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북한의 통일정책을 진단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다. 이에 우리나라의 성인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야하며, 군비경쟁은 우리 사회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 이렇게 분단은 우리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분단 이후 우리는 지속적으로 통일에 대한 고민을 해왔고 다양한 통일정책을 추진해왔지만, 여전히 통일은 우리에게 큰 숙제로 남아있다. 이에 우리는 지금까지의 통일정책을 살펴보며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아봤다.

▲ 남과 북 사이에 위치한 비무장 지대를 담은 사진이다.


무력 통일을 꿈꿨던 분단 직후

남북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분단의 원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48년, 한반도는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과 사회주의 진영의 구소련 사이의 냉전체제 속에서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그 직후 추진된 통일정책인 우리나라의 ‘북진통일론’과 북한의 ‘국토완정론’에는 냉전적 대립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서로의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내용의 두 정책은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했다. 고려대 북한학과 임재천 교수는 “양국 모두 자신만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규정했기 때문”이라며 “남북한 정부는 각각의 민족구성원으로부터 정당성을 얻기 위해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고 설명했다.  
‘6·25’, 우리에게 익숙한 이 날짜는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을 남긴 날이다. 하지만 당시 남과 북은 서로를 무력통일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한국전쟁은 남북의 통일정책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강진웅 교수는 “상대방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발생한 한국전쟁은 남북한을 원한의 관계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분단과 그 직후 발생한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겼고, 지금까지도 한반도에는 군사적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기존 통일정책의 한계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남북한은 1970년대에 들어 대화를 시작한다. 남북한은 데탕트*와 미·중의 핑퐁외교**와 같이 이념대립이 완화되는 국제정세를 의식해 1972년, 최초의 통일 관련 합의인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임 교수는 “1970년대 초반 국제적으로 조성된 화해 분위기가 남북한 당국에 압력으로 작용한 것”이라며 “미국은 한국을, 중국은 북한을 화해의 분위기로 유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추진된 남북의 대화는 장기집권의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비판이 있다.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국민의 관심을 돌린 후, 우리나라는 유신헌법을,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추진해 각자의 독재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남북 간의 대화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남북한 양측의 독재를 공고히 하기 위한 상호 전략적 측면도 분명 있었다”며 “심지어 우리나라가 유신헌법을 추진하기 전 북한에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 후, 우리나라는 노태우 정부 때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김대중 정부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는 등 수많은 상호 정책과 합의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군사 도발과 핵무기실험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에 대해 박명림 교수(대학원·지역학)는 “남북의 합의가 강제력 있는 형태로 체결되지 않는 이상, 현재까지 논의된 사항들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며 “이렇게 무용지물이 된 수많은 통일정책들은 오히려 분단을 고착시켰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남북의 합의는 강제력뿐만 아니라 현실성도 부족하다.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는 평화적 형태라는 점에선 긍정적이지만, 이념적으로 철저히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에 적용되긴 힘들다. 구체적인 정책 논의로 들어가면 서로의 체제가 달라 극심한 견해 차이와 대립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남북의 통일은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근대국가 간의 해결과제다. 그동안 남북한의 민족구성원은 국제법이 인정하는 근대국가의 같은 국민인 적이 없었고, 단절의 시기도 매우 길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통일을 국가 간의 해결과제로 보는 관점을 국가논리라고 한다. 이는 통일정책에 있어서 ‘우리는 한민족이니까 통일해야 한다’는 민족적 접근보다 현실적이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의 합의서와 성명에는 국가논리가 적용되지 못했다”며 “각국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해선 안 되고 공동의 이익을 증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분단국가들의 통일은 국가 내부의 통합이 선행된 후 이뤄졌다. 하지만 우리민족은 극한 이념 대립으로 이를 이루지 못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남북 분단의 단초는 국제적인 요소에 있지만, 민족 내부의 대립이 더 빠르고 격렬하게 일어났다”며 “반면 핀란드와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는 민족 내부의 연대와 단합을 통해 통일국가를 수립했다”고 지적했다. 이렇듯이 우리도 내부의 의견통합이 필수적이며, 통일정책의 내용 역시 모든 국민이 합의한 사항이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 민족은 수십 년 동안 다른 이념과 체제 하에 살아와 ‘민족주의’의 개념마저 서로 달라졌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연방이 붕괴했을 때, 북한은 오히려 ‘우리식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사회주의의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산권 국가들이 체제 유지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사회주의를 성공할 수 있는 요인으로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한 ‘조선민족제일주의’를 내세운다. 하지만 이는 집권과 통치를 위한 수단적 성격이 강했다. 박 교수는 “민족주의가 독재와 같은 내부의 억압논리와 결합할 때, 어떻게 건강성을 잃어 가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다른 북한의 체제이념과 변질된 민족주의는 통일의 직접적인 방해요소다. 임 교수는 “통일을 위한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북한의 미래를 북한 주민이 결정할 수 있을 때, 북한과 실질적인 통일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70여년의 세월 동안 서로 다르게 살아온 남과 북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 교수는 “통일 문제를 단순히 거대담론으로만 내버려두지 않고, 대학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덧붙였다. 오랜 세월 깊어진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한 하나의 민족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회구성원 모두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요구된다.

*데탕트 : 적대 관계에 있던 두 진영에 지속되던 긴장이 풀려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태이다.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 체결, 1969년 미국의 ‘닉슨독트린’ 발표 등으로 1970년대 미국과 구소련의 긴장완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핑퐁외교 : 탁구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수교를 튼 스포츠외교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군사적 지원을 했던 중국에 대한 무역금지 조치를 해제한다.
***연방제 : 다양한 주권을 보유한 단위가 더 큰 지배 하로 통합돼 가는 하나의 구조.
****우리식사회주의 : 북한의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에 기초 하여 북한의 정치경제 체제가 다른 나라의 경험에 의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주의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용어.

 

 

 

손준영 기자
son113@yonsei.ac.kr
문세린 기자
peace.maker@yonsei.ac.kr
<자료사진 통일부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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