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 50년, 지난날 한일관계를 되짚어보다

일본 총리가 종전 시기 전후로 발표하는 담화는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 척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번 아베 담화에서는 아베 총리가 직접 사죄를 피하면서 후세들이 더 이상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과거형 사과를 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8.15경축사를 통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내 흐름과 반대로 현재 일본 내 여론은 이번 아베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일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광복 후 7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양국은 과거사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쟁점에서 관계의 해결점을 찾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한일수교 50주년이 되는 해로 한일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광복 이후 한일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알아봤다.

▲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한일수교 50년, 미완의 협정으로 맺어진 한일관계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20년 만에 일본과 수교를 맺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지난 1951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일곱 차례의 회담을 거치는 등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가 계속 결렬되며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와 일본 대표가 처음으로 만났던 1차 예비회담에서 우리나라 대표였던 양유찬 주미대사는 일본 대표에게 인디언 속담을 인용해 ‘Let us bury the hatchet(이제 우리 도끼를 파묻자)’이라며 과거를 잊어버리자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대표는 ‘묻어야 할 도끼가 어딨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상준 교수(사과대·일본정치)는 “광복 이후 일본 사람들은 20년 세월 동안 과거에 대한 반성이 별로 없었다”며 “이런 상태로 시작된 회담에서 일본의 반성 없는 역사 인식이 교섭 결렬의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요 쟁점은 청구권 문제였다. 당시 우리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동남아시아 4개국이 전쟁에 대한 배상을 받았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배상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위해 연합국과 패전국인 일본 사이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우리나라는 전승국으로 인정받지 못해 초대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나라가 항의하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하위 조항에 한일 양국이 청구권 문제를 논의해 결정한다는 것이 명시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배상이 아닌 단순히 영토가 분리되면서 생긴 재산 문제를 청구할 수 있는 청구권을 갖게 된 것이다.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안소영 연구원은 “일본의 막대한 전쟁배상금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배상을 면제하고 단순히 채권과 채무관계에 대한 청구권을 요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후처리가 이뤄졌던 것”이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패전국이었던 일본에 관대했던 이유는 소련과의 냉전체제 속에서 일본을 아시아지역의 전략적 파트너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한일회담에서 우리나라가 청구권을 요구하자 오히려 일본은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땅에서 가져오지 못한 재산을 보상해줘야 한다는 역청구권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길고 길었던 논의 끝에 지난 1965년, 극적으로 한일협정이 타결돼 국교정상화가 이뤄졌다. 당시 우리 정부는 경제발전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해 과거사 문제는 더 이상 건들지 않고 회담을 진행했다. 이에 학생들과 야당을 주축으로 과거사에 대한 사죄 없이 돈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한일회담반대투쟁이 크게 전개되기도 했다. 김 교수는 “한일협정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성사가 됐다”며 “경제발전과 한일관계의 복원 등 얻은 것은 많지만, 한일관계 자체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과거사 문제, 판도라 상자가 열리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우리나라는 무상 자금*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를 일본에 제공받을 수 있게 됐고, 이 자금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데 일정한 도움을 주었다. 그 후 한일관계에서 과거사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세계가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고,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숙하게 되면서다. 미봉책으로 남아있던 과거사 문제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린 셈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우리나라가 먼저 과거사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기보다는 일본 내부적으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안 연구원은 “일본 내부에서 역사적 반성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집권을 했던 자민당의 약화와 냉전체제의 종식으로 인한 국제관계의 변동”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993년 고노 담화와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강제성을 처음으로 시인하고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처럼 일본이 먼저 자기반성을 했음에도 당시 한일관계가 해결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일본 정치인들이 반성해도 일본 내부에서 우익들이 반발하는 우경화가 벌어졌다”며 “이러한 일본의 국내적 반발을 보고 우리는 일본이 과거 반성을 하지 않는다고 느껴 한일관계의 갈등이 깊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일본 극우 시위대가 욱일승천기를 들고 혐한 시위를 하고 있다.

심각해지는 일본의 우경화

 한일관계가 좋았던 적도 있었다. 국교정상화 이후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대중문화를 접할 수 없었는데, 1998년 우리 정부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다. 점차 개방의 범위를 확대해가면서 한일 양국 간에는 만화·영화·가요 등 다양한 문화 교류가 늘어났고, 겨울연가와 K-Pop 등의 한류열풍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뜨거웠던 문화 교류도 최근 정치적 이유로 차가워지고 있다. 발디딜틈이 없었던 '한류의 거리' 신오쿠보가 최근 휑해진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일본의 우경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우경화의 움직임으로 ▲역사 왜곡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자위대 군대 전환 추진 등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는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지옥섬’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 연구원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을 당했었던 식민지배의 어두운 측면은 제외하고 근대화 유적이라는 자부심만 부각하는 것이 문제”라며 “아베 정권의 우경적인 성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한일관계의 주요 현안인 ▲독도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자 미불임금 문제 또한 한일 간의 역사 인식 문제가 근저에 깔렸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갈등을 악화시킨다. 서울신문과 에이스리서치가 전국 성인남녀 1천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69.5%가 일본에 대해 비호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이어 호감이 없는 이유는 46.2%가 ‘일본 사회 일부에서의 우경화 움직임 때문’이었고, 33.1%가 ‘과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과거 식민지 지배보다도 최근의 우경화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비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안 연구원은 “일본의 장기적인 경제불황과 자민당을 견제해야 하는 야당의 약세, 그리고 예전에는 우경화 정권을 견제하던 시민사회도 계속되는 불황으로 무기력해진 것이 현재 아베 정권의 우경화가 과속화되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 국가이자, 아픈 식민지배 역사까지 얽혀있는 나라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매우 중요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한일관계의 실마리는 일본 사람들이 풀어나가야 한다”며 “과거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상당수의 일본 사람들이 힘을 얻고 반성을 촉구해야 한다고 말할 때 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만을 요구한다면 한일관계의 엉킨 실타래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과거 한일관계의 변화를 교훈삼아 진정한 의미의 화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무상 자금 : 자금을 무상으로 증여하는 것.
**차관 : 정부나 기업 등이 외국 정부나 공적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빌려오는 것.

 

 

문세린 기자
peace.maker@yonsei.ac.kr 
<자료사진 미주한국일보,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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