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역사 해석을 통해 제중원의 정체성과 가치 지켜내야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문을 연 이후로 130년이 지났다. 이를 맞이해, 지난 4월 10일 우리대학교 의료원은 제중원 개원 13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그런데 그보다 일주일 전인 4월 3일에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같은 행사가 진행됐다. 두 대학병원이 모두 자신들의 모태를 제중원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러한 ‘제중원 뿌리논쟁(아래 뿌리논쟁)’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마크 리퍼트(Mark Lippert) 주한 미국대사가 피습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받기로 하면서 다시 심화됐다. 치료경과를 밝히는 브리핑에서 세브란스병원이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천명하자, 서울대학교병원 측에서 반발했기 때문이다. 

 
제중원은 어떤 기관?
 
제중원은 1885년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본래의 이름은 ‘광혜원(廣惠院)’이었으나, 개원 2주 만에 ‘백성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했다. 제중원의 설립은 1876년 문호개방 이후 조선의 근대화 분위기와 미국 개신교 선교 사업이 맞물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조선 내에서는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는 등 신문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미국 개신교도들은 전도방식의 하나로 의료 전파를 택했기 때문이다.
 
한편, 제중원의 설립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은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이다. 알렌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심한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써, 조선에 서양의술의 효과를 입증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설립안’을 제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이 탄생하게 된다. 당시 조선정부는 제중원을 외교·통상을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아래 외아문)소속의 하부기관으로 두고, 관리를 파견했다. 즉, 제중원은 조선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알렌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의료선교를 통해 운영하는 ‘관민합작’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알렌 사후 제중원은 한동안 ▲관리들의 부패로 인한 재정악화 ▲의료진 부족으로 인한 실적부진 등의 운영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중원을 맡게 된 것이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이다. 에비슨은 고종에게 건의해 1894년 9월 조선정부로부터 제중원의 전적인 운영권을 넘겨받게 된다. 에비슨은 당시 제중원의 시설적인 측면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Severance)’가 예산을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병원건물을 준공하게 된다. 그리고 제중원의 의료진들을 그대로 수용한 상태로, 1904년 민간병원인 ‘세브란스기념병원’이 개원한다. 
 
제중원 역사 논란이 중요한 이유
 
제중원은 당시 격동의 역사를 겪고 있던 조선사회에 불던 ‘근대화’라는 새로운 바람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우리나라 근대의학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의의를 지니는 유서 깊은 기관인 제중원은, 우리나라의 개신교 선교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기관인 제중원이 누구의 역사로 귀속되느냐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제중원이라는 상징적 기관이 주는 의미를 누가 획득하냐에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그 대학병원이 차지하는 위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대학교의 역사는 지금까지 제중원 역사와 함께해왔기에 연세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뿌리논쟁’에 제대로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유권이냐 경영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른바 ‘뿌리논쟁’은 지난 1978년 서울대학교병원 측에서 자신들이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이는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계승했다’는 사학계의 정설과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의 주요 주장은 제중원이 국가기관에 소속된 ‘국립병원’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중원은 외아문에 소속돼있었고, 조선정부는 제중원의 재정과 행정인력을 지원했다. 제중원에서 실질적인 의료 업무를 담당한 것은 외국인 선교사들이지만, 이들이 제중원의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며, 실질적인 행정책임을 진 것은 모두 조선 관리들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근거는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이 된 ‘대한의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중원이 나온다는 것이다. 특히 대한의원의 기원이 된 기관 중 하나인 광제원은 ▲제중원 부지와 건물을 사용했다는 점 ▲제중원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운영됐다는 점에서 제중원을 계승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병원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기본적으로 ‘국립’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국립’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설립하고 운영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단순하게 바라보면 국가의 주체성이나 의지여부와 상관없이 국가가 세우기만 하면 모두 ‘국립’기관이 될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의도에 따라 세워진 모든 기관이 ‘국립기관’이 되며, 우리의 역사의 많은 부분이 일제식민지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제중원을 단순히 ‘국가소유의 병원’으로만 볼 수도 없다. 조선정부가 제중원에서 의료 업무를 보던 선교사들에게 공식적인 의견을 전달할 때에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야했는데, 이는 제중원이 단순한 국가기관이 아니라 당시 미국과 조선 간의 외교적 통로를 했던 합자병원의 성격을 띠었음을 방증한다. 외국인 선교사들과 조선의 관리들은 상하관계가 아닌, 평등한 주체로서 존재했다. 또한 1894년 에비슨은 조선정부로부터 제중원의 운영권을 전적으로 넘겨받았으며, 1904년에는 세브란스의 지원을 받아 민간병원인 세브란스병원으로 변모하는데, 제중원의 의료진이 세브란스병원으로 그대로 옮겨갔다는 점도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계승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를 통해 ‘소유권’의 측면에서도 제중원이 국가소유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변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주장하는 제중원에서 광제원, 대한의원으로의 흐름에 대해서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대학교 신규환 연구조교수(의과대·의사학과)는 “제중원, 광제원, 대한의원은 병원의 성격자체가 다르다”며 “심지어 대한의원은 후에 조선총독부의원과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등으로 연결돼 일제 식민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관으로 존속했다”고 밝혔다. 서울대학교병원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흐리는 주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객관성과, 해석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성을 둘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구성원들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기에 신중하게 고증될 필요가 있다. 특히 제중원은 근대화 및 식민지 등의 격동의 시기를 거쳤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관은 자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소급하고 싶어한다”고 말한 신 교수의 말과 같이, 서울대학교병원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제중원의 역사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편입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시도가 지속되면, 그 자체로 제중원의 역사적 가치를 감소시킬 수 있기에, 하루빨리 정당한 역사적 해석을 통해 논란을 잠식시킬 필요가 있다. 
 
*보빙사 :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에 파견한 최초의 외교사절단
**대한의원 : 조선정부 내부(內部) 소속의 국립병원이었던 한방병원 성격의 광제원, 궁내부 소속의 적십자병원, 그리고 학부(學部)소속의 경성의학부가 합쳐지면서 1907년 설치된 국립병원
 
 
권아랑 기자
chunchuara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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