 계층을 위한 적정기술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취지로 개최하는 ‘창의설계 경진대회’는 나눔과 기술의 주최로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전국의 많은 대학생이 참여하고 있다. 올해 대상을 받은 팀은 개도국에서 인큐베이터가 없어 저체온증으로 죽어가는 신생아들을 위한 ‘라이프 히트 소스(Life Heat Source)’를 만든 경상대 ‘팜글로리’팀이다. 라이프 히트 소스는 신생아들을 위한 체온 유지 핫팩으로, 핫팩을 물에 중탕해 아기 포대기에 싸서 영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팜그로리’의 팀장인 경상대 신혜련(약학·11)씨는 “적정기술과 관련된 주제로 진행되는 학교의 캡스톤 수업으로부터 시작해 경진대회에 참여하게 됐다”며 “라이프 히트 소스가 실용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개도국 신생아들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우수상을 수상한 강원대 ‘콜럼버스의 지혜’팀은 손의 움직임이 불편한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손 장애인용 마우스’를 발명했고, 이후 이 기술의 특허가 출원됐다. 이를 발명한 강원대 노승우(기계메카트로닉스공학과·10)씨는 “우리나라 특허에는 상업적인 아이디어는 많지만 구매력이 없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기술이 정말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고,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술들을 보며 적정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며 “적정기술의 매력은 자동차나 반도체 등의 성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적정기술이 지속가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처럼 적정기술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활발하지만, 이런 참여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우려도 있다. 우리대학교에서 열리는 ‘적정기술아카데미’를 통해 대학생들을 만나고 있는 홍 교수는 “적정기술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은 직업까지 연결되기 어려운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생들이 소외된 이웃을 위해 고민하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적정기술에 매력을 느끼고 관심을 두지만, 막상 취업을 앞둔 현실에서 활동을 지속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 교수는 “적정기술은 그동안 비즈니스와의 결합이 없어 발전이 미미했다”며 “어떤 기술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비즈니스 모델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좋은 기술을 개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지속할 수 있도록 비즈니스 모델로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적정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손 교수는 “현재의 구호 중심의 적정기술 운동에서, 기술사회 전체를 적정하게 만드는 방안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돼야 한다”며 “저개발국들을 돕기 위한 적정기술만이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지금보다 적정한 기술이 어떤 것일지 고민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장 교수는 “적정기술은 대학에서 과목을 개설하고, 학생들에게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봉사활동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좋은 주제”라며 “공학, 경영, 지역개발, 인문사회 등 모든 것이 종합돼 있는 학문임으로 융합적인 부분으로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전했다.

배고픈 자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처럼 적정기술은 지구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더 근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 사회, 그리고 전 세계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적정기술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좋은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적정기술이 많은 병폐와 아픔을 안고 있는 현대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문세린 기자
peace.maker@yonsei.ac.kr
<자료사진 A Trifilm Story, Mintpress news>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