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밤, 한 상인이 꽃가게마다 꽃을 배달하고 있다.
▲ 대학생들이 어버이날을 맞아 꽃시장에서 카네이션을 구매하고 있다.
▲ 밤샘에 지친 손님들이 24시간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늦은 밤, 시곗바늘이 자정을 가리키고 사람들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각,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꽃시장(아래 꽃시장) 사람들의 하루는 그제야 시작한다. 비닐과 신문지에 덮여있던 꽃들이 그 ‘얼굴’을 드러내고 풀냄새와 물냄새가 뒤섞인 향이 코를 찌른다. 우리나라에서 거래되는 꽃의 70%가 유통되는 꽃시장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꽃의 메카이다. 꽃시장에서는 중간상인이나 도매상인을 대상으로 한 판매가 주가 되기 때문에 남들이 모두 자는 자정이 돼야 문을 열어 낮 1시가 되면 영업이 종료된다.
가정의 달인 5월을 맞아 꽃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것을 반영하듯 꽃시장은 이른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반 꽃 반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꽃시장. 꽃시장의 하루는 어떤 모습인지, 그곳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00:00AM~03:00AM

경부선 버스를 타기 위해 대합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난 자리, 경부선 1층은 꽃을 사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특히 24시간 운영하는 롯데리아와 카페 엔제리너스에는 꽃시장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운행이 중단된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3층으로 올라간 기자들은 수입 꽃들이 잔뜩 담긴 상자들을 지나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 곳곳에는 뜯어진 상자 사이로 각 가게로 배달하기 위해 꺼내진 수입 꽃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놓여있었고, 이미 배달이 끝난 형형색색의 수입 꽃들은 독특한 매력을 풍기며 입구 가까이에서 손님들을 유혹했다. 꽃시장에 국내산 꽃이 들어오는 ‘장날’은 월·수·금. 그러나 수입 꽃은 기자들이 방문했던 화요일에 들어온다.
꽃시장에 가기 전, 기자들은 이른바 ‘큰 손’이라 불리는 도·소매 중간상인들이 개장하자마자 초반 거래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라 예상했다. ‘개장 직후 3시간인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는 도매거래가 주를 이룬다’는 포스팅을 보고 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어린이날 새벽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랬을까? 시장이 열린 지 얼마 안 된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일반 소비자들 역시 여기저기서 꽃을 사고 있었다. 새벽 시간, 졸린 표정을 숨기기 힘들어하는 아이 둘이 포함된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큰 손’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가게에 와달라고 조르는 꽃시장 상인들의 귀여운 투정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새벽 2시가 넘어가자 경부선 1층의 롯데리아는 이미 꽃을 사고 첫차가 올 때까지 잠을 청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남은 자리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롯데리아를 베이스캠프 삼아 꽃시장을 오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는데, 플로리스트이기도 한 한국농수산대 오현석(화훼·15)씨는 “동아리 ‘글로리오사’ 회원들과 함께 어버이날 행사 진행에 쓸 카네이션을 사기위해 이곳을 찾았다”며 “평소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꽃시장에 들려 꽃을 사 가곤 한다”고 말했다. 잠든 친구들 대신 불 꺼진 구석에서 노트북을 켜고 그 날 구매한 꽃들을 파악하는 오씨의 모습에서 꽃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롯데리아 구석에서 꽃을 잔뜩 들고 수다를 떨던 여대생 무리도 같은 목적으로 꽃시장을 찾은 듯했다. 서울여대 이정하(원예생명조경·14)씨는 “1년에 두 번 정도 과 행사를 위해 이곳을 찾는다”며 “오늘은 학생회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팔기 위해 꽃시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03:00AM~06:00AM

