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게임』과 『메이즈 러너』로 풀어내는 디스토피아

머지않은 미래의 세계를 무대로 한 핵전쟁, 거대한 자연재해, 대응할 틈도 없이 세상을 덮친 신종 전염병…. 갖가지 이유 중 하나로 한차례 종말을 맞은 지구에서 자본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을 주축으로 강력한 독재정권이 들어선다. 살아남은 자 중 권력의 끄트머리에라도 가까운 자들은 독재자가 내려준 부와 영예를 나눠 갖고 그들만의 ‘이상 국가’에 충성을 바친다. 권력과 먼 힘 없는 자들은 재건마저 이뤄지지 않은 변두리에서 지옥 같은 ‘진짜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소설과 영화 등 미디어에서 흔히 그려지는 ‘디스토피아(Dystopia)’의 모습이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작품들이 스쳐 지나가지 않는가? 위와 가장 유사한 작품으로는 지난 2013년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있다. 『설국열차』는 기상 이변으로 빙하기를 맞은 미래의 지구에서 유일하게 생존자를 싣고 달리는 열차를 배경으로, 꼬리 칸의 빈민층과 권력을 가진 호화로운 앞쪽 칸의 극심한 불평등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상향인 ‘유토피아(Utopia)’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등장한 디스토피아는 20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SF(Science Fiction)장르의 세계관으로도 사용돼 주로 인간 가치의 결여, 기계의 지배, 전체주의 검열사회 등 여러 불안요소가 지배하는 사회를 뜻한다.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디스토피아는 가장 어두운 가상세계를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고, 인간이 나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

생존경쟁에 내몰린 아이들

▲영화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 장면

최근 각종 불행한 형태의 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에서 십대 소년소녀가 고군분투하는 작품들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바로 『메이즈러너』와 『헝거게임』이다. 두 작품 모두 소설이 원작이지만 인기에 힘입어 영화화돼 『메이즈러너』는 최근 두 번째 시리즈인 ‘스코치 트라이얼’이 지난 9월 16일 개봉했고, 『헝거게임』은 마지막 시리즈 ‘모킹제이’의 두 번째 편 ‘더 파이널’을 오는 11월에 개봉할 예정이다.
『메이즈러너』는 자연현상에서 발발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멸망한 지구에서 ‘WICKED(아래 위키드)’라는 범국가적 단체가 백신을 찾아 십대 소년소녀들을 데리고 비윤리적 실험을 서슴지 않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아무것도 모른 채 미로에 갇혀 지내게 된 십대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작품 속 십대들은 매일 밤 바뀌는 미로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을 마주해가며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미로를 탈출한다 해도 뒤이어 마주한 ‘진짜 현실’과 위키드의 계획에 맞서며 소년들은 또다시 생존을 걸고 달려야 한다.
『헝거게임』의 배경은 모종의 이유로 멸망한 북미대륙에 세워진 ‘판엠(Panem)’이라는 독재국가이다. 모든 부가 수도 ‘캐피톨(Capital)’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나머지 13개의 구역이 반기를 들었으나 좌절되고, 그 과정에서 한 개의 구역은 사라진다. 이후 독재자는 12개의 구역에서 십대 소년소녀를 한 명씩 총 24명을 뽑아 모든 것이 통제된 경기장에 모아두고, 단 한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헝거게임’을 벌이게 한다. 모든 시합 장면을 24시간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하지만 ‘캐피톨’과 체제에 순응한 사람들은 죄의식 하나 없이 그것을 유흥으로만 받아들인다. 독재자가 헝거게임을 본보기로 삼아 공포정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부만이 눈치 채고 있을 뿐이다. 『헝거게임』의 주인공은 이 살인게임에 차출된 소녀다. 작품은 이 소녀가 독재자가 통제하는 게임에 이변을 일으키고 살아남으며, 게임을 넘어 혁명의 불씨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메이즈러너』와 『헝거게임』의 소년소녀들은 둘 다 ‘살아남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라는 공통점이 있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영화 『헝거게임:더 파이널』

최근 청년들 사이에서 한국사회를 일컫는 말로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지옥을 뜻하는 헬(Hell)과 조선의 합성어로 젊은이들은 한국살이를 ‘지옥’같다고 자조하는 것이다. 또한 ‘금수저’와 ‘흙수저’처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지위를 수저에 빗대어, 본인의 성취와 관계없이 부모의 계급이 곧 자신의 계급이 되는 현재 한국 사회의 세태 역시 풍자한다. 디스토피아 장르가 인기를 얻는 이유 중 하나가 충분히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두 작품이 그려내는 배경이 꽤 닮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디스토피아가 사람들에게 흥미롭게 다가가는 이유에 대해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저널리스트이자 정치사회 작가 매트 리들리(Matt Ridley)는 저서 『이성적 낙관주의』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부정적인 쪽으로 쉽게 치우치곤 하는 점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는 생활수준 향상과 같이 미래의 긍정적인 변화는 단기간에 알아차릴 수 없지만, 전쟁과 경기침체 등 미래의 부정적 변화는 사람들의 관심을 단번에 끄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그러한 부정적 미래를 그리는 작품이 출판시장에서도 더 많은 관심을 끌고 더 높은 판매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비관론자들의 ‘디스토피아처럼 미래에 대해 암울한 예측만 나오면 다가올 위험을 인류가 손 놓고 가만히 받아들일 것’이라는 판단에 대해, 매트 리들리는 석탄을 대체할 화석연료는 없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후로부터 6년 후 석유 시추가 가능해진 점을 들어 ‘인간은 진보할 것이며, 직면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저술했다.
리들리의 낙관적인 말처럼, 디스토피아에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예측뿐 아니라 잘못된 미래를 피하고 싶은, 어떻게든 피할 것이라는 인간의 희망 역시 반영돼 있다. 그렇기에 디스토피아 작품에는 ‘극복’의 코드도 함께 존재한다. 『메이즈러너』와 『헝거게임』 역시 생존게임에서 살아남음과 동시에 국가나 체제에 대한 반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허구와 현실의 사이에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에 부딪히며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결국엔 극복해내는 작품 속 주인공의 시점과 같이하며 우리는 막연히 부정적 미래 혹은 현실에 낙관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영화 기제 중 하나인 ‘봉합(suture)’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봉합을 이론화한 대니얼 다얀(Daniel Dayan)은 그의 논문 「고전 영화의 지도 약호(The Tutor-code of classical cinema)」에서 봉합 체계가 영화 고유의 의미화 과정을 은폐하는 가운데 관객이 영화에 허구적으로 동일화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봉합이란 현실에서 쉽게 해결되지 못할 갈등을 그리지만, 관객이 모순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해결시킨 뒤 관객이 그 갈등에 대해 현실에서 고민하지 않도록 우매화시킨다는 것이다. 봉합은 주로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전략으로 쓰인다. 우리가 ‘해피엔딩’이라고 예상하는 영화는 대부분 결말이 봉합되는 경우다.
『메이즈러너』와 『헝거게임』에서 그려내는 디스토피아 역시 ‘주인공 소년소녀가 부조리한 체제를 붕괴시킬 것이다’라는 예상되는 해피엔딩이 있다. 만약 두 영화가 현실이었더라면 소년소녀의 반란은 시도조차 어려웠거나 금방 좌절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구이기에 그들의 반란이 해피엔딩을 맞더라도 우리는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이러다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실제로 마주할 디스토피아에도 ‘어떻게든 극복하겠지’라며 봉합된 결말만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이에 우리대학교에서 ‘시네마 속 인간 심리’를 가르치는 정지연 강사는 “현실에서 간단히 해결되지 못할 갈등이 그럴싸하게 해결되는 작품을 볼 때는, 단순히 그 결말에 대리만족할지 현실로 끌고 와 부조리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할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결국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포와 불안을 제시하는 디스토피아 작품 속 이야기를 단순히 허구로 받아들일지 현실에 빗대어 성찰할지는 당신의 몫이다.
디스토피아는 과연 책과 스크린 속에만 존재할까. 『메이즈러너』와 『헝거게임』은 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현실과 닮아있다.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무한경쟁을 강요받고, 그 과정에서 마땅히 누릴 소소한 행복을 포기한 ‘N포세대’는 작품 속 소년소녀들과 유사하다.
또한 경쟁에서 좌절되고 의욕을 잃은 채 더 이상 험한 미로 밖으로 나와 진짜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니트족*’ 역시 미로 속의 생활에 안주하기로 한 소년소녀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렇듯 디스토피아가 나타내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헬조선’이라는 이름의 미로와 같을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살아남기 위해 ‘무한 경쟁사회’라는 미로를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니트족(NEET)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신조어.

글 이주인 기자
master0207@yonsei.ac.kr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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