개장 후 두세 시간 동안 활기를 띠던 꽃시장은 새벽 3시가 넘어가자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상인들의 절반 정도는 가게 구석 의자에서 쪽잠을 청하고, 상인 몇몇은 “커피 드려요?”라며 잠을 쫓기 위한 커피 한 잔을 나눈다.
기자는 시장이 조금 한산해지자 상인들에게 겨우 말을 붙여볼 수 있었다. 다른 상인들과 야식을 먹고 있던 월드유통 정진영(25)씨에게 언제부터 꽃시장에서 일했냐고 묻자 그는 “오늘은 사람이 많아 원래 오는 날이 아닌데 장사를 도우러 온 것”이라며 “꽃이 좋아 벌써 일 년째 형부의 일을 돕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어 정씨는 “잠을 못 자는 게 힘들긴 하지만 잠만 잘 조절하면 시간 활용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며 “낮에 해를 보며 퇴근하는 것도 기분 좋다”고 말했다.
이 날 꽃시장에서 가장 많이 보이던 꽃은 카네이션으로, 꽃시장을 방문한 지난 5일이 어버이날 3일 전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정씨는 “5월이라 그런지 확실히 사람도 많고 꽃도 많이 팔린다”며 기자들에게 형형색색의 카네이션을 보여줬다. 기자는 카네이션하면 늘 빨간색의 카네이션만 떠올렸었는데 그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기자도 곧 있을 어버이날을 맞아 시장을 돌며 카네이션의 가격을 알아봤는데 가격이 보통 한 단에 8천 원에서 1만 원 정도 사이에서 형성돼 있었다. 다른 꽃 한 단에 비해 비싼 것 같다고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주연리본 대표 박종모(50)씨는 “다른 꽃들은 10송이에 한 단인데, 카네이션은 20송이에 한 단”이라며 “송이 단위로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게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박씨는 KBS 「다큐3일」‘꽃보다 아름다워-서울고속터미널꽃도매상가’편에도 출연했던 꽃시장의 스타라고. 주연리본의 대표이자 상가의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박씨에게 중간상인이 아닌 일반소비자들도 꽃시장에 많이 오느냐고 묻자 “일반소비자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TV에 몇 번 꽃시장이 다뤄지고 난 뒤 일반소비자들의 비중도 꽤 늘었다”고 대답했다. 이어 박씨는 “지하철 3, 7, 9호선이 한꺼번에 지나는 고속터미널역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도 꽃시장의 인기에 한몫을 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06:00AM~09:00AM

아침 6시,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불이 꺼졌던 고속버스터미널에 하나둘 불이 켜지면 꽃시장도 활기를 되찾는다. 첫차를 타고 온 새로운 손님들로 시장은 점차 북적이고 잠깐의 쪽잠을 즐기던 상인들도 전부 일어나 장사를 다시 시작한다. 새로 들어온 것은 손님만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잘 보이지 않았던 꽃들도 어느새 새로 들어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곳 상인들은 줄기 위 꽃 부분을 얼굴이라 부른다. 그래서 시장 곳곳에서 ‘얼굴 만지지 마시오’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새벽 시간의 꽃시장과 아침 시간의 꽃시장은 이처럼 같은 듯 다른 모습을 보였다.
‘꽃도 생물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점점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최대한 싸게 사기위해 기다렸던 기자들도 미리 점찍어둔 꽃들을 사기위해 시장을 본격적으로 돌아봤다. 그런데 한 바퀴 돌 때마다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꽃 가격에 기자들은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같은 상점인데도 10분 전의 가격과 10분 후의 가격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시 꽃을 사기 위해 꽃시장에 들러볼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돌아서면 달라지는 게 꽃시장의 꽃 가격이니, ‘최저가’를 찾을 게 아니라 ‘적정 가격’을 마음속에 설정해놓는 것을 추천한다. 시장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꽃과 가격이 모두 만족스러운 곳을 발견한 후에 구매해도 늦지 않다.
시장을 돌면서 기자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수국, 라넌큘러스, 카네이션 등을 구매했다. 그런데 같은 꽃 종류라도 국내산과 수입품이 섞여 있었다. 외국에서만 나는 품종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재배할 수 있는 꽃들도 수입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내산 꽃이 수입 꽃보다 가격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박씨는 “재배농민들이 비싼 값에 팔기 위해 일찍 출하한 꽃을 냉장보관 했다가 수요가 있을 때 시장에 내놓다 보니 꽃의 신선도가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며 “수입 꽃은 더 저렴하고 대량출하가 가능하다보니 도매상 입장에서는 수입산 꽃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물론 국내산이 좋긴 하지만, 아쉽게 됐다”고 푸념하는 박씨를 보며 새삼 꽃시장에도 시장개방 바람이 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9시간 동안의 꽃시장 취재를 마친 후 기자들은 꽃다발을 하나씩 안은 채 ‘터미널 꽃거지’ 꼴을 하고 터미널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동시에 이런 밤낮 바뀐 생활을 매일 하는 꽃시장 상인들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우리 품속에 안긴 꽃은 나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항상 매력적이다. 하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만 그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밤낮이 바뀐 채 늘 쪽잠을 자고, 또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꽃시장 상인들의 모습도 한 번쯤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글 민선희 기자
godssun_@yonsei.ac.kr
김민호 기자
kimino@yonsei.ac.kr
사진 손준영 기자
son113@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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